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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루가 Mar 31. 2016

#9. 우리들만의 상영회

파슈파티나트 화장터 아이들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




이제 네팔에서 머물게 될 시간이 이틀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무엇이 나를 이곳에 홀로 다시 오게 만들었을까?

왜 세 명의 아이는 한 순간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가시처럼 박혀있었을까? 

왜 그렇게 그리웠을까? 

그 마음을 가두어 두기 힘들었을까?

오랜 시간을 고민한 후 다시 오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두 가지를 다짐했다. 

첫 번째는 아이들을 현재를 기록하는 것. 혹여 아이들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주변 사람들한테라도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던 이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고 오랜 친구처럼 말없이 함께 하고 싶었다.  어쩌면  동시에 오래도록 싸매고 있던 내 마음의 짐을 눈앞에 풀어놓고 제대로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는 그 흔한 휴대폰 하나 개통하기 힘들기에 자신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 다큐를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던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에게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카트만두에서 열렸던 작은 규모의 다큐 영화제에서 ‘신의 아이들’이 상영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초대받은 데이빗이 극장에 갔을 때도 영화의 끝부분만을 보았을 뿐이라고 했다. 결국 다큐에 나온 등장인물 중 누구도 제대로 된 공간에서 제대로 영화를 관람한 이가 없었다. 

간혹 영화를 본 사람들이 사원에서 자신들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기도 하고 영국의 어떤 후원 가는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꽤 큰 금액을 네팔 현지 NGO에 보내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NGO 측에서는 아이들의 인터뷰와 사진을 찍은 자료는 후원가에게 보내고 후원가가 아이들에게 보내온 돈은 중간에서 가로채 버렸다고 했다. 글도 잘 모르는 힘없는 아이들로서는 어디 가서 따져 묻거나 도움을 구하기도 어려운 처지라 기대감으로 부풀었던 가슴에 상처만 깊어져 버렸다. 

나는 다큐에 등장하는, 파슈파티나트를 근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게 가능하다면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사원에서 밤에 사원 한쪽 벽면을 스크린 삼아 빔 프로젝트를 쏘아 영화를 상영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사원 측의 허가가  나지 않는다면 작은 상영관이라도 대여해서 출연한 모든 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네팔 공무원들의 관료주의와 부패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였다. 


(엘레스가 월세로 살고 있는 동네 초입의 판자집들)


파슈 사원에서 영화를 상영하려면 사원을 관리하는 사무소에 가서 담당자에게 허가를 받아야 해서 문의를 하니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오라고 했다. 

다음날 부지런히 서둘러 10시 이전에 도착했지만 담당자는커녕 사무실 문도 잠겨있었다.  

지나가는 사무소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조금 기다리면 올 거라던 담당자가 나타난 시간은 오후 세시를 넘어서였다. 

반나절을 기다려 만난 담당 공무원에게 파슈에서 다큐를 상영해서 아이들 뿐 아니라 영화에 나온 마을 사람들 모두 관람하게 하고 싶다고 하니 일단 다큐를 보자고 했다. 그래서 짧게 영상을 보여 주니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귓속말로 속삭이며 의논을 시작했다. 그러더니 노트에 볼펜으로 30000이라고 숫자를 적는 것이었다. 이게 뭔가 싶어 휘둥그레져 중간에서 통역을 도와주던 덜 구릉을 바라보니 

"3만 루피 달라는 데오..."하는 것이다.

3만 루피면 우리 돈 33만 원 정도이고 데이빗의 한 달 월급보다 세배를 훌쩍 넘는 어마어마하게 큰 액수였다. 즉, 자신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공돈을 챙기겠다는 심사였다. 

사무소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네팔 현지인들 앞에서 대놓고 비리를 저지르기는 창피했는지 소리 없이 노트에 30000이라고 쓰고 확인 사살하듯 숫자 아래 줄 두 개를 좍좍 긋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을 촬영할 때마다 하루에 2000루피씩 입장료 외에 촬영료도 자기들에게 내라는 얼토당토 한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너무 황당하고 불쾌해서 ‘됐다!’하고는 종일 기다린 사무소에서 나와 버렸다.  현지 통역과 진행을 맡아준 덜 구릉은 나에게 한국말로 이렇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네팔이 원래 그래요... 돈이면 안 되는 것도 되게, 되는 것도 안 되게 만들 수 있어요. 여기서 상영하는 건 그냥 포기하세요...”


아쉬움보다는 분노와 막막함에 사로잡힌 채 숙소로 돌아와 깊은 고민에 잠겨 들었다. 어쩌면 너무 막연히 머릿속으로 동화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네팔은 오랜 왕정을 무너뜨리고 2008년 민주화가 시작되는데, 이후 신자유주의 정치세력, 공산주의자, 모택동주의자들까지 분리되어 헌법 제정에 합의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헌법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니 정치적으로 불안정함은 말할 것 도 없이 관료주의와 부정부패가 만연한 상황이다. 국민 대부분이 저소득층인 네팔에서 결국 정치적으로 가장 소외되는 이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분노와 무기력 밖에 없는 듯 보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버스나 택시 번다(파업), 정치 세력 간의 시위로 거리는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런 네팔이 작년 4월에 일어난 지진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되었으니 어찌하여 이토록 힘없는 곳에 더한 시련에 들게 하시는지...? 비극은 언제나 약자에게 더 쉽게 일어나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그러니 이 나라 국민도 아닌 타국의 미스에게 이런 황당한 거래를 대놓고 요구하고도 ‘싫음 말고’식의 뻔뻔함으로 일관할 수 있었던 공무원들의 태도에는 정치적 배경 또한 한몫했을 터였다. 

이제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려면 어찌해야 좋을까? 고민하다가 뿌자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마음씨 좋아 보이던 교감선생님이 떠올랐다. 

통역을 맡아준 덜 구릉과 이야기를 나눈 후 교감선생님께 혹시 학교 강당에서 영화를 상영할 수 있을지 전화로 부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도 흔쾌히 거짓말 같은 ok사인을 받아 낼 수 있었다. 

마침 뿌자네 학교에서는 수요일마다 강당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재학 중인 학생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다큐이니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함께 관람했으면 싶다고 했다.

너무 쉽게 일사천리로 일이 해결되었지만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뿌자가 어린 시절의 자신이 나오는 영화로 인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고민 끝에 다음날 다시 전화로 정중히 영화에 출연한 아이들만 영화를 보았으면 싶다고 부탁드리자 그럼 학생들을 제외하고 교장, 교감선생님과 함께 관람하자는 답변을 해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한쪽에서 맞은 뺨을 기대하지 못했던 곳에서 어루만져주는 누군가의 손길로 다시 어려운 한 고비를 넘어서게 되었다.



다큐의 중심인물인 삼 남매와 파슈에서 큰 형 노릇을 하며 아이들을 지켜주던 라스쿠마르, 그리고 엘레스의 친구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말썽꾸러기 짤레를 데리고 뿌자네 학교로 향했다. 

아이들은 오랜만의 파슈 사원 밖으로의 여정이 소풍 같은지 서로 장난을 치며 신이나 보였다. 

그러나 막상 학교에 도착해 보니 뿌자는 교실에 없고 양호실 침대에서 우릴 맞아 주었다. 감기로 열이 높아 수업에 참석하지 못하고 쉬고 있었던 거다. 그래도 며칠 전에 했던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지켜서 그런지 통역 없이도 우리는 엉터리 영어와 손짓 발짓, 괴성을 섞어가며 신나게 노래도 부르고 사진도 찍으며 놀았다. 뿌자는 학교에서 보았다는 공포영화 이야기를 아주 리얼한 표정연기로 재현해서 나를 미친 듯이 웃게 만들었다. 






수업 시간이 끝나고 강당이 비는 시간을 기다리자 산 정상에 위치한 학교의 내부는 어느덧 붉은 노을로 충만해지고 있었다. 

넓은 강당을 물들이는 오후의 기우는 빛과 그림자가 영화를 기다리는 다섯 명의 아이들과 교장 교감선생님, 그리고 우리들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의 고요한 기다림만으로도 이 여정은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몇 차례 화면과 사운드 테스트를 마치고 영화가 상영되었다. 

아이들은 숨소리까지 아껴가며 영화에 완전히 빠져 들어갔다.  

아주 먼 과거처럼 아득해져 버린 자신들의 어린 얼굴과 몸짓을 바라보며 같은 장면에서 서로 웃고 때론 심각하게 굳어지기도 했다. 

어찌 보면 아이들에게 조금 무거운 영화였을 수도 있는데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시선으로 때론 행복하게 때론 고통스럽게 지나온 시간들을, 그 순간 다시 살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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