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를 읽어야 하는 이유와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며
아랍의 봄, 리비아와 시리아 내전, 그리고 IS의 등장 등으로 촉발된 시리아 난민문제는 아일란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국가들의 정책들이 제한적으로나마 바뀌는 양상을 보여줬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아일란의 죽음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들, 아니 아일란과 같은 소년들은 수없이 죽어갔다는 것이다. 이들이 수없이 핏값을 지불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일란의 죽음을 사진으로 목격하고 나서야 유럽이라는 태엽이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물론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자각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자신의 심상을 움직이지 않는 이상 행동하지 않는다는 개체라는 점에서 그럴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여하튼, ‘사진은 권력이다.’라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라는 생각도 든다. 보도 사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환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그넘이나 퓰리쳐상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다시 들었고.
두 가지 질문이 남는다.‘왜 아일란의 죽음이 있고 나서야 유럽의 국가들은 움직였는가’라는 질문과 ‘난민 문제는 해결가능한가’라는 질문이다. 후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문제는 전자의 질문이다. 그동안 누적되어온 여러 사건(유로터널에서의 난민 사망, 교황 성하의 촉구, 지속적인 난민과 이주노동을 하려던 사람들의 난파) 등이 아일란의 죽음이라는 사진이 트리거가 되어 움직이게 되었다는 설명이 존재할 수 있고, 혹은 아일란의 죽음 자체가 유럽의 각 국가의 난민정책을 바꿀 만큼의 파급효과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두 가지 모두 가능한 설명이지만, 두 설명 모두 생각을 하더라도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환원론밖에 남지 않는다.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유아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며, 있어서는 안 되는 죽음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를 움직이는 어떠한 힘이 될 수 있는가까지 연장하기는 간단하지 않다. 국가는 단순히 사람들로 이뤄진 공동체로만 설명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주와 난민은 국가만의 특징 중의 하나인 주권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지기에 개인의 감정을 자극했다는 이유 하나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기억의 문제를 국제관계에서 설명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마주친 상황들 중에서 이런 경우가 적지 않았다. 쉬운 수수께끼가 아니라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고 고민의 날을 보낸 날도 적지 않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보면서 상징권력, 상징폭력, 상징투쟁에 대해서 다루는 부르디외를 좀 자세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일란의 안타까운 죽음을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면, 종군 위안부를 하나의 한일관계에서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면, 이런 생각이 들자 결국 부르디외를 진지하게 다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일란의 죽음이 유럽 국가들의 난민 정책을 제한적이나마 바꿔놓았다면, 아일란의 죽음이 나에게는 조금 다른 방향의 공부의 확장성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질문과 수수께끼의 해결에 필요하다면 무슨 책인들 못 읽겠는가?
한 가지 덧붙여 힘주어 말하자면, 우린 모두 인간이라는 동질성을 가진다. 비록 성별, 인종, 종교, 지역, 언어 등등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이질성은 인간이라는 동질성 앞에서는 작은 부분이라 생각한다. 난민 문제에 붙여진 아일란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인가 다시 물어본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고 자극하기 전에도 인간은 인간의 존엄이무엇인지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개체라고 생각해 본다. 물론, 그러기는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