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5.3
여행기간 : 2016.5.1~ 5.6
작성일 : 2017.4.11
동행 : 촬영팀 후배 "초이"와
여행컨셉 : 여행지 답사
오토바이 천국
늦게 시작한 하루지만 오늘은 시내 중심가로의 이동이 빈번했다.
길에 정말 많은 오토바이들이 다닌다. 시골이래도 러시아워는 있고 또 아침저녁으로 정체되는 구간도 있긴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한산한 편인데, 오토바이의 비중이 늘 차를 앞지른다.
여성 드라이버도 많고
대가족이 오토바이 한 대에 모두 타고 다니기도 한다.
공항 근처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여기저기 쉽게 오토바이 대여점도 찾을 수 있다.
필리핀 대중 교통, 지푸니와 트라이시클
호텔 앞이 길쭉한 팔라완섬을 길게 이어주는 중심 대로라 지푸니가 많다. 지푸니는 스쿨버스처럼 생겼는데, 좀 작다. 트럭을 개조한 게 아닐까 하는데, 클래식한 모양이 멋스럽기까지 하다.
지푸니는 우리로 치면 시내버스 정도가 아닐까? 지푸니마다 앞에 행선지가 적혀 있다. 따갈로그어의 표기는 알파벳으로 하는데 우리한테는 그냥 해독 불가의 기호일 뿐^^
표기문자는 누구나 읽을 수는 있지만 의미를 파악할 수는 없다는 것. 한자문화권에 사는 사람이라 차라리 표의문자라면 대략적인 의미라도 파악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타는 방식도 재밌다. 차량 뒤가 문도 없이 뚫려있는데, 승객은 거기로 타고 내린다. 모두들 창을 등지고 마주보며 길게 앉는다. 군용트럭의 군인들처럼.
한 번 타보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배차시간이나 행선지를 모르니... 왜 국내에서도 낯선 도시 가면 버스타기가 좀 망설여지는데, 외국에서는 사실 시내버스 엄두가 나지 않는 종목이긴 하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게 우리의 택시에 해당하는 트라이시클.
오토바이 위에 트럭 앞 머리 프레임을 씌운 것 같은데, 두 명 정도면 그나마 편하게 세 명은 좀 불편하게 한 명이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거꾸로 앉아서 가야한다. 길을 가다보면 오토바이 뒷자석에 한 두명씩 탄 모습도 볼 수 있다. 등교시간에 학생 7~8명을 빠글빠글 태우고 달리는 것도 봤고..
이렇게 트라이시클을 개조해 주는 가게들도 많다.
오토바이 엔진들이 다들 참^^. 어릴 때 오토바이를 십 여년 타서 2행정이 내는 특유의 소리가 세월을 먹으면 어떻게 변하는 지, 실린더나 게스킷이 마모되면 엔진에서 얼마나 흐느껴 우는 소리가 나는 지는 좀 안다. 다들 연로하신 노구를 이끌고...
주인의 밥벌이를 위해 은퇴를 보류한 것들이 도시 전체에 다닌다고 상상해 보시라.ㅎㅎㅎ 도로는 늙은 오토바이의 곡소리가 가득하다고 보면 된다.
트라이시클이 내, 외국인 가리지 않고 많이 이용하지만 아무래도 외국인들의 수요가 많을 테니, 움직이는 광고판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여러번 트라이시클을 탈 때마다 봤던 광고판.
기사한테 팔라완에서 어디를 꼭 가봐야 하냐고 물으면 십 중 십... '엘 니도'라고 답한다. 스페인어로 둥지를 뜻한다는데 지명이다. 팔라완 섬의 가장 북쪽 끝에 있는 아름다운 곳이란다. 이번 답사에선 가 볼 수 없었지만, 가이드도 똑같은 얘길한다. 푸에르토프린세사에서 차로 6~7시간 거리란다.
트라이 시클 안에서 또 공통적으로 보이는 건 종교적인 상징들이다. 카톨릭의 나라답다.
그리고 작지만 인물이 들어간 선거 홍보 스티커.
대단한 건 공보물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번호 순대로 붙어 있지는 않고, 어떤 트라이시클은 '그레이스포', 어떤 건 '두테르테'... 이런 식으로 마치 지지하는 후보자의 팬인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한 팀(여기 대선은 러닝메이트제다)의 스티커만 붙어 있다는 것. 이것도 광고비를 지불하고 붙여주는 걸테니... 상거래 도덕이 살아있달까^^
필리핀은 대통령 선거 중
대선 기간이라는 얘긴 듣고 왔다. 그리고 걸맞게 여기저기 선거 포스터가 다양한 크기로 붙어있다. 실제 와보니 대선 만이 아니라 각급 동시 선거를 치르고 있었다.
이정도 붙어 있는 건 약과.
지나가는 사람이 누가 볼까 싶게 도배를 해 놨고, 하루에도 한 두번씩 소나기가 떨어지는 이곳에서 빨래줄 같은 걸로 이어붙인 포스터는 서낭당에 걸린 무속용 천 조각처럼 바래고 떨어져서 보기 싫게 나풀대기도 한다.
이런 식인거지^^
여기서 보낸 날 중에서 하루, 가이드의 여자친구가 동행한 적이 있었는데 저녁을 먹으면서 선거에 대해 몇 가지 물어봤다.
필리핀은 투표하는 사람 모두에게 포상금을 준단다. 그래서 투표율이 늘 100% 가까이는 나온단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니, 민주주의의 축제니 하는 이데아적 표현들을 들으며 자랐지만, 말과 현실의 거리감이 크다는 걸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 또한 현실과의 괴리에 별 거부감을 못 느낄 때쯤 어른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필리핀의 투표 포상금 제도는 좀 난폭하게 얘기하자면, 신성한 권리 행사를 돈으로 유인 또는 구매하는 꼴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도 이런 논쟁이 있었기에 필리핀의 포상금 제도를 듣자, 내가 비판적인 목소리는 없는 지 물어봤다.
세상에... 전 국민에게 돈 주면 그게 축제 아닌가?
아차차...
그러네. 어쩌면 실질적인 모양새는 필리핀 선거가 더 축제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공돈이 생기니 즐겁지 않은가.
포상금도 생각하기 나름이라, 요즘 말로 하면 최소한의 기본소득 쯤으로 여겨도 좋을 법하다. 물론 몇 년에 한 번씩 지급하는 거긴 하지만, 빈부, 교육, 성별 등 우리가 늘 익숙해 하는 차별적 기준과 무관하게 일정 나이 이상의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동일 액을 지급한다는 것... 뭐,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사고가 거기까지 이르니, 이거 나쁘지 않은데 싶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도입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얄팍한 액수로 유혹하면 오히려 반감을 초래할 수도 있고, 액수가 커지면 투표 잘 안하는 세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포퓰리즘이라고 핏대 세우며 난장 부릴 축도 분명 튀어 나올 것 같고...
가이드 여자 친구는 당연히 두테르테의 당선을 점쳤고, 자신도 그에게 투표할 거라고 했다. 실은 그렇게 많은 선거포스터가 뒤덮인 팔라완에서 며칠을 보내는 동안 길에서 두테르테의 사진을 볼 기회는 별로 없어서, 설마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두테르테가 인물이 그렇게 호감형이 아닌지라 선거 캠프에서 사진 대신 이름과 정책만 강조하는 포스터로 전략을 잡은 듯 하다.)
귀국 후, 두테르테의 당선 소식을 뉴스로 봤다.
현지에서 TV를 통해선 그레이스 포와의 2파전이라 했는데, 두테르테가 결국 낙승했단다. 그리고 두테르테는 트럼프, 홍준표 아재 저리가라 할 정도의 막말과 살인교사 등의 의심에 이렇다 할 해명도 없는 막가파식 정책 드라이브로 외신에 자주 오르내렸다.
분석가들 중에는 그레이스 포 가문이나 아키노 가문처럼 기존 정치 귀족 세력들의 과두정치 시대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이 선출직 공직자의 지역, 출신 계급 독과점을 무너뜨린 것이라며, 필리핀 민주주의의 혁명적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정반대로 극우적 포퓰리즘 시대의 첫 단추라는 해석도 있다. 계층적 박탈감과 정치 혐오에 빠진 대중이 결국 히틀러로 응집되었던 걸 우린 극우적 포퓰리즘이라 부르고 있고, 사실 세계 곳곳은 "타자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한 극우적 포퓰리즘이 대유행이긴 하다.
유약하고 계급 이익에 충실한 중도파들이 과반을 이루면서 추진력도 상실하고, 이합집산만 해 대는 꼴은 반드시 정치 혐오로 이어진다. 정치 대안 부재 속에서 약간 중에 있거나 좀 우에 있거나 그 놈이 그 놈같은 것들이 국민들을 가르치려 들고 가지고 놀기를 일쌈는 것에 질려 버렸을 때, 고상한 척 하지 않고 민족적으로 과하게 폐쇄적인 인물이 인기를 끄는 게 최근 전지구적인 추세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정권을 인수한 유약한 정치 귀족 집단은 쿠데타로 정권 탈취를 감행한 박정희에게 속수무책 읍소한다. 그리고 비극적 최후를 맞으면서 반신반인으로 추앙하는 맹신도들의 1대 교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2대 교주 또한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고 정부 기관에 신체를 위탁하고 있지만, 불쌍해서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영남권 중심의 노년층들에게는 박해받는 순교자 이미지로... 그래서 곧 부활의 기적을 행하리라는 믿음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매번 대중이 옳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50~100년 단위로 보면 늘 대중의 선택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간다고 그러긴 하더라. 잘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최근 유럽의 선거 결과는 극우들이 예상만큼 정권을 찬탈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마두테르테와 트럼프가 해 대는 꼴을 보면서 각국의 극우 민족주의 세력에 기대려던 표심이 각성을 좀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악이 현화하기 전엔 악인지 선인지 인지하기 어려운 법.
불행하게도 우린 그 악의 현화를 드라마, 영화, 소설, 심지어 현실에서도 보고 있지만, 아직 그 악의 전체적 규모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고, 검찰이라는 악이 악의 정화를 맡고 있는 꼴이며, 악의 패권이 워낙 오래되어서 '선거가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현실 괴리적 언어에 거부감을 별로 못 느끼는 것 처럼 악에 대한 거부감 또한 그러그러하게 여기며 사는 것 같다.
그나저나 필리핀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후회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