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대는 우울 씨의 1인 식탁
오늘의 메뉴: 라면
1부-라면은 나의 힘
난 "라면이 질린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아니, 이해조차 할 수 없다. 라면이 왜 질리지? 가난한 시절 라면만 먹고살아서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라면을 먹지 않는다는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된다. 부모가 가난했던, 누구나 대체로 평범하고 평등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나는 라면을 주식으로 먹었었다. 남의 표현을 적당히 빌려 쓰자면,
라면 봉지 함부로 구기지 마라
너는 한 번이라도 누군가의 배를 따뜻하게 채워준 일이 있느냐
분식 장려 운동의 그늘에서 자란 덕에 라면은 매일 먹어줘야 하는 끼니 그 자체였다.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은 라면만 먹다가 영양실조가 왔었다. 얼굴에 마른버짐이 핀, 야윈 8살 적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서늘하다. 그런 동생도 지금까지 라면을 좋아한다. 우린 어린 나이에도 라면을 끓일 줄 알았다. 학교를 마치고 아무도 없는 집에 오면 우린 석유곤로에 라면을 끓였다. 소고기라면, 해피 라면, 큐라면. 라면 중에서 100원도 안 하는 가장 싼 것들이었다. 소고기라면이 가장 쌌지만 맛이 별로여서 1~20원 더 비싼 다른 라면을 사보는 나름의 사치도 부려봤다. 물 조절을 잘 못해서 싱거워져도 맛있었다. 계란도 없고 김치도 없었다. 우린 그냥 꼬불꼬불한 라면을 후후 불어 삼키면 그만이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10살 무렵에는 근 1년간 삼시 세끼 라면만 먹었다. 난 라면을 끓일 줄 알았지만 라면밖에 끓일 줄 몰랐다. 어느 날, 어머니는 주방 문턱에 걸터앉아 나에게 밥 짓는 요령을 가르쳤다. 취사 버튼만 내리누르면 밥이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밥 기계의 내솥에 조막손을 담그면서 반복해서 물을 재어봤다.
"이제 너도 할 수 있겠나?"
"응, 엄마. 이제 내도 잘할 수 있다."
어머니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며칠 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난 밥을 할 수 있었지만 냉장고엔 반찬이 없었다. 반찬 만드는 건 배우지 못했다. 아버지는 술만 드셨고 가끔 밥을 지어놓고 나가셨다. 부엌 찬장엔 주황색 라면봉지 10개가 두줄로 놓여 있었다. 우리 형제는 밥과 반찬을 겸할 수 있는 맛있는 라면을 고민 없이 매일, 매끼 끓여먹었다. 부모님에게 "과자 사 먹게 100원만."하고 아이들이 손을 내밀던 시절이었다. 밤늦게 돌아온 아버지가 불콰해진 얼굴로 밥솥을 열어보고 지어놓은 밥이 그대로 있으면 혼이 났다. 그래도 라면 살 동전이나 1~2천 원 정도는 형제의 잠자는 머리맡에 두고 나가셨다. 하루하루가 라면 면발처럼 매웠고 쉽게 끊어졌지만 그럭저럭 버텼다.
어느 날 갑자기 고모가 반찬통을 들고 와서 우리를 껴안고 한참을 울다 갔다. 고모가 쥐어준 만 원짜리로 먹고 싶었던 과자와 비싼 라면을 여러 개 샀다. 우린 평소 사이좋게 한 개를 끓여 먹었는데 그날은 두 개를 끓여 먹었다. 고모가 해 온 반찬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고모가 혹시 아빠가 이상한 약 같은 거 사다 놓은 거 없냐고 해서 마루 밑에서 평소 보았던 농약병 꺼내 준 것만 기억에 남아있다.
라면의 빙하기가 왔다. 일 년여 만에 어머니가 제자리로 돌아오시자 우리는 한동안 라면을 못 먹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온 기쁨은 매우 컸지만 라면은 전격적으로 금지식품이 되었다. 마른버짐이 핀 동생 얼굴을 어루만지며 우시던 어머니는 라면과 양은냄비를 가져다 버렸다. 우린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라면을 떠나보냈다. 아버지가 가스레인지를 사 오셨다. 동시에 냄비를 두 개나 올릴 수 있다는 사실에 신나서 박수를 쳤다. 고급스러운 검정 가스레인지에 라면을 끓일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이 더 걸렸지만 일단 우린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동생의 얼굴도 차츰 고운 피부결을 되찾았고 우린 가끔 운 좋게 허락받고 먹을 수 있는 라면을 귀한 간식처럼 여겼다. 어느 날은 생라면을 식용유에 튀겨서 설탕을 뿌린 라면땅을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다. 새로운 맛에 눈을 번쩍 떴다. 라면 섭취의 짧은 해빙기라고나 할까. 하지만 곧 다시 긴 빙하기가 찾아왔다.
라면이 뉴스에 등장했다. 공업용 우지를 사용해서 라면을 만들었다고 연일 시끄러웠다. 우리가 늘 먹던 바로 그 라면회사였다. 당시 잘 팔리던 라면이었고 맛도 좋았다. 코미디언들이 라면에서 거품이 난다고 세숫대야를 가져다 놓고 머리 감는 연기를 했다. 우리가 잘 먹던 라면이 슈퍼에서 자취를 감췄다. 라면은 건강에 나쁜 음식이라고, 밀가루도 나쁜 거라고, 쌀을 먹어야 한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버지도 라면을 좋아하셨는데 라면 1개를 끓이면 국수 소면을 섞어서 끓이게 했었다. 동생과 나는 라면 면발만 골라 건져 먹었다. 스프도 버려졌다. 굵은 멸치에 김치를 썰어 넣고 밥을 말아 넣는 것으로 대체됐다. 동생은 굵은 다시용 멸치를 골라내다가 혼이 났다. 라면에 국수를 조금 넣은 게 아니라 국수 한 다발에 라면 반 개를 넣은 것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 적은 양마저도 얼마 못가 우리 집에선 라면이 멸종됐다.
고등학교만 마치면 혼자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평소 말씀에 나는 감명을 받았다. 친구들에게 대학 진학과 동시에 독립하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97년 11월 19일, 한파주의보 속에 수능을 치렀다. 사흘 뒤, 경상도 억양이 강했던 대통령의 IMF 구제금융 담화가 발표됐다. 칼국수를 즐겨먹던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송구스럽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고난을 극복하자.
대학은 서울로 가겠다는 생각을 접고 지역의 무난한 대학교에 진학했다. 어찌어찌 입학금만 빌려 간신히 대학 등록을 했다. 그래도 독립선언문을 외친 나는 학교 뒤편 동네에 자취집을 얻었다. 근로장학생을 신청하고 수업을 마치면 학교 박물관에 가서 고고학과 학생들과 발굴한 유물에서 흙을 털어냈다. 학교가 끝나면 음식점에서 닭 조리 일을 했다. 음식점 일을 마치면 대학가 고깃집으로 옮겨 새벽 6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업시간엔 졸기가 일쑤였다. 대학을 온 건지, 취업전선에 뛰어든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자취방에선 옷만 갈아입거나 지쳐 잠만 잤다. 자취방 문을 열면 수도꼭지만 하나 있었고 방문을 열면 벽에 대못을 서너 개 박아둔 게 전부인 작은 집이었다. 화장실도 없었다. 버너를 사다가 저녁엔 라면을 끓여먹기 시작했다. 가끔 친구가 놀러 와 같이 라면을 먹었다. 돈을 아끼려고 고추장을 두어 숟갈 떠서 넣고 끓이니 떡볶이 비슷한 맛이 났다. 짜게 먹으니 포만감은 있었지만 허기는 여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