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26
20m 쌓인 눈밭 위에서 텐트를 치고 아침을 맞는 꿈을 꿨다.
원래 올해 일본 타테야마로 원정을 가기로 했다가 일정이 맞지 않아서 빠졌었는데... 아쉬움이 컸나보다.
눈을 뜨자 텐트 안이 벌써 훤하다. 바람도 거의 자는 이른 아침.
어라? 뭔가 텐트 위에 떨어진다. 비?
비소리 치고는...
여행기간 : 2013.25~3.26
작성일 : 2017.10.30
동행 : 독고다이~
여행컨셉 : 텐트 비박
밖으로 나와보니 아직 눈이 살짝 날리고 있다.
눈 오는 소리를 들어 본 건 처음이지 싶다. 눈 내리는 날, 그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즈넉한 곳에서 자고 일어난 게 처음이겠지만.
간밤 낮은 기온 탓에 그래도 데크 위의 눈은 얇게 나마 흔적이 남아있다.
전날에 이어 구름 층은 산 정상의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고, 신불산의 신령스런 느낌을 더한다.
많은 눈이 내리진 않았지만, 제법 상록수들 머리칼을 희긋희긋 장식해 놓았다.
아래, 인간세상쪽엔 아직 불빛이 남아있는데 그 사이 운해가 자욱하다. 범계와 선계의 구분같다.
추운 줄도 모르고 그 황홀경에 넋을 놓고 한참을 눈호강 삼매에 빠져 있었다.
어제 초저녁 잠을 방해했던 옆집 사람들도 한 명씩 텐트 밖으로 나온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장대한 풍경 감상에 동참시킨다.
이들은 비박이 처음이란다. 그런 것 치고는 장비들이 고가의 제품들이다. 오토캠핑에서 넘어 온 사람들 같다.
이런 장비들은 오랫동안 비박을 했거나 아니면 오토캠핑에서 넘어 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 비박 인구가 급성장했는데, 보통은 오토캠핑을 즐기다가 미니멀로, 다시 비박으로 넘어 온 사람들이 태반. 오토캠핑에서 넘어 오신 분들은 장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데다가, 오토캠핑 때와 달리 경량과 실용성이라는 선택 조건들 앞에 서게 되면 대부분 고가의 장비를 선호하게 되는 법.
그에 비하면, 내 장비는 목숨과 관련이 있는 침낭(내 침낭도 헝가리 구스니 하는 유명 메이커에 비해서는 터무니 없이 값싼 국산 브랜드지만) 정도만 상당한 액수를 지불했지, 나머지는 저렴한 것들 일색^^.
비박 장비 중에서 공을 들여야 할 건 딱, 침낭과 배낭이다. 그 외에는 불편하지 않을 정도면 충분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내 배낭은 좀 불편한 편이긴 하다. 벌써 네 번째 배낭인데도 말이다.
특히 비나 눈이 오면, 아침에 다시 짐을 꾸리는 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맑은 날이라도, 새벽 이슬을 잔뜩 머금어 젖어 있는 땅 위에서 패킹을 해야하는 과정은 참 번거롭다.
텐트 안에서 패킹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텐트만 접어서 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현장에서의 고충을 해결해 줄 그런 배낭은 없을까?
야영지 철수 순서에 맞게 패킹을 하면 되는 배낭이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대략적 패킹 순서를 보면,
침낭, 매트를 맨 먼저 정리하게 된다.
그 다음으로 코펠, 버너나 각종 주머니들.
이러고 나면 텐트 안에서의 패킹은 끝.
마지막으로 텐트를 걷어서 넣어야 하는데...
배낭 하단부에 침낭을 넣는 칸이 있는 배낭이든, 통으로 된 배낭이든 상관없이 맨 아래 침낭을 넣으면 된다. 에어매트를 쓰는 사람은 패킹 사이즈가 작으니 무리가 없을테지만, 나처럼 폼매트를 쓰는 사람은 보통 침낭으로 하단부 각이 잡힌 배낭 정면에 가로로 매달게 된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결국 텐트. 기타 여러 장비들을 모두 배낭에 넣어서 텐트 밖으로 나오지만, 텐트를 넣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전부 맨 바닥에 꺼내 놓아야 한다는 거... 이때 텐트가 젖어있다거나 비가 내리는 중이라면...
"그래니트 기어"에서 출시했던 획기적인 스타일의 배낭이라면...
바로 이 녀석이다.
깔끔하게 통으로 된 마감 안에 각을 맞춰서 뭔가를 채워 넣는 배낭에서 발상의 전환을...
두 개의 날개에 짐을 넣고 나서 젖었거나 부피가 큰 침낭, 매트 등을 바깥에 매다는 대신 한 가운데 넣도록 제작한 일종의 시스템 배낭류다.
해외 원정시, 배낭 외부에 폼매트나 텐트를 매달고 비행기 수화물로 부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님버스 코어라면 중앙에 텐트를 매트에 말아서 넣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림에는 침낭을 패킹 주머니에 넣어서 맨 위에 올렸지만, 한쪽 날개에 침낭만 넣어도 충분할 것 같다.
외부에 거추장스럽게 뭔가를 달지 않아도 되고, 패킹의 순서에 따라 각 구역별로 배분해서 넣을 수도 있고... 실제 사용해 보질 않아서 생각만큼 실용적일지는 모르지만.
잠깐... 이런 마음이 장비빨이라는 귀신에 홀리는 거군^^
여튼 비가 아니라서, 그리고 맨 땅 위가 아니라 데크 위라서 그나마 패킹이 험난하지는 않았지만, 비 올때의 패킹은 정말...
우선은 텐트를 헤드 위에 거치하거나 매트 위에 겹쳐서 외부에 부착하는 방법으로 해결해야겠다. 이번에 새로 친구가 된 엑스패드 썬더70도 사실 나같은 스타일의 백패커한테는 딱 좋은 모델이긴 하다.
그렇게 생각하자.... (귀신을 쫒기 위한 자기 암시를...^^)
다시 배낭을 지고 길을 나선다. 마지막으로 억새평원의 간월재를 돌아본다.
내가 잤던 데크에는 아직 그 분들이 그대로 텐트를 쳐 두고 남아있다. 아마도 좀 더 시간을 보내다가 그대로 하산을 하실 계획인가 보다. 나야 오늘 또 최대한 북진을 해야하는 사람이니... 우연이 닿으면 또 어느 산길에서 뵙자며 작별...
그나저나 이 운해를 어찌할 것인가?^^
이미 비박지가 간월재보다는 제법 고도를 올렸던 덕분에 간월산은 금방이다.
해발 1,000m를 넘어서니 그냥 구름 속이다.
역시 바람이 많은 간월 정상의 너덜 구간의 돌들은 온통 칼.
한 걸음만 잘못 내디디면 깊이를 가늠키 어려운 저 구름 아래로... ㅜㅜ
비척거리면서도 균형을 잘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전진 한다.
벌써 사람들이 다녀간 건지, 답압 덕택에 눈이 쌓일 여력이 없었던 건지, 눈 덕분에 길이 더욱 또렷하다.
관목 군락은 3월 날씨라 딱 오전에만 볼 수 있을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능선 길을 제법 걸었는데 이제 동이 트려고 한다. 멀리 울산땅에 있는 쌍봉(이런 모양만 보면 늘 그렇듯, 유두산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위쪽부터 붉은 기운이 퍼진다.
운해도 곧 사라지려 한다. 고요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은 이미 사라졌고, 뜯어 먹다 남은 솜사탕 모양으로 변한다. 저러다 이내 사라지리라.
간월산에서 약간 내려섰다가 다시 조금 고도를 올리는 찰라,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린다.
배내봉까지의 오솔길 내내 잔 가지 위로 떨어지는 눈소리 감상에 시간 가는 줄도 피곤한 줄도 모르고 흥겹기 그지없다.
오가는 이 하나 없는 이 길에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눈 내리는 소리를 만들어 주고 있는 듯한 즐거운 착각에 걸음마저 미음완보^^
그렇게 아끼면서 천천히 걸었음에도 곧 배내봉에 닿고 말았다.
아무것도 관망할 수 없는 안개낀 배내봉에서 간식만 좀 먹고 배내고개까지의 완만한 내리막을 마저 걷는다.
배내고개에서 잠시 갈등을 했지만 이걸로 쫑 하려는 맘을 굳힌 건,
종일 몇 대 없는 버스가 마침 다가와서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식량이 없다^^
결국 2박 분량으로 챙겼다 생각했던 식량은 또 모자라고...
기회는 많으니 조바심 내지 말자. 그리고 이렇게 좀 일찍 들어가서 애들이 좋아하는 알리오올리오라도 해 주면 점수도 따는 거고 ㅎㅎㅎ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벌써 2017년도 막바지로 달리고 있다.
올해 목표했던 몇 안되는 것들이 완성된 게 없고 이제는 완성할 시간도 부족하다.
그래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시도해 보지도 않은 것보다야 훨씬 진전이 있다는 게 어디인가. 신기한 건 평소라면 이런 걸 자기합리화라며 괴로워했을텐데, 전혀 그런 느낌이 없다는 거...
곧 외지로 떠나 1월 중순까지는 우리나라에 없다. 낙동정맥 완주는 커녕 반에 반도 완성을 하지 못하고 올해를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도 그렇게 실망스런 자괴감 같은 건 없다.
다만 산이 주는 느긋함을 배울 수 없었던 게... 한해 동안 고의든 아니든 상처 준 모든 이들에게 사무치게 미안하다. 돌아보니, 올해는 너무 열심히 살았다. 너무 많은 일들이 닥쳤고 그 속에서 허우적 대면서 나도 다치고 주위 사람도 다치게 했던 것 같고... 좀 더 느긋한 사람이 되고 싶다, 산처럼.
바로 그런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계속 산을 타고, 비박을 할 것이다.
다시 돌아오면 4월이 오기 전까지 이어나가리라.
나라가 내게 주는 게 별로 많지 않은 나라에 살지만, 한글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준 것과 사철 할 것 없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은 다른 모든 혐오 요소를 상쇄하고도 남는 나라라는 건 인정해야 한다.
2018년의 목표 속에도 낙동정맥 종주는 당연히 다시 들어간다. 완주면 더욱 좋지만^^
_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