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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휴직하겠습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20대 중반, 군대를 다녀왔다. 그다음 해 직장을 구해, 약 11년을 다녔다. 개인적으로 서른에 결혼을 했고, 아이 둘의 아빠가 됐다. 아이 둘이라니, 상상해 본 적 없다. 상상해 보지 않은 것 중의 하나가 나이. 마흔 살을 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마흔이지만 아직 혹(惑)함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때로 많이 마셔서, 도로 입으로 나와 버리는 알코올이 혹함일까. 알코올에 가득 취한 밤은 어떤 이야기를 한 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리 술을 마시지 않으면 불혹(不惑) 일지 모른다.
나이 8살 된 아이가 던지는, ‘아빠는 못 생겼잖아’라는 말에 발끈하지 않는다면 불혹(不惑)이려나. 지율이가 던지는 의미 없는 말에 상처 받고, 아빠가 존중받지 못한다 생각한다. 아내가 반찬을 준비할 때, 내 입맛보다 아이 입맛에 맞추는 것이 서운하다. 내게 불혹(不惑)은 먼 단어이다.
2019년 한국에서 마흔은, 가정에서는 어린아이(초등학교 저학년 이거나 유치원생일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아빠이고, 회사에서는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과장 정도의 연배가 아닐까. 부모님은 은퇴를 하신 후, 귀농을 하셨거나 집 인근에서 아이들을 봐주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2~30대처럼 술로, 유흥으로, 밤을 새우는 게 가능하지 않아 진다. 운동을 조금만 강하게 해도 다음 날, 몸이 무겁다.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온다. 건강검진을 할 때, 대장내시경을 포함해서 받아야 하는 나이.
한국에서 초등학교 2학년 이하의 자녀를 키우고 있다면, 육아휴직을 1년씩 2회 쓸 수 있다. 총 2년 동안 육아휴직이 가능하다.
첫째 아이를 얻은 순간부터, 육아휴직이라는 단어가 강렬히 끌렸다. 그러나 회사에 말하지 못했고, 실제로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둘째가 태어났고, 육아휴직은 더욱 간절해졌으나 마음속에 담아둔 단어였다.
남자가 육아휴직을 쓴 예가 내가 다니는 회사에는 없었다. 육아휴직을 1년이나 2년을 사용한 후, 회사에서의 내 자리가 어디에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지금껏 쌓아온 인간관계가 단절된다는 느낌이 상상이긴 했으나 불안함으로 다가왔다.
집을 구매하면서 은행에 대출을 받았다. 그리하여 즐거운 우리 집은 안방과 화장실 정도만 가족 소유고, 나머지는 은행의 것이다. 매달 은행에 적지 않은 금액의 월세를 내면서 살고 있다.
48개월 할부로 차를 구매했다. 차는 탈수록 가격이 내려가겠지만 매달 내야 하는 할부 금액의 액수는 같았다. 아이들은 미술, 음악, 체육 학원 등에 다니고 있다. 가정학습지와 방과 후 학교에도 참여한다.
육아휴직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돈’이 가장 컸다. 매달 25일이 되면, 월급 통장으로 일정 금액의 돈이 들어온다. 지난 한 달간 사용한, 신용카드 회사들이 돈을 가져가고, 은행에서 대출 이자를 가져가고, 자동차 할부 값이 나간다. 아파트 관리비가 나가고, 보험비가 빠져나간다.
어느 순간 은행 잔고는 0을 넘어서서 마이너스로 수렴한다. 그러니 육아휴직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매달 들어오는 돈이 이전보다 확연히 줄어들 때를 상상할 수 없었다. 마흔의 나는 중ㆍ고등학교 때처럼 한 달 용돈 5만 원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회사 생활에 슬럼프가 왔다. 처음 입사했을 때 가슴 떨림을 느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한국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첫 발을 내딛으며 한 명의 사회인으로, 사회생활을 한다는 기쁨이 있었다.
첫 월급을 받으며 촌스럽게 부모님께 사드린 빨간 내복이 떠오른다. 초창기 늦게까지 퇴근하지 않고, 회사와 물아일체가 된 것처럼 회사의 업적만으로 기쁠 때가 있었다. 늘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는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실수 없이, 깔끔하게 회사 생활을 해 내고 있다 믿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굳이 퇴근을 늦게 하지 않게 되었다. 회사의 이익과 나의 이익이 구분되었다. 회사 동료 모두가 가족인 것처럼, 모두와 잘 지내고 싶던 처음의 마음이 사라졌다. 회사 동료는 가족도 될 수 없고, 친구도 될 수 없다고 믿는다.
회사를 입사하던 마음과 10년 후의 마음이 무척 달라서 답답했다. 내가 문제인 건지, 회사가 문제인 건지, 내가 변한 건지, 회사가 변한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모두와 친해질 거라 믿었는데, 친한 동료가 있고, 소원한 동료가 있다.
초창기에는 회사원의 모든 경조사를 챙겨 다녔는데, 최근에는 친함의 정도, 회사 업무의 연관성 등을 따지며 경조사에 가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회사 다니는 게 즐겁지 않다. 처음과 다르게 시계의 톱니바퀴이고 싶지 않다.
육아휴직을 한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 하루의 전(全) 시간을 함께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육아휴직이 아이들과 놀아주기 위해서라고, 순수한 의도만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담 육아를 해보지 않았으니, 얼마나 힘이 들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육아를 전담할 일이 남아있고, 해 보아야 한다. 한국 남자들의 특성인 건지, 나만의 특성인지 모르겠으나 마흔을 살아오며 주어진 일만 하고 살았다.
중ㆍ고등학교를 가야 했고, 공부를 해야 했다. 왜 가야 하는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고 모두들 말했기에,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공부를 했다.
대학을 갔고, 군대를 갔다. 결혼 역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결혼을 하고 나니, 아이 역시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고민이나 선택을 해 보지 않은 느낌. 아이들 육아만큼은 주어진 것이라서 아니라, 선택해서 하고 싶다. 모든 상황이 이미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마음만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하고 싶다. 온전히 아이들과의 시간이 비로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