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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Oct 06. 2018

원본과 복제는 과연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며칠전에 예술의 전당 쪽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자그마한 전시회를 하는 걸 보고 냉큼 들어가서 구경하고 나왔습니다. 두시간 내로 구로에 가야 했지만 전시도 작고, 한동안 전시를 못보았으니 일단 질렀습니다.

제가 본 전시는 이제벨 드 가네의 작품을 모아 전시한 빛의 화원전입니다. 안내에 따르면 이자벨 드 가네는 정통 인상주의를 계승하는 화가로 조제프 들라트르로부터 시작된 루앙 학파의 현 학회장입니다. 사전적으로 정의된 인상주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빛과 색채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해 가시적 세계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한 점이었다....(중략)....인상주의 화가들은 일찍부터 문학적·일화적인 의미를 담은 역사적·신화적 주제를 그릴 것을 강조하는 전통적 아카데미 회화의 가르침에 불만을 느꼈다. 또한 아카데미 회화의 특징인 판에 박힌 공상적 또는 이상적 표현기법도 거부했다.
1860년대말에 이르러 마네의 미술은 장차 인상주의의 지도지침이 될 새로운 미학을 반영했다. 즉 전통적인 주제는 중요성이 떨어지고 예술가가 구사하는 색채와 색조, 질감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었다. 마네의 회화에서 주제는 평평한 색면(色面)을 솜씨있게 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으며 또 원근법적 깊이를 최소화시켜 관람자가 그림에서 창출되는 환영적인 3차원 공간에 빠져들지 않고 그림표면의 형태와 관계들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후략)

-인상주의 회화 中 출처 : 다음백과

위의 정의에서 알 수 있는 인상주의 회화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빛과 색채, 질감 등을 이용하여 순간적으로 포착한 장면을 그린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역사적 또는 신화적 주제가 아닌 일상적 주제를 다룬다는 점입니다.

인상주의가 가지고 있는 순간을 포착하는 화풍은 흔히 화가가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하는 힘으로 대표하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들어 영화 <캐시백> 속 벤은 화가 지망생으로 시간을 멈추는 망상 혹은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시간을 멈춰서 그 안에서 순간을 포착하여 그림을 그립니다.

영화 <캐시백>에서 벤이 시간을 멈춘 순간을 샤론이 보면서 놀라고 있다. - 출처 : 다음 영화

영화 속에서 벤이 그리는 그림은 물론 인상주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인상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색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벤이 가지고 있는 성격과 능력은 인상주의와 맞닿아있는 면이 있습니다. 영화 속 화가 지망생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인상주의와 맞닿아있다는 말은 인상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화가의 특징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근거라고 말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입니다.

인상주의 그림은 영화 속 벤의 그림과는 다르게 경계선은 빛에 의해서 부서져서 색채만이 남아 강렬한 세계를 만듭니다. 저는 이 전시를 보면서 많은 그림들이 대동소이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비슷한 소재를 그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피사체들의 경계가 빛으로 부서져 있는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피사체 간의, 피사체와 배경 사이의 경계가 빛으로 부서지면서 색채로 가득찬 순간적인 미적 경험만이 남습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무너지고 우리가 되면 너와 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희미해지고 우리의 특징이 되듯이 제가 본 그림들에는 피사체의 매력은 희미하고 그림 전체의 인상이 강렬하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이 전시에서 사진을 찍다가 떠오른 생각입니다. 원본인 그림과 원본의 복제인 사진은 별개의 작품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이 생각을 풀어보기 위해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논의를 가져와서 이야기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굳이 아우라의 개념을 가져와서 제 생각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단순하게 미적 향유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이번 전시를 보면서 놀랐던 것은 어느 순간 사진 속에 찍힌 그림과 눈 앞에 있는 그림이 다르다고 느낀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상주의는 빛과 색채, 질감을 이용하여 순간을 포착하는 화풍입니다. 그래서인지 붓터치가 굉장히 거칩니다. 붓터치를 여러번 덧씌워서 실제 표면의 매끈하지 않은 질감을 부여하여 빛과 색채의 효과를 꾀하기도 합니다. 제가 원본인 그림과 복제인 사진을 별개의 텍스트로 파악한 이유는 이러한 질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생 아드라인- 이자발 드 가네 作
생 아드라인의 하늘 부분 확대

아래의 사진은 위의 사진 <생 아드라인>의 하늘 부분입니다. 이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물감이 덧칠해져서 울퉁불퉁한 표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붓터치는 질감을 만들고 화가가 본 순간의 빛과 색채를 재현합니다. 이자벨 드 가네의 모든 작품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 사진 속에서는 어떤가요? 위의 원본 사진은 어떤 질감인지 표현하기 위해 가장 뚜렷하게 이러한 특징이 드러나는 작품을 가져왔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다른 그림입니다.

글라디올러스 꽃다발- 이자벨 드 가네 作
글라디올러스 꽃다발의 일부



위의 <생 아드리안>이 질감의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반해 아래의 <글라디올러스 꽃다발>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보면 어느 그림이든지 이러한 붓터치로 인한 울퉁불퉁한 표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면 이 질감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원본을 실제 눈으로 보는 것과 사진을 통해서 그림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미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이 차이는 어째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일단 휴대폰 카메라가 가지고 있는 해상도의 한계를 생각할 수 있겠네요. 휴대폰 카메라는 여전히 발전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DSLR 등의 순수하게 사진을 찍기 위한 카메라와 인간의 눈보다는 해상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해상도의 문제보다는 눈과 카메라의 재현 방식의 차이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시각은 사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로 해석하여 재현한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눈은 서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즉, 두 개의 눈에서는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어긋나는 장면을 포착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두 개의 눈이 각자 포착한 시야를 뇌에서 해석해서 하나의 시야로 인식합니다. 즉, 인간의 시야는 눈으로 본 장면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본 장면을 바탕으로 해석된 내용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카메라는 해석하지 않습니다. 카메라에 셔터가 눌러지는 순간, 카메라의 매끈한 렌즈는 피사체를 포착하고 있는 그대로 묘사해서 화면 혹은 사진에 인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를 보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화면이나 사진의 매끈한 표면입니다. 우리가 화면 속에서 원본이 가지고 있는 울퉁불퉁한 표면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화면속의 미세한 그림자 등을 바탕으로 유추하고 해석해서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느낌을 경험하는 순간조차도 우리는 화면이나 사진의 매끈함 역시 인식합니다. 즉, 원본과 원본을 복제한 사진은 전혀 다른 미적 경험을 제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현재 저희가 살고 있는 지금을 생각해봅시다. 콘텐츠에서는 공급자가 제공하는 UI보다 수용자의 경험인 UX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공공기관에서 시행하는 문예 교육 사업도 최근 지역 중심, 수용자 중심이라는 지침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하다못해 가장 합리적인 분야 중 하나인 물리학에서도 양자역학의 관찰자효과라는 관찰자의 위치가 관측 결과에 영향을 준다는 학설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은 수용자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예술에서도 원본과 원본을 복제한 사진이 수용자에게 다른 경험을 준다면 이 두 가지는 다른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여기서 공급자 중심의 현대 미술이 가지고 있는 괴리에 대해서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만 제 논의와 어긋난 부분이 있으므로 한 소년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였던 장난에 대한 뉴스로 언급을 대신하겠습니다.

 http://www.ytn.co.kr/_ln/0104_201605271056068370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원본과 원본을 복제한 사진이 관객들에게 다른 미적 경험을 준다면 양자는 별개의 작품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여담입니다만, 그림 중에 털이 떨어져 있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저는 유통중에 훼손된 줄 알고 큐레이터 분께 괜찮은 거냐고 여쭈어보았습니다만, 작가분께서 작업하는 도중에 붓털이 떨어져 물감에 붙은 거라고 하시더군요. 자연적인 것이라 작가분께서도 손대지 않으신 것이라고요.

제 글을 보실지 안 보실지 모르겠지만 잘 모르는 관객의 멍청한 질문에도 성심성의것 답변해주신 큐레이터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때도 감사의 인사를 드렸지만 다시 드리고 싶네요.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전시나 화랑에 가셔서 저처럼 멍청한 질문을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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