2일차 저녁
두번째 저녁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이동은 팽목에서 동거차도로 들어온 것 뿐이지만 이야기를 정리해보니 하루가 정말 길었네요.
오랜만에 배를 탔습니다.
시야를 가리는 건물도 없고, 바다로 나오니 안개도 조금씩 걷혀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바닷바람이 어찌나 상쾌하던지요.
배는 조도와 관매도와 같이 여러 섬들을 거쳤습니다. 동거차도와 서거차도는 제일 마지막 도착지였어요.
관매도를 마지막으로 정박한 배는 동거차도로 향했고. 곧 제 시야엔 인양을 하고 있는 상하이샐비지의 크레인이 보였습니다.
뉴스에서 수없이 많이 본 크레인인데도 턱 막히는 숨.
한참을 바라보다 배의 선실로 내려오니 한 아저씨께서 제게 동거차도로 들어가는거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나는 동거차사람인디. 혹시 유가족이당가.
아 유가족은 아니고. 그냥 방문차 들렀습니다.
아 그려? 내가 가방에 있는 노란리본 보고 알았지라. 어디서 왔다고?
부산에서 왔습니다.
아저씨는 제게 2년전 일을 되짚으며 말하셨습니다.
그때 바다만 빠졌어도 다 건지는 긴디.
참 저래 애들이 죽을끼 아니였는디.
배는 곧 동거차도에 정박했고.
아저씨와 전 함께 섬에 내렸습니다.
아저씨는 제게 숙소는 있냐고 물어보셨고.
사실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은 채 와서 이제 찾아봐야된다고 하니. 아저씨는 절 이장님 댁으로 데려가 주셨습니다.
이장님은 사실 싫어하시는 눈치였지만. 아저씨가 이 청년 하루 재우라며 아무렇지 않게 절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렇게 숙소가 해결되나 싶더니. 아저씨는 청년 밥 먹었는가? 라고 물어보시곤 사모님께 당당히 밥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저씨 ㅠㅠㅜ)
사실 팽목에서 아침을 거르고 들어온 터라 배가 많이 고팠던 전. 잠시 아주 잠시 고민하고. 맛있게 밥을 먹었습니다.
아저씨는 마치 본인의 집 냉장고인냥 소주를 꺼내시더니 제게 한 잔 따라주시며. 이게 촌이고. 이게 정이여. 라고 하시며 원샷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것도 정인데 번호나 주고 받자며 제 번호를 따시돈 쿨하게 이장님께 인사하고 사라지셨습니다.
밥을 다 먹은 전.
이제 유가족분들이 계시는 동거차도의 산을 올라보기로 했습니다.
산은 원래 길이 아니였지만.
가족분들과 방문자분들이 지나다님으로.
오솔길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 당도한 이 곳.
혹시나 폐가 되지 않을까 긴장하며 올라간 것이 무색할만큼. 가족분들은 절 따뜻하게 반겨주셨습니다.
그렇게 동거차도의 꼭대기로 오른 시간 1시.
햇볕은 따갑게 내리 쬐었고. 동거차도의 꼭대기이 그늘이라곤. 가족분들이 직접 가지고 오신 파라솔이 전부였습니다.
이곳에서 보니 더 답답함과 허망함이 밀려왔습니다.
이렇게나 가까웠다니요.
이렇게나 코 앞이라니요.
동거차도는 4.5.6월 미역을 채취해 한 해를 운영한다고 합니다. 7월인 지금도 바다엔 온통 미역양식장이 펼쳐져 있었고. 미역양식장과 세월호 침몰 현장의 거리는 불과 1키로도 되지 않았습니다.
가족분들은 당시엔 4월이라 수많은 어선이 미역 양식장에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수많은 어선들을 대체 왜 막았는지. 바다에만 빠져도 파도를 타고 자연스레 섬으로 밀려올 아이들을 왜 가만히 놔뒀는지. 아빠들은 허망한 목소리로 말하셨습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아버지들은 투닥투닥 싸우며 유쾌하셨습니다. 내가 왕년에 태평양을 5ㅡ6시간 항해했단 한 아버지의 말에 무슨 허풍을 쳐도라며 놀리셨고. 넌 왜 항상 내 말을 거짓말이라 생각하냐며 투닥투닥 말싸움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아버지는 스피커를 떨어트려 메모리칩이
날아가 다같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풀 속에서 칩을 찾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못찾았습니다)
하나의 파라솔이 만드는 작은 그늘에 어떻게든 모여 바람이 부네 안부네 한탄도 했고.
과자를 사와도 뭘 이런걸 사오나며. 에이 맛없어. 라며 서로에게 과자를 던지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곤
내가 지금까지 대통령을 욕한적이 없었어. 그랬는디 내가 이젠 참 대통령 욕 밖에 안하고 살어. 라고 하셨고.
난 전두환이도 욕하고 다 욕했어.
광주학살 이후 그 가족들이 얼마나 원통할까 싶은기. 이번에 방문하다 당시 5.18때의 한 할머니가 내를 붙잡고 그 이야기를 막 하는디. 할매가 아직도 아를 못찾았다자너. 하 어찌나 먹먹하던지. 라고도 하셨습니다.
이제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꺾이자 아버지들과 전 마을로 내려가 물지개를 들고 올라왔습니다.
물은 어떤 집에서 떠왔는데. 그 집은 할머니만 사시는 집이고 아드님은 시흥에 사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할머님댁에 도착해 물을 담는데. 시흥이 계신다던 아저씨가 오셨고. 아버지들과 함께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2리터 생수통에 물을 가득 담고 다시 산길을 오르는 길.
아버지 중 한분이 저분은 뭐 유가족중에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고 물으셨다.
저분이 가영이 아빠하고 의형제잖어.
원래 알던 사이여?
저 분이 가영이 건져준 분이여.
내 딸을 건져준 인연으로 맺어진 의형제.
오후가 되니. 해가 저물고 훨씬 시원하고 한산해졌다. 지개를 들고 와 모두 지쳐 흙바닥에 누워있다.
다시 샐비지를 보고 아버지들이 욕을 하셨다. 언제까지 저지랄이여. 그러다 한 아버지가 아 나도 이거 트라우마인가벼. 뭐만 하면 욕이 나와. 라고 하셨다.
그게. 그게 자연스러운거여.
그게 당연한거여. 라는 다른 아버지의 말씀.
저녁으론 아버지들이 사오신 고기를 구워먹으며 소주도 함께 마셨습니다.
은폐하고 왜곡하고 덮는데는 우리나라가 최고야.
나쁜 나라야 아주.
술 안주 삼아 하시는 말씀들.
해지고 바람 선선하니 참 좋다- 좋긴 좋은데...
이걸 좋다 해야될지 말아야할지 하하 참.
고기 구우시며 웃으시는 아버지.
해가 지고.
이곳은 밤이 빨리 찾아온다.
하늘과 달과 별이 우리를 반긴다.
바다.
그리고
두 불빛이
빨리 끝나길 바라며
우리가 반길 그들을 기다리며
오늘
잠에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