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5.5
여행기간 : 2016.5.1~ 5.6
작성일 : 2017.4.25
동행 : 촬영팀 후배 "초이"와
여행컨셉 : 여행지 답사
천상의 재현 or 왈츠의 향연, 지하강
거친 파도에 잠시 시달렸다고 해도, 살짝 안으로 굽어진 해안 라인으로 들어서는 순간,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 색감과 풍광... 어떡할꺼냐고...
하지만 메인이 기다리고 있어서 몇 컷 사진만 찍고 황급히 숲으로 난 소로를 따라 들어가야 했다.
필리핀이 흡연자들의 천국 같은 곳이지만 여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이라는 거.
배에서 내려서서 백사장 중간에 난 소로로 들어설 때 벌금 액수까지 명시한 입간판이 겁을 준다^^.
언더그라운드리버는 말그대로 강이다. 그래서 탐방을 위해서는 또 작은 카약을 타야하는데 거기까지는 울창한 숲 사이에 놓인 나무 데크길을 따라간다.
그렇게 멀지는 않다. 약간 컴컴할 정도로 울창한 숲길은 서늘하고 약간 더 습한 느낌이었기에 기분 좋게 산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햇살이 비치는 곳이 나타나는데 여기가 카약을 타는 곳이다.
누가 파란색 물감을 푼 듯한, 사실 자연스럽지 않은 느낌까지 나는 푸른 물이 고인 작은 호수같은 곳이다.
수시로 십 수명을 실은 카약이 들락거리는 곳엔 검은 색만 보이는 굴이 있다.
애게~ 저걸 보러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살짝 기대치보다 못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사실이다.
새벽에 출발했다는 통영 분들은 몇 시간의 대기 끝에 이제 막 카약에 올라타고 있었다.
물빛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파란색부터 초록색까지 시나브로 바낀다. 허허 참...
그렇게 카약의 뒤를 쫒아 셔터버튼을 눌러대다가 뒤를 돌아보니,
헉~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이다.
이때 가이드가 따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사람들이 앉은 벤치쪽을 지나 더 아래, 그러니까 해안쪽으로 내려가니,
나무가 거의 눕다시피 수면 위로 굵은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넌, 전생에 무슨 선을 쌓아서 이 어린 나이에 벌써 여길 다 와보니? ㅋㅋ
아름다운 풍경이구나 하며 사진을 찍는데... 어라 가이드가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계속 걸어간다.
도대체 뭐가 있는데 자꾸 오라고 말이야...
그렇게 도착한 곳은
감히 비유하자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천국의 풍경", 바로 거기였다.
명경같은 차가운 물이 모래 위를 살짝 덮고 찬찬히 흐르는 와중에 우리나라 피래미 정도로 보이는 민물고기 떼가 무리를 지어 다닌다.
실제 그 놈들은 물처럼 투명해서 실물을 보긴 어려웠고, 물 바닥의 모래면에 그림자만 보였다.
그냥 고인물이 아니라 느리지만 흐른다.
저 동굴에서 흘러나와 바다로 가는, 이제껏 지하에서 수 십km를 흐르다가 처음으로 햇빛 아래 나온 강물이다.
유추컨데, 이 황홀한 물빛은 바다와 강의 공동 작업으로 이룬 예술품이리라.
동굴 근처는 물 깊이가 약간 있지만 여긴 조수간만에 따라 바닷물과 지하수가 교대로 세를 넘보는...
그래서 바다의 힘이 밀어올린 모래가 만든 모래톱. 그 위로 차고 맑은 물이 수막처럼 살짝 덮고 흐르는 곳이다.
전혀 다른 성분과 운동성을 가진 두 힘이 밀거니 당기거니 하면서 오랜 기간 자연스레 만들어낸 예술 작품이지 않을까한다.
물의 깊이에 따라 보여주는 오묘한 담채의 변화란...
그걸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시력까지 진화해 준 포유류 이전의 조상들에게까지 고마운 마음이 든다면 오버인가.^^
세계자연유산.
여섯 글자가 새롭게 해석된다. 물론 너무도 인간적인 발상의 설정이지만,
세계자연유산이란,
이 우주가 의식 조차 하지 않고(자연스럽게)
다음 우주에 전하는 자산이지 않을까?
아름답다.
그때 다리를 둥둥 걷고 발가락 사이를 가지럽히는 모래알을 희롱하면서 걸어들어오는 남매.
지들 눈에 각인된 이 풍경이 지들의 남은 삶에 표 나진 않을지라도 반드시 강력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만 하고.^^
나도 모르게 내지른 탄성을 듣고 한 두 명씩, 상상 속의 천국을 영접하러 들어온다.
그들의 걸음이 만들어내는 물결의 힘과
그런 작은 힘 하나 놓치지 않고 수용하는 맑은 강물과
그 에너지들의 변화를 투과율을 조절해서 시각화 할 줄 아는 태양빛이 만나
세 박자 왈츠 춤곡을 연주한다.
이러고 있는데 어찌 저 건너와 여기가 인간계와 천상계로 느껴지지 않겠는가?
여기 쭉 살면 나같은 무신론자도 혹여 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에 빠질지도 몰라.
어머니 가이아는 어찌 이런 것을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잘도 만들어 낸 걸까^^
이 모든 풍광은 며칠간 큰 비가 오지 않았고, 오늘 하늘이 완전히 갠 때문이다.
작년 지리산 천왕봉에서의 일출에 이어,
우리 가문이 삼 대째 덕을 쌓았다는 걸 강력하게 증거해 주는 천지 조화구나.ㅋㅋ
Underground River
넋 놓고 무아지경에 빠진 상태에서 우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우리 차례가 되었다고 빨리 오란다.
10여 명이 함께 배를 타고, 동승한 레인저의 느릿한 노질의 속도만큼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입구부터 날아다니는 것들은 전부 박쥐들이다.
기괴한 입구의 석회 천장과 헬맷 사이가 그렇게 멀지 않다. 손에 닿을 듯 한데 그러지 말란다. 수 만년 동안 진행된, 그리고 지금도 조금씩 변화를 겪고 있는 이 동굴에 최대한 영향을 안 미치는 게 우리가 할 도리란다. 맞는 말씀.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물 속엔 엄청난 수의 작은 물고기떼와 밑바닥 끝까지 훤히 다 보일 정도의 "맑음"이라는 현상이 이승의 경계가 이러하지 않을까하는 느낌을 주기 충분했다.
손전등을 들고 오지 말라고 했던 경고 문구가 있었는데, 대부분 손전등을 휴대하고 있었고 아무도 제재하는 사람은 없었다. 완전한 어둠으로 그 오랜 세월을 보내다가 하필 호기심쟁이들인 인간종에 들키는 바람에 매일매일 빛이 난무하게 되었을 거야. 다행히 그닥 성능들이 좋은 건 아니었다.
레인저가 머리에 쓰고 있는 라이트가 제일 밝았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게 바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천장에 보이는 검은 반점들은 모두 박쥐다. 생각보다 동굴의 폭과 높이가 컸다. 그리고 대낮이라 잠든 아이들이 태반이었지만 수시로 들락이는 사람들 때문인지 깨어서는 신경질적인 괴성을 내며 날아다니는 박쥐들도 많았다.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이 지하강은 세계적으로 몇 개 없는 사례이고, 그 중 길이면에서는 가장 길다고 한다. 아직 완벽한 실체가 연구되지는 못했고, 전체 길이는 십 수km로 유추하고 있으며 접근 가능한 8km 정도까지만 학술적 연구가 진행 중이란다. 이 배는 그 중에서 1km님짓, 정말 일부만 운행을 한다.
그래도 동굴에서 보내는 시간은 1시간 정도였던 것 같다. 입구쪽만 몇 장의 사진을 찍고 한계 감도 이상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그냥 카메라를 가방에 넣어버리고 동영상만 좀 찍었다.
동굴 속 바위들이 만들어 낸 여러 모양에 따라 성모바위, 코끼리 바위 등의 이름을 지어 붙였고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참, 여기선 카약을 타기 직전 도슨트 서비스를 각국의 언어로 제공해 주는 기계를 목에 걸어준다. 목에 걸어주면서 한국인이면 알아서 코드를 눌러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배가 출발하면 플레이 버튼을 누르라고 손짓으로 "Push"라고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근데 도슨트 서비스에 녹음된 한국인 남성 성우의 말이 참 맛깔스럽다.
원어를 그대로 옮긴 것 같지 않은...
우리말의 늬앙스와 유머감각이 적당히 잘 섞인 매력적인 서비스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다들 이어폰을 통해 자기 나라 말로 플레이 되는 음성을 듣게 되는데, 각각 웃는 타이밍이 조금씩 다르다. 근데 모든 사람들이 한 두 번씩은 박장대소한다.
너무 아름답다고 넋을 놓고 입 벌리고 천장을 올려다 보지 마세요. 입안으로 액체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액체에 담긴 동굴의 신령스런 기운 덕분에 장수한다는 말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액체가 10중 8, 9 박쥐의 오줌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익살스런 말주변을 자랑한다.
여튼 유네스코 지정 유산이라 신경을 많이 쓴 건지... 충분히 칭찬 받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성우의 말에 의하면 수 많은 세월동안 박쥐가 외부에서 보충한 영양분을 분비물의 형태로 동굴 속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빛이 전혀 없는 이곳에 유기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고, 그 결과 이 동굴 안은 나름 완벽한 생태계가 구축이 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은 물이 바위에 가하는 영향보다 그 생태계가 주는 영향(박쥐 오줌처럼)이 더 커서 색이 전혀 다른 바위라던가 다른 현상들을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한데, 이 모든 것이 자연유산으로 지켜야 할 것으로 정의한단다.
옳은 말씀.
내가 자주 쓰는 말인데,
조직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그 조직의 형질에 아무런 변화가 없거나, 조직에서 어떤 이가 나갔는데도 조직의 메카니즘이 그대로라면 그 조직은 이미 죽은 조직이다.
내가 엄마 뱃 속에 있을 때 내 몸을 이루던 세포 중에서 40이 넘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세포보다 없던 새 세포가 더 많아야 하듯, 내가 필리핀에서 보낸 며칠간 들어온 음식과 향신료로 인해 내 대장 속 대장균의 종류와 우점종이 변화를 겪어야만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 아닐까? 기실 나라는 존재는 단 한 순간도 동일한 정체성으로 정의할 수 없다. 모든 생명은 그렇지 않을까?
쿠사나기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 고스트만 유지하고 똑같은 모양의 새로운 쉘을 입히면 그는 쿠사나기인가 아닌가? 그게 공각기동대 애니 원작 밑바닥에 깔고 있는 "존재의 정의가 가능한가?" 라는 본질적인 철학적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카메론 아저씨는 간과한 듯 하지만…
이 동굴은 살아있다. 그래서 지금도 꾸준히 변화하고 있고, 의도했건 말건 그 과정에 갑작스런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우리가 유산을 잠시 공유했다가 다음 우주로 보내는 도리일 것이다. 아마 이 도슨트 프로그램이나 유네스코가 방문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세지가 이런 게 아닐까? 아니지. 그래야만 한다.
반환점은 거대한 홀이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넓은 공간에는 여러 대의 카약이 턴을 하며 멈춰서서 이런 저런 설명을 하고 불빛들이 교차하는 가히 현실 같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다시 처음 출발했던 광명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보통은 어둠에서 빛을 만나면 안도가 되는데, 거의 카약에 탄 모두가 그랬겠지만 반대의 느낌을 받았다.
서늘하지만 엄마의 자궁 속에 있는 듯한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끝나는 구나...
저 앞에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느 날 자기 인생의 한 순간을 잘라서 여기 오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나를 포함, 모두는 어쩌면 세계의 희귀한 현상이나 큰 볼거리를 교환 가치를 지불하는 형태로 소비한다.
소비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인 수혜는 감각기관들의 몫이다.
눈이 즐거운,
향이 좋은,
귓가에 보드라운,
매혹적인 감촉의,
혀 끝에서 녹는 감미로운...
지하강에서 보낸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누린 내 감각기관들의 만족도는 전혀 비용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하지만 지하강이 주는, 우주가 다음 우주에 전하는 유산이 묻고 있는 궁극적인 질문과 느낌까지 내 오감 기관들이 캐치할 수는 없다.
그 혜택은 내 머리와 가슴이 누렸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내가 남은 인생 만나게 될 여행의 기쁨이 오감만이 아니라 가슴과 머리로도 전해져 달라고... 정말 오늘만 같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