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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하면둘 Apr 25. 2019

영화 '시' 리뷰

아름다운 것만 볼 수 있을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中


윤동주의 시는 참 슬프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하는 그의 굳은 결심이 무색하게도,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세상은 그에게 아름다운 것만 보도록 허락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잃은 채 쫓겨난 가족과 민족의 현실은 비참했고, 부당한 일제에 맞서 싸우려 하는 동지들의 몸부림은 처절했다. 그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의 말 그대로 '슬픈 천명'이다. 아름다움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즐거움이라기보다 고통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 '미자'는 아름다운 것만 보고자 하는 사람이다. 꽃을 참 좋아한다는 그녀는 말에서도 고상함을 잃지 않고, 옷차림도 동네에 맞지 않게 늘 곱다. 그런 그녀가 시 수업을 수강하게 되는 것은 정해진 운명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원래 "시인의 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고, 노래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시 낭송 수업에서 늘 음담패설을 하는 박사장을 그녀는 그토록 싫어한다. 아름다움과 시는 그녀에게 있어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시'는 그녀가 그렇게 살아가듯이 꽃, 새들의 지저귐, 살구와 같이 아름다운 것만 보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그녀의 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은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손주의 성폭행이다. 그녀는 다른 학부모를 통해 손주가 한 아이의 성폭행에 가담했고, 그 아이가 그 때문에 자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사건으로 그녀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세계는 철저하게 파괴된다. 손주의 잘못을 묻어주기 위해 잔인한 위선의 세계에 가담하고, 합의금 500만원을 구하기 위해 거의 매춘에 가까운 행위를 하게 된다. 그 속에서 꽃의 아름다움을 보고 새들의 지저귐 소리를 들으며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열심히 메모를 해보지만, 이는 별 의미가 없어보인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자연 속에서 그녀는 시상을 떠올리지 못한다. 현실의 바깥에서 '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녀가 성장하고, 시를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러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인지하고 마주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녀는 비극을 참상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피해자를 추모하는 미사에도 가보고, 성폭행이 이루어졌다는 견습실에도 가보려 한다. 피해자인 아이를 마주할 때마다 그녀는 아이의 할머니로서 깊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아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는 그녀가 생각하는 '시'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세상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성장하게 되는 건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 부터다. 피해자인 그 아이를 이해하는 그 과정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중심이었던 그녀의 세계는 확장된다. 자신의 손주를 용서해달라는 부탁을 하러 피해자 아이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피해자였던 아이의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아이가 살았던 집, 부모, 성장한 모습이 담긴 사진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손주를 용서해달라는 부탁을 결코 할 수 없다. 자신의 세계만큼이나 단단한 타인의 세계에 부딪히며 비로소 '공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그 피해자 아이의 목소리를 담아 시를 쓰게 된다. 그녀는 시 쓰는 일이 너무나 어렵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녀에게 가장 어려웠던 건 영화 속 대사처럼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를 쓰기 위해 그녀는 금쪽같이 아끼는 손자의 잘못을 인정해야 했고, 자신의 죄책감을 모두 끌어안아야 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그녀의 시 <아녜스의 노래>는 그렇기에 슬프면서, 아름답다. 그 수많은 어려움을 헤치고 타인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인정하고, 타인에게 다가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러나 그 과정이 비록 아름답지 않더라도, 온갖 부끄러움을 마주해야 하더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시'가 쓰여질 수 없다. 윤동주도, 영화 속 미자도 그렇게 부끄러워하며 시를 썼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나는 세월호를 떠올렸다. 온갖 비리와 잘못된 시스템이 빚어낸 그 재앙 속에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부끄러움은 어른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극 중 미자가 그러하듯이, 슬픔을 마주해야 한다. 부끄럽고, 죄책감이 드는 일이지만 그것만이 인간으로서, 각자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이 될 것이다. 신형철씨가 책에서 세월호에 대해 언급하는 구절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친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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