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는 죽었고, '가성비 귀족놀이'만 살아남은 바르셀로나의 역설
안녕하세요, 바르셀로나의 패션 비즈니스 컨설턴트 에릭입니다.
지난 글에서 '조지 클루니'를 닮은 도둑 이야기를 했더니, 주변에서 "거기 무서워서 살겠냐"라고 걱정을 해주시더군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도둑보다 더 무서운 건, 물건을 안 사주는 손님 아니겠습니까?
미국에서 22년, 여기서 3년. 산전수전 다 겪은 장사꾼의 눈으로 보니 이 도시의 소비 심리가 참 기가 막힙니다. 오늘은 Fast Fashion의 제국 스페인과 다양성의 천국 미국의 소비자들이 얼마나 극과 극인지,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지, 그 은밀한 영업 비밀을 좀 풀어볼까 합니다.
스페인은 자타공인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의 종주국입니다. 길을 걷다 보면 한 블록 건너 하나씩 Zara, Massimo Dutti, Pull&Bear, Bershka, Stradivarius, Oysho, Lefties 가 튀어나옵니다. 이 모든 브랜드의 엄마가 바로 스페인 기업 'Inditex(인디텍스)'죠. 가히 제국이라 부를 만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매장들의 '때깔'입니다. 바르셀로나의 그라시아 거리나 람블라스 거리에 있는 Zara나 Massimo Dutti 매장에 들어가 보신 적 있나요? 입구부터 으리으리합니다. 대리석 바닥은 거울처럼 반짝이고, 조명은 5성급 호텔 로비처럼 은은하며, 매장에는 고상한 향기가 감돕니다. 직원들도 모델처럼 빼입고 서 있죠. 마치 뉴욕의 Saks Fifth Avenue나 이제 없어졌지만 Barneys New York 고급 백화점 또는 명품관 같은 인상을 주죠.
그런데 그 화려한 진열대 위에 놓인 옷의 가격표를 뒤집어 보면? 티셔츠 17유로, 신발 19.99유로.
이게 바로 스페인 소비 심리의 핵심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솔직히 말해 가처분 소득이 적습니다. 월급은 쥐꼬리만 한데 집세 내고 마트 가서 장보고 나면 통장이 '텅장'이 되는 건 여기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죠. 하지만 이들의 눈높이는 저 하늘 꼭대기에 있습니다. 주머니 사정은 팍팍해도, 구질구질한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건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이들은 10유로짜리 티셔츠를 사더라도, 마치 명품관에서 샤넬 백을 사는 듯한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Inditex는 이 허영심을 아주 정확하게 간파했습니다. 매장을 궁전처럼 꾸며놓고, 고객들에게 '귀족 놀이'를 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한 거죠.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바르셀로나에서는 '진짜 럭셔리(Real Luxury)'가 생각보다 힘을 못 씁니다.
관광객들이야 명품부티크들 앞에 줄을 서지만, 현지인들은 그 비싼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욕망은 있죠.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대안이 바로 '덤다운(Dumbed Down) 시킨 럭셔리', 즉 패스트 패션입니다.
Zara의 옷들을 자세히 뜯어보세요. 파리나 밀라노 런웨이에서 본 듯한 디자인인데, 소재는 저렴하게 바꾸고 핏은 대중적으로 풀었습니다. '무난하게 럭셔리한 척' 할 수 있는 옷들. 튀지 않는 베이지, 네이비, 블랙 컬러에 포인트 한 스푼. 스페인 사람들은 이 안전한 선택지에 열광합니다.
미국처럼 "내가 입으면 그게 곧 패션이지!" 하는 자신감이 여기엔 없습니다. 남들 입는 만큼은 입어야 하고, 튀면 안 되는데, 없어 보이는 건 싫고... 이 복잡하고 소심한 심리를 Inditex가 완벽하게 장악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는 브랜드의 무덤입니다. 나이키, 아디다스, 그리고 인디텍스 계열사가 아니면, 어설픈 중저가 브랜드는 명함도 못 내미는 '하향 평준화된 시장'이 되어버렸죠.
반면, 제가 살던 천조국 미국은 '다양성의 정글'입니다.
미국 소비자들은 "Let's check it out!(어디 한번 볼까?)" 하는 태도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브루클린의 다 쓰러져가는 창고라도, 주인이 힙하고 물건에 '스토리'가 있다면 그곳은 성지가 됩니다. "이 신발은 1980년대 스케이트보더들이 신던 건데..." 이런 스토리텔링 하나면, 인테리어가 개판이어도 지갑을 엽니다.
그들은 Hidden Gem(숨겨진 보석)을 찾는 걸 즐깁니다. 누군가는 나이키를 신지만, 누군가는 듣도 보도 못한 인디 브랜드의 스니커즈를 신고 "This is sick!(이거 쩔지?)"이라며 자랑합니다. 취향이 세분화되어 있고, 희소성의 가치를 중시하며, 각 취향마다 팬덤이 형성됩니다. 그 와중 On Running, Hoka 같은 신생 브랜드들이 쑥쑥 자라나 거대한 마켓을 형성합니다. 미국 시장이 파워풀한 이유는 바로 이 '존중받는 다양성'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업하는 입장에서 미국은 피곤한 시장이기도 합니다. 100명의 손님이 있으면 100가지 취향을 맞춰줘야 하거든요. 트렌드는 초단위로 바뀌고, 마케팅 포인트 잡기도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자, 여기서 비즈니스의 기회가 보입니다. 미국이 '다양해서 어려운 시장'이라면, 스페인은 '단순해서 공략하기 쉬운 시장'입니다.
스페인 고객들을 공략하는 공식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공간(Space): 무조건 번듯해야 합니다. 제품보다 인테리어에 투자해야 합니다. 구멍가게 느낌 나면 끝입니다.
제품(Product): 너무 튀면 안 됩니다. '무난한데 살짝 있어 보이는' 디자인. 즉, 럭셔리의 맛만 살짝 보여주는 '안전한' 제품이어야 합니다.
가격(Price): 부담 없어야 합니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특히 이곳 바르셀로나는요.
이들은 양 떼(Herd)와 같습니다. Inditex라는 거대한 양치기가 몰고 가는 방향으로 우르르 따라갑니다. 다양성이 없다는 건, 역으로 말하면 '대세'만 만들어내면 시장 전체를 먹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미국처럼 100가지 니치를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이들의 소심한 허영심을 채워줄 근사한 무대(매장)를 만들어주고, 그들이 안심하고 지갑을 열 수 있는 적당한 가격표만 붙여주면 됩니다.
저는 바르셀로나에서 이 틈새를 봅니다. 미국의 다양성은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예측 가능하고 단순한 어프로치가 통하는 곳. 거대 공룡 Inditex가 닦아놓은 길목에서, 그들이 놓치고 있는 '한 끗'을 채워주는 것. 그것이 제가 이 Inditex의 제국에서 살아남는, 아니 승리하는 비법입니다.
[Eric Cha]
현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개미'들의 지갑을 연구하는 비지니스 컨설턴트이자 Cross-Border Consumer Brand Strateg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