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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하면둘 Sep 11. 2023

푸팟퐁커리

무엇을 좋아하시나요?


    학교를 다닐 때와 직장생활을 할 때는 너무도 많은 차이가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체감하는 것 중 하나는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의 주제같다. 대학시절과는 달리 직장에서는 만나는 사람의 대부분이 일과 관련된 이들뿐이고, 그렇다 보니 당연하게도 대부분 일에 대한 이야기만 하게 된다. 기껏 주제를 벗어난 잡담이라 해봐야 돈(주식, 부동산)버는 것과 관련된 것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을 하자고(혹은 돈을 벌자고) 모인 사이에서 아이스 브레이킹이라면 “요즘 2차전지 주식이 널을 뛰던데요, 좀 사두셨어요?“하고 묻고 ”아휴~ 그랬으면 벌써 집이겠죠~”하고 받아치는 정도가 적당한 것이지, “혹시 취미가 있으세요? 저는 쉴 때 책을 읽는 편입니다.“ 같은 질문을 하게 되면 왠지 본론에서 너무 멀리 온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혹여나 첫 미팅에서 그런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면(다행히 아직 본 적은 없다), 회의 진행이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아무런 목적 없이 우연히 만난 대학생들끼리라면 첫만남에서 “혹시 취미가 있으신가요? 저는 개미가 지나다니는 걸 보는 걸 좋아해요.”라는 어이없는 질의응답이 오간다 한들, 그저 ‘재밌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네’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후자의 쓸모 없는 대화 쪽이 좀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탓에, 요즘은 종종 회사를 벗어나 크고 작은 소모임들을 나가보려고 하고 있다. 동호회란 말 그대로 일이 아닌 무언가에 대한 동일한 선호가 바탕이 되어 모인 이들이니, 학교를 다닐 때처럼 좀 더 가벼운 이야기를 맘껏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몇 번 그런 곳을 나가보니 이쪽에서도 나름대로의 애로사항은 존재했다. 보통 어딘가에 처음 나가면 마주하게 되는 질문 중에 하나가 “무엇을 좋아하세요, 혹은 주로 쉴 때는 무얼 하세요?”라는 질문인데, 나는 보통 책 읽는 것과 영화 보는 것,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을 모두 좋아하니 그때의 입맛대로 그 중 한가지를 주로 답하게 된다. 그러면 대부분 “가장 좋아하는 작가/감독/가수가 누구에요?”가 뒤따르는데, 이런 질문을 마주하게 되면 나는 수리영역 21번 문제를 마주한 수험생처럼 어려운 문제가 나올 줄 알았으면서도 늘 말문이 턱하고 막히게 된다.


    예를 들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목록에는 하루키, 피츠제럴드, 제인 오스틴, 알랭 드 보통, 박민규, 장강명, 정세랑 정도가 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서 누구 하나를 꼽자니 사실 이들 중에서도 발간한 책 전부를 읽은 작가는 없으므로 누구 한 사람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꽤 민망하다. 심지어 피츠제럴드는 그가 출간한 3권의 장편 중 읽은 것이라곤 가장 유명한 <위대한 개츠비> 뿐이다. 물론 그 한 권으로도 충분할 만큼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약간의 죄책감이 든다. 왠지 피츠제럴드가 무덤에서 일어나 “감히 한 권 밖에 안읽어놓고 나를?”이라고 타박할 것만 같다. "아니에요, 선생님. 단편은 더러 읽었습니다!"라고 변명한다 한들 예민한 성격의 피츠제럴드가 나를 용서해줄 것 같지가 않다.


    또, 그나마 작품 대부분을 읽은 하루키 같은 작가를 얘기한다면, 다른 문제가 떠오르는데 만약 후속으로 ‘어떤 부분이 좋았냐’는 질문을 상대가 해온다면 그것에 대답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딱히 이유를 말로 하기도 어렵겠거니와 굳이 하자면 자세히 묘사되는 외로움 정도가 좋은 부분일 텐데, 초면에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어딘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이유를 말하지 않는 상황은 그것대로 싫다. 하루키가 좋다면서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면 괜히 쿨한 척 하려고 공연히 읽지도 않은 하루키의 명성을 이용한 것만 같기 때문이다. 여간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 나는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아 네, 소설을 좋아하는데, 그냥 이것 저것 다양하게 좋아합니다.”라는 실없는 대답을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영화나 음악의 경우도 좋아하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이러쿵저러쿵 제 각각의 이유가 있는 탓에 “무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특히나 그 질문을 꺼내는 사람이 오늘 처음 본 사람이라면 내가 좋아한다고 답변한 것들로 나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겠는가. 예를 들면 권총자살로 삶을 마무리한 커트 코베인의 밴드 ‘너바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이 사람 꽤나 음침하군’하고 생각하게 될 것만 같고. 한 작품에 최소한 10명씩은 죽어나가는 ‘쿠엔틴 타란티노’ 를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라고 말한다면, ‘아, 그 폭력적인 사람’이라고 나를 떠올리게 될까봐 괴로워진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길게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곳을 가게 되어도, 이런 질문들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부터도 누군가 처음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물어보지 않는가. 본인의 직업이나 직장을 제외하고, 인간이 스스로를 설명하는 데에 '좋아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나라는 사람은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집합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설명할만한, 좋아하는 것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니 딱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 그것만큼 이라면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바로 푸팟퐁커리다.


    이 이름도 요상한 태국 음식에 빠지게 된 건 언제였을까. 첫 만남은 분명히 기억이 난다. 학회에서 진행하던 선배와의 만남을 위해 나와 학회 동기 몇 명이 이태원에 저녁 약속에 갔을 때였다. 선배의 단골이라는 그 식당은 입구부터 심상치 않았다. 대체 어떻게 얻어낸 것인지 알 수 없는 태국 왕실 인증 마크에서부터, 낯선 코끼리 모양의 동상까지. '역시 이태원은 다르군' 하면서 들어갔던 그곳에서 나는 이 음식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닭고기가 들어간 커리인 줄 알았는데, 닭고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하게 기분 좋은 비린내와 고소함이 있었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푸팟퐁커리는 소프트 쉘 크랩이라는 게의 일종을 튀긴 후에 커리와 함께 버무려내는 음식이었다. 이름도, 재료도, 맛도 모두 생소했지만,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 후로 나는 여자친구도 데려가고, 그 다음 여자친구도, 또 친구들도, 후배들도 데려가며 푸팟퐁커리를 먹고 즐겨왔다. 그러니 스스로를 자신 있게 푸팟퐁커리 애호가라고 얘기해도 될 것이다. 내가 이것에 자신이 있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푸팟퐁커리를 파는 식당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에 나 정도면 꽤나 많이 가본 편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만일 '김치찌개 애호가'라고 생각해보자. 전국에 김치찌개를 파는 곳이 최소한 몇 천 군데는 넘어갈 텐데, 기껏 많이 가본 사람이래봐야 백 군데 정도 가보지 않았겠는가. 그런 주제에 김치찌개는 '내가 잘 안다'고 말하기는 조금 민망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푸팟퐁커리의 경우 기껏해야 전국을 뒤져도 100군데가 될까 말까 정도의 수준일테니 20군데 정도만 가봤어도 국내에서는 얼추 푸팟퐁커리 권위자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좋아하는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좋은 점 중에 하나다. 음식이 좋은 데에 맛있다는 것 외에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그 밖에도 왠지 독특한 발음이라든지 하는 꽤나 사소한 이유들이 있는데, 너무 사소해서 말하기는 민망하다. 단 한 가지 오점은 내가 아직 본토인 태국을 가보지 않았다는 점인데, 언젠가는 꼭 태국을 들러 권위자로서의 품격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이다.


        이제 어디를 가든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푸팟퐁커리’라는 대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으로 상황을 상상해보니 이것도 역시 그다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진 않다. 특히 다시 생각해보니 발음이 우스꽝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대답이 준비되기 전까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최대한 삼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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