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9.28
여행기간 : 2014.9.27 - 9.28
작성일 : 2016.11.22
동행 : 바다수영을 즐기는 행님들과
여행컨셉 : 백패킹
아침에 눈을 뜨니 기온이 상당히 낮다.
텐트 밖에서 주무신 행님들은 무사할까?
큰행님은 아직 누워계시고 두 분은 밤새 바람과 싸운 흔적 물씬 풍기며 멍하니 저러고 있다^^
추워서인지 이른 시간에 눈을 뜬 애들을 꼬드겨서 산책을 나섰다. 방향은 신불산 쪽.
데크길을 따라 걸으면서 뒤를 돌아보니, 가을의 자연색과 알록달록 옹기종기 모여있는 색색의 텐트들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잠깐만...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엥? 여긴...
내가 예전에 와 본 곳이잖아~
집사람이랑 한창 연애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2003년 쯤이겠다.
부산 노사모 풍물패 "노풍" 멤버들과 산행했던 곳이다. 그때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다녔는데, 지금 유추해보면 석남사로 올라서 통도사로 내려갔던 것 같다. 제비꽃이 잔뜩 있었고, 바로 저기 텐트를 친 자리 쯤에선가 노란색 제비꽃 하나를 꺾어, 당시 애인이었던 마눌님한테 줬던 기억이...^^
그렇구나. 그때는 데크가 전혀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이렇게나 풀이 울창하지 않고 저기 교차로를 중심으로 머리가 다 벗겨져 있었는데...
그래서 데크를 세웠고, 다시 이렇게 억새밭이 복원되었구나.
기억 속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머리속으로 연결시켜보니, 12년이 넘는 동안 여기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 신불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서 참 아름다운 고개라고 생각했었는데, 여기가 신불재였다니... 음... 비록 등성이가 까져있었지만, 인위적인 데크가 없었던 그때가 더 아름다웠던 것 같기도 한데...
애들한테 끝까지 올라보자고 설득했다. 그때의 그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파래소 쪽 산 능선. 해 뜨기 전, 이때가 그라데이션이 가장 이쁠때다. 딱히 색도 없이 농담만으로 이런 고운 그림을 만든다. 그야말로 수묵진경산수.
왜 하루도 빠지는 날 없이, 사시사철 비박객들이 여기 신불산을 찾는지는 바로 이 그림이 알려주는구나.
사위는 삽시간에 환해져버렸다.
정상까지는 아니지만 데크가 끝나는 곳, 흙이 없어 억새도 자라지 않는 사면까지 올라왔다.
막힌 곳이 없으니 바람이 심했다. 저 멀리 영취산까지 다 보인다.
정상이 아니라도, 백패킹의 성지 영남알프스의 심장, 신불산에서 처음으로 1박을 한 부자 셋이 기념촬영 셀카 한 장 박았다.
춥고 배고프다는 성화에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다시 신불재로 내려갔다.
내려오니 이미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어제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각 텐트들도 깨어나기 시작.
억새는 역광이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에 취해, 산행 대장의 명을 받들고 아침밥을 앉힐 물 길으러 내려갔다.
여기가 샘터다.
샘터 맞은편에 있는 샘터 산장.
우리 부자가 잤던 텐트. 사람좋은 미소를 가진 누님은 오늘의 홍일점.
행님표 얼큰 해장 라면, 다량의 콩나물과 고추가루를 넣는 게 핵심이다. 라면광인 저것들은 이제 산에서의 라면 맛까지 봐 버렸다. 태어난지 10년도 안된 것들이.
아빠 잘 만난 줄 알아라. 이것들아~
늘 그렇듯 짧은 취사 시간으로 깔끔한 숙취해소의 명약 완성.
날이 참 좋다. 요즘 사진에 흠뻑 빠져 있는 큰행님은 백통을 꺼내들고 '색 사냥' 삼매경 중.
행님의 사진은 색감이 감상 포인트다.
큰행님은 신불산 반대 방향으로 성큼 올라가버렸다. 그쪽에서 바라본 신불재 모습.
신불산까지 뻗은 능선 길과
뚜렷하게 십자를 그리고 있는 재가 이국적이다.
이런데 오면 밥먹고, 걷는 거 말고는 할 게 없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달까?
햇볕 쬐기
애나 어른이나 세대간의 격차없이 노닥거리기
칼싸움?
서로 사진 찍어주기^^
요즘 부쩍 사진에 관심이 많은 둘째를 위한 초간단 사진 강좌하기^^
그렇게 사진 몇 장을 찍어서는
다시 선생을 찾아왔다.
청출어람. 못생긴 아빠는 살짝 흐리게하고 멋진 길은 살리고 ㅋㅋㅋ
그래도 이 포커스 나간 사진이 참 마음에 들어서 핸드폰 배경으로 한참을 넣고 다녔던 것 같다.
열심히 포즈를 취하지만, 저때 찍은 사진은 더 심하게 포커스가 나갔다는 거~
한 번에 두 제자를 두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첫째 놈에게도 기회를 줬으나... 결과는 뭐^^
아무 것도 할 게 없을 것 같은데도 정말 할 게 많은 공간.
오로지 행복을 위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공간.
매연과 소음으로 몸과 마음이 인상 쓸 일이 없어지는 공간에 오면 나를 느긋하게 풀어버릴 수 있어 좋다.
비박의 참 매력이다.
그렇게 멍 때리기만 해도 몇 시간이 그냥 흘러버린다. 행복한 순간이 더욱 짧게 느껴져서, 그래서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런 곳에서 멍때리기 위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보다.
알고봤더니 첫 영남알프스 산행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영남알프스에서 잤다. 그것도 토깽이들과.
"여기가 10년도 더 전에 느그 엄마하고 같이 왔던 곳이야...
그때는 느그하고 여길 다시 올꺼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