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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Oct 24. 2018

어른이 되면서 멀어졌습니다.

최근 예전 어렸을 때 보았던 톰과 제리가 극장판으로 몇 편 제작되어 2천년대에 개봉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어렸을 적 깔깔 웃어대며 보았던 기억이 생각나서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여 몇 편 보았습니다. 

일단 보고 나서 느낀 감정은 상실감이었습니다. 추억의 영상을 보면서 느낀 감정은 그리움 같은 것이 아니라 당시의 그 감정을 다시는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상실감이라는 것이 저에게는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어린 시절 등받이 배게에 끌어안은 채 TV 속 제리의 활극을 보면서 웃던 아이는 이제 나이를 먹고 등받이 의자에 몸을 기대고 노트북 속 톰과 제리를 허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 앞에 영상은 돌아가고 있는데 제 머릿속은 복잡했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죠. 지금은 잃어버린듯한 그 감정의 부재가 서글프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영상을 보면서 왜 이제는 그런 웃음과 감동을 느낄 수 없는 걸까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이제 어른이 된 저에게 톰과 제리는 유치한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거였습니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유치한 것에 대해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시즌이 마무리되었습다만, 한창때의 무한도전에서 박명수씨와 정준하씨의 다툼은 당시 40대의 나이의 말다툼이라기에는 너무 유치한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크게 호응을 얻으며 하와 수라는 별칭까지 가지게 되었지요. 즉, 유치함과 재미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다만, 본인이 어른이기 때문에 혹은 어른으로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치함과 거리를 두려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생각난 것은 등장인물들이 동물이기 때문에 이입이 되지 않아서 이렇게 느껴지지 않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어렸을 적 재밌게 본 애니메이션은 동물이 등장인물인 작품이 많았지요. 지금 말하고 있는 톰과 제리부터 아기공룡 둘리, 날아라 슈퍼보드, 몬타나 존스 등 잠시 생각한 것만으로도 많은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네요. 시간이 지나고, 저도 나이를 먹었으니 더 이상 동물들이 주인공들인 애니메이션에는 몰입이 되지 않는 걸까요? 저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반대되는 예시가 너무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주토피아는 사실상 아이들보다는 2~30대에게 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들은 보유하고 있는 금전적 여유를 바탕으로 극장에서 보고 또 보는 것을 계속했지요. 주토피아의 인기는 관람객들 손에서 재생산된 패러디 작품들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극장에 앉아 닉과 주디가 진짜 연인으로 발전할 것인가에 대해 짐작하거나, 나무늘보의 행동에 웃음짓기도 했습니다. 즉, 동물이 주인공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너무 지나서 개그코드가 맞지 않는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최근 개그콘서트 초창기의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아직도 재밌더군요. 더워보이는 비닐로 만든 옷을 입고 희한한 가발을 둘러쓴 심현섭씨가 지팡이를 찍어대며 외쳐대는 사바나의 아침은 여전히 재밌었습니다. 즉, 개그라는 것은 생각보다 시간을 안 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토록 재밌던 것이 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것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이렇게 서글프도록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근본적 원인은요. 한참을 생각해보아도 찾지 못하다가 답답한 마음에 옆에 있던 커피를 들이키키다 뭔가가 번쩍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도 지금도 무엇인가를 집중해서 볼 때 음식을 먹거나 음료를 마시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때 저의 손에는 커피가 들려 있더군요.

제 손에 들린 커피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톰과 제리라는 어렸을 적 추억에 젖을 수 없던 이유는 단지 제가 거리를 두고 냉정히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많은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저는 공감 이전에 판단을 합니다. 어떤 것에 뛰어들기 이전에 거리를 두고 뛰어들면 생기는 수익계산을 한다는 말입니다. 멀리서 보는 관조하는 시선. 이것은 고대 철학자들부터 강조하던 것이죠.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배움과 경험을 거듭하면서 관조하는 시선을 가지게 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얻는 것이겠지요. 이 관조하는 시선은 통찰력을 주고, 실수를 줄여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뛰어들어서 겪는 감흥은 덜게 하지요.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는 대신에 큰 기쁨을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잃어버린 감흥을 경험하도록 노력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거리두기가 어른이 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기공룡 둘리를 그린 김수정 화백이 했다던 유명한 말이 있지요. '고길동 아저씨가 불쌍하게 생각되면 너도 어른이 되는 거란다' 왜일까요? 어렸을 때는 주인공에 몰입되면서 주인공은 선의 기준이 됩니다. 즉, 주인공의 적이나 주인공을 괴롭히는 캐릭터는 악이 되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둘리를 혼내는 고길동을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겪는 경험과 상식은 사건과 인물을 거리를 두고 보게 만듦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상식에 맞춰서 생각하게 하지요. 그래서 고길동 아저씨는 악에서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제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당시에는 사건 하나하나가 재밌던 이유는 선한 캐릭터가 악한 캐릭터를 징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의미있는 행동이고, 유쾌한 것이죠. 하지만 이제는 그냥 추억을 돌이키기 위해 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차이에서 오는 심리적 거리가 만들어낸 미묘한 차이가 이렇게 다른 온도를 만들어냈습니다.

등받이 베개를 끌어안고 TV 앞에 엎드려 깔깔대던 어린 아이는 이제 등받이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대고 한 손에 든 커피를 마시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화면과의 거리만큼 감흥을 놓아버렸지요. 놓아버린 감흥만큼의 쓸쓸함과 추억에 대한 상실감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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