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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Jul 23. 2018

2400년 전과 비교하여 우리 사회는 발전했는가

저는 사실 다른 사람들과 말하는 것이 서툽니다. 성격이 급해서인지 제 생각이나 감정이 앞서기만 할 뿐 그걸 말로 풀어내지 못해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특히, 대중들 앞에 서면 정말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고, 빨리 내려가고 싶은 생각만 듭니다. 고등학교때까지만 해도 발표 수업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갔을 때 처음 발표하러 올라가서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시키고 발표를 1분만에 끝내고 나왔습니다. 나중에 제 친구들이 숨도 안 쉬고 그렇게 빨리 말하는 걸 보고 굉장히 신기했다고 하더군요.

물론 지금은 저도 익숙해졌고, 많은 노력을 하였기 때문에 예전보다는 나아졌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스스로 미흡함을 느낄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노력의 일환으로 읽은 책에 대해서 하나 말씀드리려 합니다. 

 

자그마치 2400년전에 쓰여진 책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스피치 및 웅변술의 원전입니다. 이왕이면 원전을 보는 독서습관이 있기 때문에 굳이 이 책을 골랐습니다. 저는 2016년도에 이 책을 샀기 때문에 2015년에 출판된 이 책을 구입하였지만 만약, 여러분 중 누군가가 이 책을 구입하고 싶으시다면 2017년도에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이 있으니 그 책을 구입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천병희 선생님은 국내에 몇 안 되는 희랍어 번역가로, 고대 그리스의 저서를 많이 번역하신 보배 같으신 분이시죠. 제가 직접 그 책을 보진 않았지만 천병희 선생님의 이름만으로도 믿고 구입하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례로 저도 천병희 선생님의 책을 몇 권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구입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이종오 선생님도 학식이 높고 훌륭한 분이시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에는 오탈자가 많습니다. 오탈자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읽으면서 불편한 느낌이 들 정도이기 때문에 사실 돈을 주고 산 책인데 이렇다는 사실에 불쾌하기까지 했습니다.


P. 4 옮긴이의 후기 中

『수사학』은 위의 사진과 같은 총 3가지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수사학이 필요한 담론 장르에 대해서 서술하고, 연설을 듣게 되는 대중들의 정념에 관하여 고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기 기술을 제시하며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이걸 현대식으로 분석하면 1부는 매체론이라고 할 수 있고, 2부는 인지심리학, 언론학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3부가 저희가 흔히 생각하는 말하기 방법론(말하기 스킬)에 해당됩니다.


저는 앞서서 좀 더 잘 말하기 위해서 이 책을 읽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저에게 많은 생각을 했던 것은 3부가 아니고 1부와 2부였습니다. 연설을 잘 할 수 있으려면 그에 대한 제반사항들을 전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술 방법 때문인지 이 책은 말하기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현재 살고 있는 모습이 2400년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는 그때에 비해서 발전했으며,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은 수사학에 관한 책이고, 당시 수사학이 필요한 장르 중에는 법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저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P.97 1권 행위자와 피행위자의 아비투스 中

이 부분에서 저는 마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웅변을 잘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처벌을 받지 않으면서 부당행위를 저지를 수 있으며, 재판관의 친구들은 재판관들이 그들에게 우호적이기 때문에 무죄를 선고하거나, 매우 가벼운 처벌만을 선고한다는 부분입니다. 다른 하나는 완전히 드러나는 행위들이나 모든 이들이 보는 가운데 벌어진 행위도 발각될 위험이 없다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들을 예방하기 위하여 어떠한 주의도 기울이지 않으며, 대개는 어떠한 사람도 감히 그러한 행위를 저지르리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생각은 적어도 지금 사회에서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뉴스에서 그 사실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는 2400년간 진보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속칭 높으신 분들의 잘못은 쉽사리 덮여지고, 드러나더라도 집행유예로 풀려나거나 여론이 잠잠해지면 사면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다보니 높으신 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부당행위를 저지릅니다. 오죽하면 갑질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까요?

또한, 개방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범죄들은 어떤가요? 교실 및 직장에서 일어나는 성관련 범죄들이나 최근 달리는 버스에서 벌어졌던 무차별 살인 미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그러한 범죄가 발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하지만 일어났고, 이제 우리들의 사회는 점점 살기 각박해지며 농담처럼 지옥에 비교하며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피해의 정도에 따라 위와 같은 관점에서 위범행위의 심각성을 결정한다. 그런데 그 위범 행위에 상응하는 처벌은 없으며,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그 처벌은 너무 미약하다. 이러한 위법 행위에 대한 해결책 또한 없다. 왜냐하면 그 위법 행위를 다시 복구한다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심지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법 행위는 희생자가 직접 법정에서 처벌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위법 행위는 복구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판결과 벌만이 그 해결책이 된다.
PP.109~110 1권 위법 행위에 관련된 중대성 中


범죄가 저질러지면 그 위법 행위의 결과를 복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건은 이미 저질러졌고, 피해자는 물질적이나 정신적으로 흉터로 남을 상처가 생길 수 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범죄를 저지르리라 예상되는 사람들을 사전에 격리하거나 처벌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질러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 발생 여부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을 다룬 영화로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결과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사회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은 범법자에 대한 판결과 벌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법은 어떤가요? 흔히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실 누구나 말하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법에서 말하는 처벌 규정이 너무 미약하며, 판결 역시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 법이 약해서 자꾸 범죄를 저지른다고. 그렇지만 생각을 바꾸어보면 판결과 법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야기하여 범죄를 예방하는 것보다 오히려 피해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 아닐까요? 이미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흉터는 계속해서 남을 겁니다. 여기에 합당하지 못한 판결과 법은 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행위일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이 나라의 법과 재판관들이 과연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P. 171 2권 분개 中

우리들은 어쩌면 분노(=분개. 분개라는 용어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므로 분노라는 용어로 이후 대체함)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철학자나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분노를 정의와 연관된 감정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자격도 없이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볼때 느끼는 감정이 분노이며, 이것은 정직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선량한 시민임을 포기한 사람들이 부유하기 때문에, 권력을 잡고 있거나 권력자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합당한 판결과 법이 내려지지 않아서 그들이 누려서는 안될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가 가져야 할 감정은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리스가 말하는 정당한 분노가 아닐까요?

우리는 이미 정당하지 못한 권력자를 끌어내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촛불이 되어 매주 토요일 밤마다 전국의 광장에 모여 어둠을 밝혔습니다. 촛불 하나하나는 하늘을 뒤엎었던 어둠을 모두 몰아내기에는 아주 미약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빛나고 있었음에 그 광장에 모인 정의로운 분노가 그토록 많다는 것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분노는 부도덕한 권력자를 끌어내리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분노는 지금은 비록 촛불로 밤하늘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표심이 되어 부당한 권력자에 빌붙어있던 잔당들을 절벽 끝으로 밀어버리고, 시선이 되어 부도덕한 자가 합당한 처벌을 받는 지 감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사회는 2400년간 발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정의롭지 못한 사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때보다 좀 더 정의롭지 않을까요? 우리는 정의롭지 않은 권력자에게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을 촛불로 증명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분노할 수 있다면 이 사회도 조금은 더 발전하고 정의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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