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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 민스미어 01_느닷없이 걸려온 전화

"영국에 같이 갈래요?" _ 2013.4.18

by 조운

여행기간 : 2013.4.18 - 4.23
작성일 : 2016.8.4
동행 : 인턴기자, 박사코스 유학생 그리고 존경하는 그
여행컨셉 : 영상 촬영 출장






강이 아닌 '무엇'이 되기까지


4대강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이미 자연, 마을, 생명들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2013년, 이때 4대강 사업이라 붙여진 사업은 '완료'를 선언한 상태였다.
사업이 펼쳐지는 동안, 오래도록 안정되었던 순환은 고리가 동강동강 끊어졌다. 부서진 것들이 부서진 상태로 안정되리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깨어졌다. 오히려 '동강동강 끊어짐'이 사업의 종착지가 되면서 '끊어진 상태'의 유지(안정)를 위한 결코 끝날 수 없는 사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본래 순환의 존재를 순환하지 않는 상태로 묶어둘 수는 없음이 드러난 것이다.

1.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고 의지하며 살기


오래된 지질 위를 흘러가는 이 나라의 강은 계절에 따른 기온과 강수량의 변동에 따라,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다양한 모습을 만들어 낸다.
물가를 떠나서 살 수 없었던 우리는, 강에 다가가서 많은 혜택을 얻어내지만, 강은 또한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했다. 우리는 한편으로 순응하면서 변화가 주는 혜택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한편으로는 갑작스런 변동이 주는 피해를 면하기 위해서 이런 변동을 예측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강이 일순간 차지하고 있던 땅의 면적만이 강의 것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어떤 때는 아주 작은 면적을 요구하고 어떤 때는 꽤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뚜렷한 주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우리의 발견은 강에 의지해서 먹고 살아야 하지만, 시기에 따라 강이 주도해서 만들어내는 경계면을 이해하고 그 리듬에 맞춰(공명해서) 순환하는 법을 익히기에 이른다.

2. 이수(利水)와 치수(治水)


세월이 흘러 우리는 강이 주는 혜택을 더 많이 요구하고, 강의 몸집 크기가 주도하는 경계 너머까지 상시적으로 이용하고 싶은 욕심을 품기 시작했다. 강이 실제 의도했건 말건 우리 입장에서만 보면, 강이 주도권을 가지느냐, 우리가 주도권을 얻느냐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규정을 정하는 지위'에서 '같은 욕구를 가진 상대'로 강을 끌어내렸다. 한편으로는 대상화된 강을 더 많이 이용하려고,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부족할 때 사용하기도 하고(이수), 한편으로는 변화를 예측하고 경계를 침범당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취하기 시작했다(치수).
하지만, 더러 예측 범위를 넘어서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스스로 정한 '규정을 위반'하는 강에게 패하기 일쑤였다.
오랜 세월 변화무쌍한 강의 변덕을 예측 범위 내로 묶어두기 위한 우리의 분투와 그 범위를 넘어서는 강의 위엄이 계절에 따른 순환 처럼, 또 다른 순환을 이루며 세월은 흘러갔다.

3. 승자가 되는 착각


강이 차지하고자 하는 땅의 면적은 본래 유동적인 것일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배타적인 경계면 안쪽에 대한 권리' 개념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부당한 행위였다.
강이 만들어내는 충적토에서 상시적, 지속적, 배타적인 권리를 얻어내고 싶어졌고, 협동과 기술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어오던 주도권 싸움에서 최초의 승리는 강이 주는 풍경을 버리는 흥정으로 가능했다.
바로 뚝의 건설이다. 제방을 쌓자, 강이 옆에 있지만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우리 삶에서 깔끔하게 구역을 정해서 강을 몰아내었다. 더러 강이 범람을 욕구하고 뚝이 터질 때가 있지만, 예전에 비하면 제법 안정된, '부분적인 순환의 끊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4. 순환의 끊음


우리가 비록 승리감에 도취되긴 했으나, 아주 가끔의 범람을 막기위한 댓가가 너무나 막대하여, 차라리 강이 한 번씩 숨통을 터뜨리는 것을 허락하고 불완전하지만 화해하고 공존하는 것이 완벽한 승리보다 더 현명할 수 있겠다고 여기는 시대가 제법 길게 지속되었다.
강 또한 몸집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구간들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 세월동안 생명을 기르고 질서를 세우며 '새로운 순환의 안정'을 이루어왔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우리는 이제 지상 위로 300m가 넘는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고, 산을 뚫어 둘러가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바다가 차지하던 면적을 육지로 편입해서 배타적인 경계면을 늘리게 되었다.
이제는 주두권을 두고 자연을 대상화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강을 강 아닌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순환이라는 본질 조차 없앨 수 있는 가공할 힘과 기술을 가지게 되었으며 다른 대부분의 경우처럼 그런 것이 갖춰지면 기필코 감행했다.
강은 '수로'로 명명되었다. 순환은 동강동강 끊어졌다. 짧은 시간 강의 본질을 바꾸는 사업은 많은 부작용이 있었지만, 일단락되었다. 그것이 옳은 방향인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예상한 '수로'의 완성은 실패했다. 강은 수로조차 되지 않았다. 강도 수로도 아닌 다른 것, 무어라 불러야 할 지 모를 '무엇'이 되었다. 이제 강 아닌 '무엇'은 더러 뿜어내기도 하던 야성을 거세 당했다.
명작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에서 사슴신은 뭍 생명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하지만, 그것들 다시 거두어 가기도 한다. 생명력은 생명과 죽음이 묶인 채로만 존재할 수 있다. 그걸 길들여서 하나만 남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이다. 우리는 강의 야성 중에서 우리에게 단 것만 취하고 쓴 것을 없애겠다는 기획에 동의했다. 먼저 했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중 거의 대부분이 동의했다.
기획의 정확한 의도는 아직도 옥신각신 중이다. 그러나 동의했던 기획 즉, 원하는 것만 남기려는 시도가 헛된 몽상이었음은 강 아닌 '무엇'이 더이상 생명을 품으려고도 하지 않고, 스스로가 완성한 순환의 질서를 갈갈이 찢어 엎어버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뒤늦게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우리는 '무엇'이 정말 '무엇' 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냥 강이 아님만을 알 수 있을 뿐.

5. 우리가 알지 못한 낯선 '무엇'


순환의 끊음이, 본질의 변형이, 명칭을 변경한 것이, 끝이라 생각했지만, 그 '무엇'은 또 다른 '무엇'이 되어갔다. 그래도 계절은 바뀌고 기온과 강수량에 따라 '무엇'은 강이던 시절의 순환 비슷한 습관들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 순환이 악순환으로 보도되는 모습을 매년 보게 되었다.
그렇게 '강'이라는 호칭을 유지할 수 있는 항상성은 없어졌다. 원래의 선순환 시절, 때가 되면 돌아오던 것들 중 영영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이 늘어났다. 이제는 다른 것이 돌아온다. <원령공주>에서 어느 산의 돼지신처럼 독기 품은 보복으로.

몇몇이 지어붙인 라떼라는 냉소는 강의 독성에 대한 일반명사 등급을 거의 획득해 버렸다


영국에 가 봅시다


두 갈래의 길이 보인다


첫 번째 길은

'무엇'을 다시 어떤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상태가 되길 기다리는 것이다. 어쩌면 초여름부터 녹조로 뒤덮이고, 그나마 품던 생명들까지 때죽음으로 몰아넣는 현상이 이 '무엇'의 존재를 정의할 수 있는 주기성일 지도 모른다. 중간 중간 막힌 보 때문에 물을 따라 같이 흐르던 모래가 멈추고 그 자리에 수풀이 우거지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화할 지도 모른다. 이런 현상이 안정이 되어(우리의 예측 가능 범위 내로 들어오고, 지난하고 비효율적일지라도, "대응"이라는 것을 매년 가능하게 해 주는) '존재의 본질'를 정의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그때 그것을 '무엇'아닌 것으로 명명하자. 그 상태가 우리에게 '해악'적 존재이거나,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불용, 무용 정도의 상태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우리가 강에 의존해서 살던 때부터 한 번도 강과 설정해 보지 못한 관계로 가는 거다.
불용, 무용의 존재로 인간과 강이 제갈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불편도 이익도 주지 않는 상태라...
이 길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책이다.

아니면

'무엇'도 아닌 것을 우리를 포함해서 많은 생명에게 이로웠던,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존재인지 익숙한 "강"으로 되돌리는 길도 있다.
한바탕 헛된 몽상으로 모든 것(존재의 본질)을 바꾸고 난 후,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강에게 요구했던 '이수'의 필요를 포함해서, 강이 해오던 일들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강이 우리를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에게 혜택을 주었고, 그 많은 일들이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이익으로 돌아왔음을 강을 강 아닌 '무엇'으로 바꾼 지금 비로소 깨닭았다. 그 일은 절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어리석은 가해자였지만, 결국 피해자도 될 수 밖에 없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우리가 예측 가능했다고 여긴 것은 일부였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 예측이란 것도 실은 공허한 장난질이었다는 것을 포함해서.
이 두 번째의 길은 우리가 절대 할 수 없는 역할을 강이 주도적으로 다시 해 주길 바라는 길이다. '무엇'인 채로 또 그게 '무엇'이 되었다고 정의하고 유지하려는 노력과는 정반대로 다시 강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재부여하는 길이다.
이 길이 맞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 길을 걸어도 갈래길은 또 나타난다.
우리 중 일부는 사업이 완료 선언을 한 이후, 이 두번째 길의 방법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본질을 바꾸는 방법 중에서 우리가 가장 익숙하고 잘 하는 방법은 파괴다. 강에 대항하고 파괴한 방식처럼 다시 '무엇'에 대항해서 파괴하는 방법말고 다른 방법은 정말 없을까?

이 여행은 이 두 번째의 길을 선택하고나서 또 한번의 갈래길을 만났고, 파괴가 아닌 길을 먼저 걸어봤던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다.
어느날 그들을 찾아 영국으로 가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출발은 일주일 정도 뒤에 하면 좋겠단다.


'민스미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왔으면 해요.
같이 갈 수 있나?


그는 몇 해를 연락없이 지내다가도 어제까지 연락했던 양, 전화한다.
늘 그렇듯, 그의 제안을 들으면 나는 머리속으로 일정과 약속들 중에서 취소나 연기가 가능한 것들을 최대로 모색하게 된다. 그리고 정말 불가하다는 판단이 들지 않으면 보통 제안에 응한다.

그렇게 난생 처음 유럽까지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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