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시작점

영화 <4등>의 준호를 떠올리며

by 바라미

영화는 1998년 태릉선수촌 근처 포장마차에서 두 남자가 술을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스포츠 전문기자가 옆자리의 남자에게 잔을 기울이며 "86 아시안 게임의 영웅! 한잔 하자!"라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영웅은 무슨 영웅, 4등인데……, 어쩌겠어요, 그게 내 자리인 것 같아."라며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2014년 촌각을 다투며 펼쳐지는 초등부 수영 경기의 결과를 지켜보는 준호 엄마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선수들의 손끝이 간발의 차로 터치패드를 누르고, 선수보다 더 간절한 눈빛으로 전광판을 바라보던 준호 엄마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진맥진한 엄마는 태평한 준호를 보며 "야! 4등! 나 너 때문에 죽겠다, 진짜. 너 뭐가 되려고 그래, 너 꾸리꾸리하게 살 거야? 인생을?"이라며 닦달한다.


준호가 엄마와 함께 새 코치, 광수를 만나는 자리. 그동안 대회 참가 기록이 어떻냐는 광수의 질문에 "4등 했습니다."라고 준호가 주눅 든 채 대답하자 광수는 준호와 준호 엄마를 번갈아 보며, "뭐? 4등? 다 4등? 싹~다 4등?"이라며 한숨을 쉰다. 그러나 16년 전 아시아 신기록을 세운 국가대표 선수였던 광수는 준호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아이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코치를 맡기로 한다. 수영하는 폼이 예쁘다는 광수의 칭찬은 준호를 기쁘게 하고 강습에 대한 기대감으로 준호는 설렌다. 그러나 물이 좋고 물속에서 노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한 준호는 광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다 너를 위해 때리는 거라며 매를 드는 광수와 준호의 몸에 멍이 든 것을 보고도 1등을 위해 못 본 척하는 엄마 사이에 형성되고 묵인된 폭력의 카프텔 속에서 어린 준호는 시들어간다.


사찰에서 불공을 드리고 돌아오는 길, 작은아들 기훈이가 뭘 빌었냐고 묻자 "응, 준호형 메달 따게 해 달라고.", "나는?"이라며 서운해하는 아이를 보며, "우리 기호,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그리고 아빠는 건강?"이라고 대답한다. "엄마는?" 하고 이어지는 질문에, "엄마는 없어."라고 딱 잘라 말하는 그녀. 그녀는 아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코치를 찾아가 수영계에서 사장시키겠노라 으름장을 놓고 돌아온 남편에게 고백한다. "자기야, 난 솔직히 준호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더 무서워."라고. 안톤 체호프의 ⌈사랑스러운 사람⌋의 주인공 올렌카가 생각났다. 사랑을 할 때마다 모든 관심사와 말과 행동을 상대에 맞추던 여인. 자신은 텅 빈 채, 타인화되던 여인. 마침내 그녀가 몰두한 대상이 중학생, 사샤가 되었을 때, 그녀는 온통 모성 본능으로 채워지며 그녀가 계획한 아이의 미래를 위해 정성을 다한다. 그러나 사샤는 꿈속에서도 시달리며 "가만 안 있을 거야! 어서 꺼져!"라고 잠꼬대를 한다. 준호가 수영을 그만둔 후, 준호에게 쏟아붓던 모든 관심과 지원을 끊고 휘청거리던 그녀는 둘째 아들의 공부에 몰두하면서 다시 기운을 차린다.


엄마의 집착과 훈련을 가장한 코치의 폭력에서 벗어났지만 준호는 여전히 수영장이 그립다. 그리고 수영을 계속하기 위해 1등을 하기로 결심한다. 엄마 차 찬스를 동생에게 빼앗기고, 버스를 타고 수영 대회에 출전하는 준호. 그리고 난생처음, 스스로 욕심을 낸 대통령 배 수영 대회에서 1등을 한다. 아이의 얼굴 위로 살짝 퍼지는 미소. 혼자서 조용히 자축하는 준호. 누군가 물었다. 그 애가 그 대회에서 1등을 하는 것이 이 영화의 클리셰가 아니냐고.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고. 그게 다 광수의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은 결과가 아니겠냐고. 그래서 상상했다. 지난번 대회에서 준호 엄마 말에 의하면 '거의 1등'을 했던 준호가, 다시 4등을 하는 장면. 그 애가 고개를 숙였을까? 그 애가 때 늦은 후회로 눈물을 흘렸을까? 내겐 코치도, 그 누구의 조력도 없이 혼자서 해낸 4등의 의미를 귀하게 생각하는 그 애의 깊어진 눈빛이 보였다.


고등학생이 되자 미술 수업을 그만두겠다는 아이를 대신해 유화를 시작했다. 나의 첫 번째 그림은 4등 포스터. 수영장 깊은 곳에서 빛을 듬뿍 받으며 웃고 있는 소년의 표정은 내게 행복 그 자체로 다가왔다. 고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스케치를 하고, 생전 처음 유화 물감으로 색을 만들고 칠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얼굴과 몸의 비율을 맞추고, 수영장 타일을 선이 아니라 음영의 면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은 들리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준호의 머리 위로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의 향연을 표현할 길 없던 나는, 하얀색 점을 투박하게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캔버스를 채우는 일은 어려웠고, 그림을 언제 끝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어 초조했다. 준호와는 다르게 미술에 타고난 자질이 없는 나는 여전히, 하얀 캔버스를 마주할 때마다 막막하다. 그러면서도 유화를 포기하지 않는 건 어쩌다 그은 선 하나가 음영이 되고, 툭 얹은 붓 자국이 의도하지 않은 색의 조화를 이룰 때의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언제 그림을 끝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래도 어느 순간, 여기가 끝이다 싶은 순간이 온다. 바로 그 순간, 그림 한 장이 완성되고 또 다른 그림이 시작된다. 첫 작품, '4등'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나의 선명한 시작점을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지금의 내가 가늠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준호가 혼자의 힘으로 수영대회에서 1등을 하고,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듯이.


나의 4등은 실패가 아니라 시작점이다. 준호의 4등이 그런 것처럼.


바라미에세이스트

느리게 책을 읽고 깊게 영화를 보고,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브런치에 글을 차곡차곡 모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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