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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Jul 19. 2018

빌런 없는 슈퍼 히어로

의미론적으로 어둠이 없는 빛이란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역은 참이 아니다. 왜냐하면 밤은 자율적인 상징적 실존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지의 '낮의 체제'는 일반적으로 안티테제의 체제로서 정의된다.

(질베르 뒤랑, 진형준 역,《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2007, p.85)


빛은 어둠을 전제한다. 빛의 존재의 존재의미는 어둠을 비춤으로써 어둠을 물리치는 데 있다. 히어로 역시 마찬가지다. 히어로는 빌런을 전제로 한다. 히어로가 있기 때문에 빌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빌런이 있기 때문에 빌런을 물리칠 수 있는 히어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슈퍼 히어로는 슈퍼 빌런을 전제로 한다. 강력한 빛은 강력한 어둠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여기, 빌런이 없는 슈퍼 히어로가 있다. 

출처 : 다음 영화

사실 빌런이라는 존재는 영화 서사에 있어서 굉장히 편리한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빌런이 존재함으로 인해 주인공은 빌런을 물리친다는 목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빌런을 응징하거나 혹은 주인공이 빌런에 의해 좌절하면서 마무리된다. 그때까지의 주인공의 여정은 빌런을 쓰러뜨리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이러한 구조적 선악 이분법의 서사를 가진다. 

이러한 빌런이 없다는 것은 서사의 목표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슈퍼 히어로 영화는 특히 그렇다. 강력한 힘을 가진 주인공이 그 힘을 휘두를 당위성을 만들기 어렵고, 서사의 결말을 확정하기도 어렵다. 필자는 이 영화 외에 빌런이 존재하지 않는 히어로 영화가 단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핸콕>  출처 : 다음 영화

윌 스미스 주연의 <핸콕>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핸콕은 만인에게 손가락질 받는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목표를 가진다. 초반의 서사는 당시 굉장히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후 핸콕과 메리의 관계가 전면에 대두되면서 그때까지의 서사가 힘을 잃고 전반부와 후반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미지 개선이라는 결과로 영화를 마무리짓기가 곤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우 히어로의 이미지가 나쁜 것은 빌런이 공작을 했기 때문이고, 히어로가 고난을 이겨내고 빌런을 처치함으로써 모든 오해가 풀리고 영화가 마무리된다. 하지만 <핸콕>에는 빌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편한 방법은 사용할 수 없다. 빌런이 없다는 것은 이토록 서사를 끌고 나가기 어려운 일이다. 어떠한 완성된 형태로 결말을 짓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슈퍼밥>에서 주인공 밥이 원하는 최종적 목표를 이루는 것이 <슈퍼밥>이라는 영화의 결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밥은 무엇을 원해서 그의 슈퍼파워를 행사하는가? 결론을 말하자면 밥에게 있어 슈퍼파워란 별 의미가 없다. 밥이 슈퍼파워를 쓰는 장면은 몇 장면 나타나지 않는다. 그 몇 안 되는 장면에서도 대부분은 회상에서다. 밥에게는 슈퍼파워를 써서 쓰려뜨려야 하는 빌런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슈퍼 히어로인 밥이 원하는 것은 목표는 무엇이고, 밥의 슈퍼파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출처 : 다음 영화

밥이 꿈꾸는 것은 위의 스틸컷과 같은 것이다. 행복한 일상. 어떤 가스회사의 가스를 쓸 지 누군가 알려줬으면 좋겠고,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를 즐기고 싶다. 밥이 원하는 것은 이런 소박한 것이다. 하지만 밥은 그가 가지고 있는 슈퍼파워로 인해 이러한 일상을 누릴 수 없다. 빌런이 없는 슈퍼파워는 밥에게 있어 잉여로 존재하며, 이 잉여는 밥이 목표하는 것을 계속해서 방해한다. 슈퍼파워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헤프닝은 계속해서 밥의 일상을 침범한다. 그리고 결국 밥이 바랬던 모습조차 자신이 슈퍼 히어로이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꾸며진 것이었다면 밥이 결말을 짓기 위해서는 무엇을 찾아야하는가?

출처 : 다음 영화

행복의 파랑새는 이미 집 안에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집 밖으로 나가 파랑새를 찾고 있을 뿐이다. 밥 역시 마찬가지다. 밥의 옆에는 이미 밥이 원하는 행복한 일상이 있다. 밥에게 고용된 청소부 도리스는 이미 오랫동안 밥을 돌봐주고 있으며, 밥의 찌질함에 상처 받지 않을 정도로 지혜롭다. 또한, 밥이 그토록 궁금해하는 어떤 가스회사의 가스를 써야하면 좋을지에 대한 답을 알고 있기도 하다. 밥은 도리스와의 일상을 위해 자신의 슈퍼파워로 인해 생긴 모든 굴레를 부숴버리고 날아간다. 이것이 밥이 찾은 빌런 없이 슈퍼파워를 쓰는 슈퍼 히어로로 존재하는 방법이다.

우리의 삶도 밥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직장에서 행복을 위해, 가족을 위해 자신의 슈퍼파워를 행사한다. 하지만 얄궂게도 많은 경우 슈퍼파워를 행사하면 할수록 행복에서 멀어진다. 상사인 레베카는 끊임없이 당신을 관리하려 할 것이고, 당신은 레베카의 관리하에서만 당신의 슈퍼파워를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타국의 국방장관은 당신을 무기로 취급하며 당신을 견제할 것이다. 여기에 행복이 있을 수 없다. 행복의 파랑새는 당신의 슈퍼파워 따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행복의 파랑새 도리스는 이미 당신의 주변에, 집 안에 존재한다. 다만, 당신만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슈퍼파워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 당신이 이제까지 당신의 슈퍼파워로 만들어던 잉여들, 그 굴레를 부수는 데 당신의 슈퍼파워를 써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드디어 찾아낸 행복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의 슈퍼파워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재밌는 것은 언젠가는 당신이 찾아낸 행복한 일상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해도 당신은 그 불만마저도 사랑을 담아 입맞출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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