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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Sep 27. 2018

구분짓기와 선택하기

며칠 전에 친구들과 DMZ 국제다큐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2년전에 다녀왔는데 그때보다 영화제가 많이 안좋더군요. 상영작 수도 모자라고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산까지 갔는데 너무 안타깝더군요. DMZ 영화제에 관한 유감은 저 말고도 다른 분들이 많이 말씀하실테니 저는 제가 이날 본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딱히 동물 관련 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같이 간 친구 중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딱히 볼 영화도 마땅치 않아서 본 영화들입니다. 동물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정말 간만에 봐서 그런지 계속해서 제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분짓기'와 '선택하기'와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엘리펀트 보이> 스틸컷 출처-다음영화

<엘리펀트 보이>에서 크리스의 아버지는 코끼리를 훈련시키면서 서로간의 교감을 중요시하며 코끼리 축구 등 코끼리에게 가혹한 훈련을 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코끼리 축구에서 골을 넣을 정도로 코끼리를 철저히 훈련시킵니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할까요? 제 생각에는 크리스의 아버지가 가족과 코끼리라는 두 가지의 구분으로 구분짓기를 하고 그에 따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의 집안 형편은 어렵습니다. 코끼리 조련사의 급여는 생계를 꾸리기 어려울 정도로 적기 때문입니다. 코끼리 조련사인 크리스의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빠른 시일 안에 코끼리를 관광객들이 원하는 만큼 조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효율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뽑아내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그 과정에서 코끼리들은 신체적 또는 정서적으로 피해를 입습니다. 결과적으로 크리스의 아버지는 본인의 적정 급여보다 얼마간의 돈을 더 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결과를 위해서 가족과 코끼리를 구분짓고 가족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동물, 원> 스틸컷 출처-다음 영화

<동물, 원>에서는 이 구분짓기가 여러 개의 두 그룹이 아니라 세 가지의 그룹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청주 동물원 안의 동물들, 다른 하나는 청주 동물원 밖에 존재하는 동물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사에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지만 행간으로 읽을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동물들입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청주 동물원 안의 동물들을 위해서 행동합니다. 그리고 청주 동물원 밖의 야생에 있는 동물들은 등장인물들의 이상이자 행동의 기준으로 존재합니다. 


사육사들은 각자 맡은 동물들을 관리한다. 야생의 본성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야생으로 방사되면 살아남는 경우가 드물다.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기 힘들고, 먹이를 구하는 능력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동물원은 그들이 적응하고 살아야 할 새로운 서식지인지도 모른다.
DMZ국제다큐영화제 http://dmzdocs.com/archives/program/%EB%8F%99%EB%AC%BC-%EC%9B%90


위의 인용은 이 영화의 시놉시스입니다. 이 시놉시스는 영화속에서 말하는 동물원이라는 공간의 아이덴티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동물원은 동물의 종을 보존하고, 야생에서 살 수 없는 동물들이 살 수 있도록 하며,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야생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장소로서 포지셔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 포지셔닝에 맞게 행동합니다. 

하지만 이 포지셔닝된 공간 속에서 군상들은 모두 자의적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청주 동물원의 동물들은 야생 속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물원 속에서도 동물들조차도 가장 이상적인 삶은 야생에서처럼 야생을 간직한 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물원이라는 제한적인 공간의 한계로 인해 동물원 속 모든 동물이 원하는 만큼 충분한 활동량을 보장해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동시에 동물원 안에는 육식동물들이 있으며, 그들이 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동물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가축으로 분류되는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동물들이 청주 동물원의 동물들의 먹이가 됩니다. 동물원 속의 동물들의 생을 유지하기 위해 그보다 많은 가축들을 먹이로 주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구분짓기는 지극히 사람들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동물들의 이상적 모델이 되는 야생동물과 생을 유지시켜야 할 동물원 속의 동물들, 그리고 동물원 속의 동물들의 먹잇감이 되는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가축들의 구분짓기는 동물원이라는 공간적 한계와 다른 동물을 먹으며 살아야하는 육체를 가진 동물이라는 한계에서 비롯됩니다.


사실 이러한 구분짓기와 선택하기는 비단 동물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엘리펀트 보이>에서 살펴보았듯이 오히려 사람들의 삶 속에서 더 많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인간도 공간적 한계와 육체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사람들 개인의 공간은 협소합니다. 인간의 공간은 실체를 가진 공간과 추상적 공간을 모두 포함합니다. 인간이 가진 고도의 지성은 추상적 공간까지도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해도 인간의 공간은 지극히 좁습니다. 직장, 학교, 가족, 연인 등은 개인의 공간을 더 좁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책, 영화, 여행 등 본인의 활동량을 보장하기 위해 공간을 넓히려는 노력을 하지만 이러한 간접적 경험은 일시적이며, 본인이 가지고 있는 좁은 공간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사람은 동물들보다 여러 종류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욕과 수면욕, 성욕 등 본능적인 욕구만이 아니라 개인마다 원하는 것이 다채롭습니다. 여기에 인간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한데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 역시 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으로 본인의 욕망을 채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공간적 한계와 육체의 한계로 인해 인간 역시 구분짓고 선택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엘리펀트 보이>에서의 크리스의 아버지의 선택들입니다.


구분짓기와 선택하기를 앞에 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의 선택이 정당하다고 확인받기를 원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소설이나 영화 속의 주인공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은 언제나 선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반대편에 선 적들은 악으로 그려집니다. 저는 구분짓기와 선택하기 자체를 부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구분짓기와 선택하기가 물질적 한계 상화에서 발생하는 이상 육체를 가지고 물질계에 사는 생명이라면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상대 진영을 악 혹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하거나 지위조차 부과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너무한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오히려 본인이 구분짓고 선택하게 된 이유를 확실히 인지하고 다른 가능성을 포기하게 된 이유를 새겨두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건설적인 사람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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