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아무 때나 두근댄다. 심장이 불룩거리는 느낌. 갑자기 심하게 어지럽기도 한다. 밥 먹다가, 운전하다가, 일하다가, 티브이 보다가, 아이와 놀다가 그냥 빠르게 뛴다.
지인이 어쩌면 이석증일 거라고 해서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방음 부스 안에 앉아 바깥의 간호조무사와 청력검사를 했다. 전라도 억양이 남아있는 앳된 조무사는 시종 무표정하게 진행했다. 마이크로 자신이 들려주는 단어를 듣고 따라 말하라고 했는데 헤드셋으로 들리는 사투리가 강해서 나는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의사는 내게 안대를 씌우고 눕혔다 일으켜 세웠다를 반복했다. 내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뱅뱅 돌리기도 했다. 어둠 속을 헤매는 긴 검사 끝에 의사는 미안한 표정으로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발견 못했을 수도 있으니 검사를 반복해 보겠냐고 했다. 네 번의 검사 끝에 발견된 경우도 있다고 했다. 괜찮다고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어지러울 때 즉시 오시면 제가 잘해드리겠습니다."
월급의 하루치가 검사비로 사라졌다. 처방전 없이 빈손으로 병원을 나서는데 화가 나기보다는 병이 발견되지 않아서 미안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혹시 어지럼증이 눈 때문인가 싶어서 이튿날 퇴근길에 안과를 들렀다. 접수를 하고 기다리는데 접수원이 나를 불렀다. 진찰 들어가기 전에 시력검사를 해주겠노라고 했다. 시력 측정이 끝나자 안구 건조증 검사를 하겠냐고 해서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는데 6만 원이라고 했다.
"선생님 뵙기 전에 검사하시면 도움이 되십니다."
'가만, 의사를 만나기도 전에 검사를 하나?' 싶어 됐다고 했다. 컨택트렌즈를 열심히 끼던 20대 시절부터 내 눈은 이미 건조했다. 지금은 안구가 마른 게 문제가 아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만난 젊은 남자 의사는 온종일 환자에게 시달린 모양이었다. 한 여름 저녁, 교통통제마저 끝났는데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최후미의 마라토너를 마주친 기분이었다.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마라토너는 내 이야기를 듣고 눈을 까뒤집어 관찰하더니 문득 좁쌀 같은 걸 하나 짜주었다. 반사적으로 마라토너를 밀칠 뻔 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남자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그게 원인이었나요?"
"아니오, 그건 그냥 피지를 짜드린 거예요. 아마 노안일 겁니다."
"노안? 시력엔 이상 없었는데요?"
"그럴 나이가 되셨어요."
그럴 나이. 생물학적 노화니까 약도 없고 노안치고는 나이가 젊어서 노안수술도 권하지 않는단다. 이 모든 게 노안 때문이라니.
"노안 때문에 가슴도 두근거리나요?"
"어지러우면 그럴 수도 있죠. 서서히 적응해 보세요."
마라토너는 인공눈물을 처방해 주었다. 병명이 있어서 덜 무안했다.
"난 노안이야."
아내에게 노안 진단 소식을 전하자 파안대소했다. 한참을 웃더니 명쾌하게 노안이 아닐 거라고 했다. 그러나 난 노안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IT 개발자 아내의 단순 추정보다 안과 전문의의 기계적이나마 의료진단을 믿기로 했다. 눈이 보배인데 맞아, 그것 때문에 어지러웠던 모양이야. 어지럽고 가슴이 두근거릴 땐 눈을 감고 있는 편이 좋겠다. 눈감고 잠잘 때만큼은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잠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노안환자가 된 지 2주가량이 지났고 증세는 날로 심해졌다. 아내는 종합검진을 받아 보라고 했다. 건강검진은 두 달 전에 받았다. 지방간 어쩌고 외에는 아무 말썽이 없었다.
'나 코로나 블루인가?'
우울감이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우울증 치료를 받아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리상담사를 만나볼까 했는데 친구가 말렸다. 가서 한참 울고 나면 좋긴 한데 감정 소모가 심해서 갈 때마다 부담이 된다고 했다.
"야, 약 먹으면 금방 편해진다. 그냥 약 처방받아서 먹어."
그래, 정신과가 있었지!
정신과 진료는 서른 즈음 딱 한 번 받아봤다. 다니던 회사가 부도 직전이었고 월급이 몇 달째 밀려있었다. 잠도 잘 못 자고 굉장히 예민해져 있었다. 원효로의 허름한 건물 3층에 있는 병원. 병원 문을 들어서자 의사는 진료실 문 앞에 서서 대기실에 와있던 한 환자를 꾸짖고 있었다. 돈도 없이 진료를 자꾸 오는 모양이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젊은 아가씨가 절박한 표정으로 물러서지 않고 서서 지청구를 다 받아내고 있었다. 대기실엔 큰 몸집을 소파에 파묻은 채 웅크리고 있던 검은 옷의 여학생, 낮술을 한 듯한 대머리 아저씨, 낡은 주홍색 레자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인조 소파. 정신과의 첫인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나는 귀신이 보인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 류의 반복질문을 수백 개 풀고 나서 의사를 만났다.
"잠이 잘 안 와요. 모서리에 눈이 찔릴 것 같고. 가끔 개미 환각도 봅니다."
"가만히 있는 모서리가 왜 눈을 찔러요? 개미는 인간에게 아무 해를 못 끼칩니다. 아까 어떤 사람들이 다녀간 줄 아세요? 군대가 가기 싫다, 유학 가고 싶지 않다, 결혼식이 다음 주인데 도망가고 싶다. 다 이래요. 군대를 가야지 왜 안 갑니까? 유학 가기 싫으면 안 가면 될 걸 왜 고민해요? 배 부른 소리 아닙니까? 결혼 안 할 거면서 프러포즈 반지 받고 왜 좋아서 울었을까요? 인간의 마음이 이래요. 그냥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논리로는. 그냥 약 먹으면 좋아집니다. 약 드릴 테니까 드셔 보시고 다음에 다시 오세요."
한 시간 가량 의사와 마주 앉아 환자 험담을 들었다. 고개를 간간히 주억거리며 "아!", "예."의 추임새를 넣었다.
나는 그날 밤 아주 오랜만에 잘 잤다. 정신과 의사조차 정신적으로 불안한 걸 보고 나니 누구나 말할 수 없는 불안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약은 쓰레기 통에 버렸다. 그리고 다시 그 병원에 가지 않았다.
첫 정신과 경험은 정신과 방문을 한참 망설이게 했지만 용기를 냈다. 예약 보증금을 받는 게 특이했다. 며칠 뒤, 약속한 시간보다 10분 일찍 병원에 들어갔다. 문이 쉽게 열려서 살짝 놀랐다. 의외로 병원은 클래식 음악감상실 같았다. 대기실에서 환자끼리도 특별히 경계하지 않았다. 다소 시끄럽게 뛰어다니다 바닥에 드러눕는 남자아이가 눈에 띄는 정도였다. 나지막이 흐르는 재즈가 긴장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노란빛의 샹들리에가 오후의 햇살과 잘 어우러져 실내를 포근하게 감싸줬다. 먼저 심박 검사를 했다. 수치가 높게 나오자 재검사를 해주곤 이제 됐다고 간호사가 안심시켰다. 의사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아주 빠르게 키보드로 옮겨 적었다.
"뭘 해드릴까요?'
"친구가 약 먹으면 편하다고 해서 약을 받고 싶습니다. 심장이 두근대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네, 약 먹으면 좋아집니다. 사실 심박은 정상인데 두근거린다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약을 드시면 편안해질 겁니다. 1주일 동안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약은 아침, 저녁 각 1번씩 먹는다. 못 견딜 때 먹는 "수시 약"도 처방받았다. 약의 이름은 "노르작". 약을 먹자 잠이 잘 왔다. 평소 딸아이를 재우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유튜브를 보고 책도 읽고 청소도 하며 밤 12시를 넘겨 늦은 잠을 자곤 했었는데 약을 먹자 9시면 졸렸다. 자다가 중간에 화장실 가려고 깨지도 않았다. 아이 이불 덮어주려 중간에 깰 법도 한데 난 기분 좋게 잠이 들고 깼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기분도 한결 좋아졌고 어지러움도 사라졌다. 그리고 식욕이 사라졌다.
"어떠셨어요?"
"좋습니다. 다 좋아졌어요. 아침엔 좀 더 잤으면 할 정도로 잘 자요. 두근대는 것도 사라지고요. 식욕이 없는 정도만 불편하네요."
"사람에 따라 달라요. 차분해지면서 성욕이 사라지기도 하고 식욕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식욕이 사라지자 체중이 빠지기 시작한다. 억지로 다이어트하려고 애썼던 것이 허무할 정도다. 100kg이 넘던 체중은 이제 두 자리로 바뀌었다. 이제 내가 챙겨 먹는 주요 식단은 약이 되었다. 내 귀엔 이석이 없고 내 눈엔 노안 증세가 없다. 심장도 빨리 뛰지 않고 더 이상 어지럽지도 않다. 살이 빠지면서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있다.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아니, 이제 확실히 알겠다. 처방이 몸을 지배한다. 약은 1년 정도 먹어야 한다. 1년 동안 살이 빠진다면 나는 슈퍼모델처럼 마른 몸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좋다. 내가 원한 건 명확한 병명과 처방이었으니까.
나는 명확한 게 좋다. 세상 살면서 가장 겁나는 건 "모른다."라는 말이었다. 난 이 약을 삼키면서 "무슨 병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함께 삼키고 있다. "모른다."의 반대말은 "안다."가 아니라 "모르지 않는다."이므로, 나는 모르지 않는 상태에 있음에 안심하며 오늘도 약을 먹는다. 이비인후과 의사의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와 안과 의사의 "노안입니다."는 모두 확실한 "안다."였지만 그것은 결국 "나는 확실히 다 안다."의 확증편향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안다."는 "모른다."와 같다. 그래, 의사 공부를 한 거지, 나를 공부한 것은 아니니까 틀릴 수도 있다고 하자, 후후. 어쩌면 나의 이유 없는 두근거림은 살수록 모르는 것이 늘어가는 40대 아저씨의 사춘기가 아니겠니. 사춘기 몸아, 반항하지 마라. 이제 내 손엔 명확한 약이 있다. 이 사춘기가 지나면 내 정신의 이곳저곳이 굵어지고 털이 자라겠지. 어른의 몸속에 숨어 살던 10대의 내가 진짜 어른이 될 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