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4.19
여행기간 : 2013.4.18 - 4.23
작성일 : 2016.8.26
동행 : 인턴기자, 박사코스 유학생 그리고 존경하는 그
여행컨셉 : 영상 촬영 출장
오래된 버릇이다.
낯선 도시를 가면 언제나 내가 머무는 곳을 중심으로 지리를 탐구(?)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평소에도 방향감각을 상실하면 멘붕에 빠지기도 하고, 심지어 위, 경도상의 대략적인 좌표값을 감지하고 있지 못하면 불안하다.
그런 스스로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 본 결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정보를 취득하는 방식에서 상당 부분 "연역적 방법론"에 의존하고 있기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확한 진단이라 믿고 있다.
어떤 학문이나 이론 체계를 접할 때라도 총론이나 개론을 살펴보지 않으면 각론의 정보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를 몰라 쩔쩔매는 경향이 강하다. 사실 이론의 전체 틀을 미리 파악하고 있다는 건, 정보 처리에 있어서 아주 효율적인 방식이다. 전체적인 틀을 개괄적으로 파악하고 나면, 각각의 정보들이 가지는 중요도나 가치를 판단할 근거가 생기게 되고, 이후에 접근해 오는 정보들은 그 가치를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걸 취하고 버릴 지, 취한 것을 어떻게 저장할 지를 계산해서는 나름의 디렉토리와 폴더에 나만의 방식으로 재정립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효율성을 강조하는, 까칠하고 남성적인 태도라고 여겨진다. 다른 말로 하면, 게으름의 소치이다. 포용력을 가지고 모든 정보를 고르게 환대하고, 우선 넓은 방에 그 정보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아량이라고는 없다. 주관적이고 독선적이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상관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타인의 의견이나 주장들을 들을 때도 그 정보에 대한 내 선입견이 방어할 틀을 갖추고 날카롭게 재단할 여지가 많다. 알면서 잘 고쳐지지 않는다.
새로운 정보에 대한 이런 태도는 두 가지의 큰 단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내가 마련하고 있는 틀거리가 아주 보잘것 없는 것이라 여겨질 정도로 더욱 단단하고 잘 구조화된 틀을 만나게 되면 그 틀에 대한 경외감에 가까운 추종이 발생한다. 그 분야에서 내가 설정한 정보의 구조보다 더 전문적이고 식견이 높다고 판단되는 틀을 제시하는 사람을 만나면 쉽게 매료될 때가 많다. 이때는 그의 틀로 나의 준거틀을 재조정해야 하는 두뇌 활동이 수반된다.
물론 고통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희열 같은 것까지 생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고 더욱 단단해진 틀은 한층 배타적인 정보 취득 구조로 작용한다.
그래서 뛰어난 사기꾼을 만나면 속수무책일 수도 있다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두번째는 어학 습득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언어는 아무리 문법이 탄탄해도 예외도 많고, 살아서 계속해서 생성, 소멸하는 유기체적 성격의 정보 체계이다. 그러다 보니, 각각의 단어, 상용구절, 상황에 맞는 뉘앙스를 하나씩 쌓아가는 귀납적 방법론으로 익힐 때 접근을 허락하게 된다. 나 같이 정보 처리에 아량이 적은 게으른 성격의 소유자는 이런 낱개의 정보들의 중요도도 모른 채, 우선 익히고 봐야 하는 언어 체계의 습득을 잘 못 견디는 경우가 많다. 혹여 문법에 어긋나는 실용 구문이 자꾸 늘어나면 그 언어 자체를 폄훼하고 "저질 학문"으로 취급해 버리기도 한다. 영어, 일어를 시도해 봤으나, 어느 정도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은 그 언어들이 가진 풍부한 유기체성을 만났을 때
뭐, 이런 어설픈... 체계도 없고 주먹구구인...
이렇게 평가하고 책을 덮었던 적이 허다하다.
일단 받아들이고, 허물은 잠시 덮어두고 그러면서 그 정보들이 하나의 카테고리에 묶이지 않더라도 혼란스러워 하기 보다는 보듬어 안으려는 여성성이 더 필요한 학문 체계가 언어인 듯하다. 아마도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언어 습득 능력이 뛰어난 것은 바로 이런 성적 차이때문이지 않을까? 환대는 참 매력적인 가치인데, 남자라서 그런지 나만 그런지 정보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도 환대해야 한다는 이성적 의도를 발동해야만 겨우 기능하니 참...
그래도 모국어는 남들 만큼은 하는 걸 봐서, 귀납적 방법으로 정보를 얻는 게 나한테도 불가능은 아닌 듯하다. 계속 이성적으로 제어하고 노력하고... 뭐 그게 숫컷으로 태어나 살아야 할 숙명이라 생각한다.
여튼 여행을 떠날 때, 게으른 나는 생존에 필요하겠다 싶은 것 외에, 그 도시에 대한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한 정보를 선험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첫 째날 잠 잘 곳, 전체적인 동선의 윤곽 정도만 가지고 떠나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 낯선 곳을 방문하게 되면 익숙하지 않은 정보들이 갑자기 오감을 통해 밀려온다. 이때 귀납적 사고가 작동이 잘 되면 다행인데, 그러지 못한 나의 경우, 답답하기 그지 없다. 분석도 분류도 안되는 채 떠다니는 정보들에 무차별로 노출되는 거... 당해 본 사람은 그 고통을 안다.
때문에 내가 주로 사용하는 해결책은 바로 지리 탐구 되시겠다.
탐구라는 게 대단한 것은 아니다. 대로는 어디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 주택가와 상업지구의 배치는 어떻게 되어 있는 지, 이 인근 사람들의 생활 동선은 어떤 형태로 움직이고 있는 지, 태양은 어디서 떠서 어디로 지는 지, 특징적인 도시 발달의 근거는 뭔 지(정착의 목적이 강을 중심으로한 수렵이나 농사로 시작된 건지, 물류의 중심지가 되면서 상업적 목적으로 성장한 도시 인지 등등)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경을 어디 가면 확인 할 수 있는 지를 살핀다. 보통은 주변의 높은 곳에 올라가면 가장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한다고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대략적으로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만 파악한다는 거지. 보통은 그 도시에 대한 궁금증이 여행 후 본격적인 도시 탐구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인문학적 배경과 문화, 도시민들의 성향에 미친 주요 영향군들을 파악하고 싶은 지적 호기심이 생긴 이후 되겠다. 여행 떠날때는 그런 게 별로 안 생긴다. 선후가 거꾸로 되면 참 알찬 여행을 할 텐데... 안 고쳐진다^^)
계룡산 인근 호스텔에서 토론회에 참석하게 되면 새벽에 일어나서 겨울 계룡산 산행을 갔다 온다던가, 의정부의 세미나에 참석하면 새벽에 혼자 도봉산을 오른다 던가.
보통 동행이 있는 여행이나 출장이었기 때문에 내 성격에서 비롯한 이런 남모를 고생을 대 놓고 모두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고 해서 대부분 남들이 자는 시간,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몇 시간을 혼자 움직여서 파악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들은 건강을 위해서, 아니면 부지런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산책이나 조깅, 등산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정보 처리가 되지 않은 채로 1분1초도 견디지 못하는 모난 성격 탓에, 그리고 부지런히 모든 정보를 세세하게 살피지 못하고 요령을 빨리 익히려는 게으름의 소치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아픈 사연이 있다는... 이렇게 말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긴 하지만, 모두 사실이다.
부산에서부터 총 19시간의 비행을 했고, 이틀 간 잠을 거의 자지 못했지만, 새벽에 일어나는 버릇은 런던에서도 그대로였다. 게스트하우스를 나오려는데, 현관 옆 공용 컴퓨터에서 밤을 지새웠는지 가뜩이나 작은 체구의 그가 걸상 위에 몸을 구겨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깨우지 않으려 조심조심 밖으로 나왔다.
최근에는 그나마 내가 발로, 눈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지 않아도 GPS 좌표값으로 내 위치와 주변 지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앱들이 스마트 폰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
영국은 첫 방문이라 제법 넓은 면적을 돌아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걷기는 포기하고 처음부터 달리기로 맘을 먹었다. 집에서부터 마라톤화도 챙겨왔다.
런닝 앱을 켜고 총 거리 10km 정도만 달릴 생각으로 대로와 주택가 골목 등 방사형으로 인근 코스를 잡았다.
주택가 골목은 계획적으로 조성했는지, 구획 정리가 잘 되어 있었고 집들은 골목별로 거의 비슷비슷 했다. 같은 높이와 크기, 한 가지의 색으로 통일된 집들이 골목을 만들고 있었고, 대부분 건물 현관은 계단을 통해서 들어가게 되어 있고, 창문은 벌집구조의 절반을 잘라놓은 형식으로 외부로 툭 튀어나온 게 거의 전부였다.
전통적인 주택도 있지만, 이런 빌라형 집들도 많았다. 런던은 대도시니까.
딱 정해 놓은 목적지가 없긴 했지만, 그닥 넓지 않은 길을 달리다가 이 간판을 보게 되었다.
뭐, 이런 주택가 옆에 축구장이...
아스날 구장 옆은 그냥 주택이었다. 말하자면, 그 집 꼬맹이는 "우리 집 옆에 프로축구 축구장 있다~"라고 자랑할 수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경기장들이 대부분 공원같이 시가지와 좀 떨어진 부지에 위치한 것과 대조적이라 재밌기도 했다. 자칫 새벽이라 축구장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뻔 했을 정도...
프리미어 리그 본방을 한 번도 사수해 본 적 없을 정도로 4년에 한 번 정도만 축구 중계를 보는 사람이기에 축구장이 시가지 한 복판에 있다는 상황에만 몰두하고 그닥 큰 감흥은 못 느낀 채, 펜스 너무 불꺼진 축구장을 한 컷 남기고는 이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돌다가 비슷비슷한 골목에서 길을 잠시 헤매고 대로로 나오니 핀즈베리 파크 입구로 나오게 되었다.
아마도 이 동네 이름인 듯하다.
서서히 사위가 밝아 오는 시간에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갔다. 그 소리에 그가 잠을 깼고 땀에 쩔어 있는 나를 보더니 산책갈 때 부르지 하면서 다시 나가자고 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그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너무 어두울 때 둘러본 거리와는 또 다르게 그리고 달리면서 본 거리와는 또 다르게 천천히 사진도 찍어가면서 둘러보는 차분한 아침 풍경은 많은 감흥을 불러왔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