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모순 1화 - 혁신과 디지털: 너네 그동안 뭐 했니?
안녕하세요, 바르셀로나에서 낭만 대신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경험해 내고 있는 에릭입니다.
바르셀로나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열정, 태양, 그리고 가우디. 100년 전 천재가 남긴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곡선들은 지금 봐도 세련됐습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첨탑을 보고 있으면 "이게 진정한 예술이지"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죠.
하지만 저 같은 비즈니스맨의 시각으로 이 도시를 3년째 뜯어보니, 가우디는 이 나라에 축복인 동시에 지독한 ‘저주’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대에서 너무 좋은 것들을 물려주고 가니, 오히려 후대에서 열심히 살 총력을 잃고 물려받은 문화유산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거죠. 100년 전 유산이라는 마약에 취해, 이 나라는 성장을 멈춰버렸거든요.
오늘은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찬란한 건축물 뒤에 가려진, 스페인의 민낯에 대해서 말이죠.
뉴욕의 지하철이나 거리를 걷다 보면 소름 돋는 에너지를 만납니다. 당장 내일 브로드웨이에 서도 무방할 법한 괴물 같은 실력자들이 길바닥에서 인생을 노래하고 연주하죠. 한국은 또 어떻습니까? 전 세계가 K-Pop에 열광하고,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인류의 보편적 감성을 리드하는 시대입니다. K-뷰티도 세계의 미의 기준을 새로 쓰고 있고 세계인이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술의 성지'라는 이곳 바르셀로나는 어떤가요? 거리 공연을 보고 있으면 보고 듣는 제가 다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수준 이하의 연주, 박자도 못 맞추는 노래, '예술가 코스프레'는 충만한데 정작 알맹이는 처참합니다. 그나마 "와, 좀 한다" 싶어서 가보면 십중팔구 남미 출신이거나 다른 영어권 국가에서 온 외지인입니다.
여담입니다만, 까뽑 (K-Pop의 스페인식 발음) 커버댄스 하는 사람들의 버스킹을 보면 더 가관입니다. 걸그룹 코스프레를 했으나 배꼽티 밑으로 흘러나온 흡사 녹아내린 치즈를 연상케 하는 뱃살들.. 박자를 간신히 맞춰가며 춤을 추지만 치명적인 척하는 도발적인 표정.. 언제 엔딩요정을 배웠는지 일부러 섹시한 표정을 지으며 헉헉거리는 부자연스러움.. 그걸 틱톡에 올리려는 눈물겨운 카메라워크.. 한국인인척 그들을 관리하는 중국인 매니저청년.. 왜 수치심은 제 몫인가요?
이렇듯 자국민들의 문화적 독창성은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미국의 주류 팝이나 랩을 동경하며 듣고, 카페나 상점에선 24시간 미국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아니면 남미 음악인 레게톤 같은 장르의 음악이 그들의 젊은 문화를 지배하고 있죠. K-Pop도 자리매김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정작 스페인 음악이라고 하면, 라디오에 나오는 나이 지긋한 분들이나 들을 법한 노래뿐, 3년을 살고 있는 저조차 흥얼거릴 수 있는 현지 히트곡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 정도면 '문화 후진국'을 넘어 '문화적 실어증' 상태 아닙니까?
세상은 지금 달에 로켓을 쏘아 올리고, 그 로켓이 스스로 수직 착륙해서 다시 파킹까지 하는 AI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 디지털 패권을 쥐고 모든 산업을 집어삼키고 있죠. 한국은 어떤가요? 반도체나 디지털 혁신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럽습니다. 국뽕 조금 더해서 세계최고 수준이죠. 검색엔진은 구글에 맞서는 네이버가 있고 (다음도 그다음으로 있음), 유통의 판을 바꾼 여러 온라인 상거래 플랫폼이 있으며, 전 국민이 카카오톡이라는 자체 플랫폼 위에서 삽니다. 자동차 및 전자제품도 전 세계적으로 팔려 나가며 전 세계 마켓을 장악 중에 있습니다.
스페인은요? 냉정하게 물어봅시다. 스페인이 만든 자국의 검색엔진이 있습니까? 메신저는 미국 메타(Meta)의 WhatsApp에 종속됐고, 스마트폰은커녕 노트북 브랜드 또는 전자제품 브랜드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습니다. 길거리를 누비는 스페인 브랜드 세아트(Seat)나 쿠프라(Cupra) 자동차요? 독일 폭스바겐 계열입니다. 껍데기만 스페인일 뿐, 기술의 심장은 독일산입니다.
심지어 Public Sector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르셀로나를 누비는 첨단 전기버스조차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입니다. 의료, 제약, 항공, 우주과학... 어느 분야에서도 스페인이 주도하는 혁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뒤늦게 헉헉거리며 따라가기 바쁩니다. 디지털 세계에서 스페인은 그저 '외산 브랜드의 전시장'일 뿐입니다. 한때 남미를 집어삼키고 세계를 호령하던 스페인 맞나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런 '혁신의 부재'가 비즈니스 관점에선 기막힌 기회가 된다는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스페인은 지금 지독한 '문화적 식민지' 상태입니다. 미국과 한국, 일본의 잘 나가는 것들에 대한 동경이 하늘을 찌릅니다. 스스로 창조할 능력은 없는데, 남의 쿨한 건 갖고 싶은 거죠.
그래서 이곳에선 '스리슬쩍 베끼기'가 최고의 비즈니스 전략이 됩니다. 예를 들어 보죠. 미국의 샐러드 브랜드 '스윗그린(SweetGreen)'이 뜨자, 스페인엔 '어니스트 그린(Honest Greens)'이 나타났습니다. 이름과 로고의 typography, 그리고 메뉴 구성까지 비슷하지만, 스페인 현지인들은 열광합니다. 물론 인테리어에 힘을 많이 주는 스페인의 honest greens 매장이 압도적으로 더 멋있긴 합니다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비즈니스의 identity를 베꼈다는 강한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쉐이크쉑(Shake Shack)'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TGB(The Good Burger)'는 어떤가요? 초록색과 검은색의 로고를 이용한 상호부터 은색 쟁반의 플레이팅, ruffle 스타일의 french fries와 나무 막대포크, 특유의 소스맛과 버거의 맛까지 아류작의 냄새가 진동하지만, 로열티 한 푼 안 내고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바르셀로나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굳이 세상을 뒤흔들 혁신을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 빠르거나 기가 막힌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아직도 수동 스틱 자동차가 70% 이상으로 주를 이루는 이 스페인 시장에서 혁신을 이루기는 너무 힘든 일이거든요. 혁신을 바라고 그걸 이뤄낼 의지가 있는 곳에서 혁신을 외쳐야 맞는 거죠.
이곳 바르셀로나의 마켓에서는, 일단 미국이나 한국에서 혁신을 이뤘고 이미 어느 정도 대중화시킨 잘 나가고 있는 컨셉을 가져와 적절히 현지 입맛에 맞추면, 로열티 없는 무임승차가 가능합니다. 문화적 자존심보다는 '있어 보이는 아류'가 더 잘 먹히는 역설적인 시장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의 힙한 거리에서 유행하는 것, 한국의 스마트한 시스템 중에서 하나를 골라 스페인식으로 살짝 '덤다운(Dumb down)' 시키면 반은 먹고 들어갑니다. 윤리는 뒷전이고 겉만 번지르르하게 포장하면 끝입니다. 남의 비즈니스 모델을 그대로 베껴다가 로열티 한 푼 안 내고 "우리의 혁신이다"라고 우겨도 아무도 제재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스윗그린'을 베낀 '어니스트 그린', '쉐이크쉑'을 복제한 'TGB'가 대성공을 거두는 현상을 보십시오. "그게 뭐 대수야?"라고 넘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 '무임승차'의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비즈니스 컨설턴트인 저는 이들을 계몽하거나 고치려 들지 않습니다. 뭐가 바뀌는데요? 그건 시간 낭비입니다. 대신 저는 그들과 같은 '셸터(Shelter)' 안으로 들어가, 이 모순적인 생태계를 누구보다 빠르게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사람들을 계몽시키지 않습니다. 대신 미국과 한국의 선진화된 문물을 들고 와서, '어떤 타이밍에 어디에 적재적소로 배치할지'만을 고민합니다. 혁신이 거세된 이 땅에 미국의 쿨함을 이식하고, 한국식 효율을 슬쩍 끼워 넣는 것. 인지조차 못 하는 그들의 모순을 지렛대로 활용해 가장 영악하고 효율적인 비즈니스 레인을 설계하는 것.
저는 그것을 위해 훈련된 사람이고, 오늘도 이 '박제된 박물관'의 틈새를 날카롭게 엿보고 있습니다. 선조의 유산 뒤에 숨어 아류작에 열광하는 이 시장이야말로, 전략적인 기획자에게는 가장 확실한 노다지니 까요.
[Eric Cha]
바르셀로나에서 '문화적 빈틈'을 설계하는 비지니스 컨설턴트이자 Cross-Border Consumer Brand Strateg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