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콜센터: 혁신 빠진
말로만 혁신타운 포블레노우

스페인의 모순 3화: 바르셀로나의 Publenou가 혁신의 허브가 됐어?

안녕하세요, 바르셀로나에서 낭만 대신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읽는 에릭입니다. 스페인의 모순 시리즈 중에서 마지막 3탄을 바로 소개해 드립니다.

Teste-8.png 중심부★에서 살짝 떨어진 재개발 지구 Poblenou

바르셀로나는 자칭 스페인의 혁신 허브를 자처합니다. 특히나 바르셀로나 중심에서 우측으로 살짝 벗어난 포블레노우(Poblenou: 주황색 표시된 지역) 지구가 그 혁신의 중심으로 발돋움 중입니다. 옛날에는 공장이나 창고 지대였던 지역을 이제 아티스트 들이나 신생 회사들이 공간을 재 창조 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포블레노우를 보고 바르셀로나의 성수동이라 칭하더군요. 창고 개조하면 다 성수동인가?

Poblenou-Contrasts.jpg 포블레노우: 신구(新舊)의 공생

포블레노우의 랜드마크는 단연 Torre Glòries입니다. 마치 성난 뿔같이 우뚝 솟은 게 참 신선합니다. 그 앞으로는 혁신을 자처하면서 새로운 건물들이 있는 지역이 있습니다. 통유리로 번쩍이는 미래형 오피스 빌딩들이 '22@ 혁신 지구'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줄지어 서 있거든요. 겉만 보면 실리콘밸리 뺨칩니다.


그러나 그곳의 거리를 걷다 보면 참 묘한 기분이 듭니다. 그 유리창 안의 실상을 알게 된 제 소감은 이랬습니다. “뭐가 안 맞네. 어딜 보고 혁신이지?”

Screen Shot 2026-03-10 at 6.33.04 PM.png Torre Glòries: 고층 사무실 건물이며 포블레노우의 랜드마크

건물만 신식인 게 혁신이 아닙니다. 알맹이 없는 전시행정의 결과물, 그러니까 우리 식대로 말하자면 '이명박식 토목 발상'이 낳은 거대한 유리통 일 뿐이거든요.


1. 사회주의 잔재가 지어 올린 ‘짝퉁’ 실리콘밸리

왜 이런 어이없는 짝퉁 허브가 탄생했을까요? 로직은 간단합니다. 과거 스페인의 사회주의 습성이 뼛속까지 박힌 공무원들이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할 줄 아는 건 건설뿐"이라서 벌어진 일입니다. 지어야 하니까 일단 짓고, 대외적으로 '혁신'이라는 라벨을 마빡에 붙여놓은 거죠. 그러나 아시다시피 혁신은 hardware 즉 건물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니죠.

Untitled design (7).jpg 바르셀로나의 다른 지역과 상반되는 Poblenou의 통유리 건물들

혁신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각 가능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긴 할까요? 아뇨,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만의 헤븐에 살고 있거든요. 여기서 또 한 번 사회주의 잔재가 묻어 나옵니다. 웬만한 사고 쳐도 안 잘리는 고용 보장, 꼬박꼬박 챙기는 두 시간의 점심, 그리고 일 년 중 가장 성스러운 의식인 ‘8월 한 달간의 바캉스’. 이 느슨함 속에 혁신이 들어올 틈이 있을까요? 혁신의 필요성을 모르는 자들이 혁신을 외치며 세운 혁신 허브라니, 이보다 지독한 역설이 어디 있겠습니까.


2. “깨어있는 척”의 극치, 혁신 코스프레

스페인의 젊은 사람들은 참 깨어있는 척을 잘합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시위도 많이 하고요, 팔레스타인을 위해 과격 시위도 서슴지 않습니다. 관광객들 다 집에 가라고도 시위하고요. 깨인 의식으로 친환경 에너지를 찬양하지만 그 친환경 에너지로 공해산업인 fast fashion의 선구자 Inditex를 지탱해 줍니다. (이전 글 역설 2탄 참조) 그러면서 미국의 혁신 사례를 어설프게 베끼며 깨어있는 지성인 양 “우리도 테크 허브로 도약한다!”라고 외치죠. 하지만 혁신은 복제되는 게 아니라 머리가 깨인 지성들이 뜻을 모아야 가능한 겁니다.


미국은 실리콘밸리나 뉴욕의 월가는 전 세계의 좀 하는(?) 사람들이 고액 연봉을 받으며 모여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조금 냉혹하죠. 레이오프가 문화고 삶은 전쟁입니다. 그래서인지 구인과 구직이 굉장히 활성화 돼 있습니다. 치열하게 자본주의의 꼭대기에서 경쟁하지만 잘 못하면 바로 다음날 또는 같은 주 금요일에 짤리고, 반대로 성과를 내면 확실한 보상이 따릅니다. 한국은 또 어떻습니까? 영어유치원부터 평생을 경쟁에 절어 살지만, 그렇기에 한국인의 눈빛은 번뜩이고 머리는 기가 막히게 영리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외국살이 하면서 한국인의 빠릿빠릿함과 영리함은 세계적 top수준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말합니다. “치열해 본 자만이 그날의 노을을 보며 차가운 맥주를 즐길 자격이 있다.” 온종일 세상과 싸우고 혁신을 고민하다 퇴근길에 마시는 차가운 맥주 한 잔, 그게 진짜 노동의 대가죠. 그런데 종일 ‘mañana (마냐나: 스페인어로 내일이라는 뜻)’를 외치며 뭉그적뭉그적 시간을 때운 자들이 퇴근 후 마시는 맥주에 무슨 감동이 있을까요? 그들에게 최근 후 맥주는 치열한 하루의 보상이 아니라, 그저 떠들다가 목이 마를 때 마시는 보리음료일 뿐입니다. 형태는 같으나 의미는 다르죠.

barcelona-poblenou-rambla-1.jpg Rambla del Poblenou

3. 거대한 콜센터로 전락한 도시

혁신할 의지도, 인재도 없는 이 도시는 결국 외산 브랜드의 전시장, 즉 '거대한 콜센터'가 되었습니다. 가짜 테크 허브에 입주할 진짜 기업이 부족하니, 그 공실을 외국계 기업 보조 회사들이 메꿉니다. 외국기업의 콜센터 같은 회사들이 말이죠. 예를 들어 틱톡도 여기에 입주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부서는 아니고 스페인 관리부서 정도이죠. 미국과 한국이 AI로 세상을 뒤엎을 때, 이곳의 혁신 타운은 글로벌 대기업의 단순 운영팀이나 하청 콜센터를 유치하며 "우린 테크 허브다!" 라며 자위합니다.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깨어있는 소수의 인재가 혼자 열심히 해보려 한들, 이 사회주의적 타성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 허접한 혁신의 그릇이 그들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결국 독창성은 실종되고, 미국의 쿨함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디지털 식민지’로 전락하는 겁니다. 혁신은 차가운 건물의 통유리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인재들의 피가 얼마나 뜨거운가의 문제거든요.


결론: 콜센터의 도시에서 무엇을 팔 것인가

저는 이 가관인 역설을 보며 비즈니스의 당위성을 찾습니다. 혁신이 거세된 땅에서 미국의 쿨함만 복제하려는 이들에게 저는 ‘진짜 혁신’을 팔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느슨함을 지렛대 삼아,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결핍을 미국식 브랜딩과 영어 상호+ 한국식 시스템으로 채워줍니다.


치열하게 살지 않는 자들에게 혁신은 사치입니다. 저는 그런 속 빈 강정들의 외모에 맛있고 화려한 부스러기를 묻혀주는 전략가입니다. 이 거대한 콜센터의 도시에서, 저는 오늘도 가장 영악하고 신랄한 비즈니스 레인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어때요, 이제 포블레노우에 위치한 Glòries 타워의 화려한 색의 유리창이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나요?


[Eric Cha]

바르셀로나에서 '속 빈 강정'을 미국식으로 맛있게 버무리는 비즈니스 컨설턴트이자 Cross-Border Consumer Brand Strateg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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