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How I met your mother' 리뷰>
연애가 끝났을 때 가장 곤란한 점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내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사람이 없어지게 되면 주말은 갑자기 텅 비어 버리고, 무엇이든 의욕적으로 할 마음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상실감은 꼭 물리적인 시간과 함께 느껴진다. 돌이켜보면 내게 있어 이별이란 늘 이런 식이었다. 이별택시 같은 절절한 발라드 노래가 어울리는 처절한 슬픔이 찾아오는 건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배경음악 자체가 사라지는 쪽에 가깝다. 슬픔도 기쁨도 없는 비어버린 상태. 차라리 뭐가 됐든 속 시원하게 게워내 버리면 좋을 텐데 이미 텅 빈 마음에서 더 이상 무언가를 비워낼 수는 없다. 그러니 무엇이든 채워 넣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번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트콤인 “How I met your mother”를 하루 종일 봤다. 멍하게 보기에는 시트콤만큼 좋은 게 또 없다. 이 시트콤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주인공인 테드가 아이들에게 내가 "어떻게 너희 엄마를 만나게 됐냐면…"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시트콤은 액자식 구성으로 테드가 젊은 시절 만났던 여자친구들을 보여주며 누가 테드와 결혼하게 될지 시청자들을 궁금하게 만든다. 하지만 시즌1, 2, 3이 지나가고 테드가 만나는 여자친구들은 수 십명이 되어가는 데도 누가 아이들의 어머니(즉 테드의 부인)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이 시트콤은 시즌9까지 방영되는데, 시즌이 종료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 속에서 주인공 테드는 누군가를 만났다가 헤어지는 비루한 연애사를 반복한다.
하여튼 주된 내용이 테드의 연애사인 만큼, 극 중 테드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하며 여자친구들을 만난다. 아니 그에게는 새로운 만남 그 자체가 시행착오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그는 어떤 상대와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결혼식 당일에 신부에게서 버림받기까지 한다. (물론 프로그램 구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테드가 금방 짝을 찾는다면, 시트콤은 거기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드는 늘 새로운 사람과 썸이 생길 때마다 흥분하고, 마치 처음 사랑에 빠진 것 같이 설레한다. 친구들은 그런 테드를 보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쟤는 왜 안변할까. 만나고, 성급하게 굴고 다 망쳐버리잖아. 사랑에 빠진 게 처음도 아니면서.”
테드는 그런 친구들에게 “이번엔 다를거야.”라고 늘 말하곤 한다. 그런 테드의 불굴의 의지를 보고 있자면 나도 절로 응원의 마음을 품게 된다. 마치 내 스스로를 응원하듯이. ‘그래. 이번엔 다를거야.’라고.
내가 이 시트콤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트콤은 기본적으로 ‘시행착오’에 대한 이야기다. 테드는 수없이 많은 만남과 그 속에서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아래는 기억나는 그의 인상깊은 실수들이다.
1. 첫번째로 저녁을 먹은 날 섣부르게 ‘사랑한다’고 얘기해 경솔한 사람처럼 보인다.
2. 원나잇 스탠드를 해보려다 엉치뼈에 나비 문신을 하게 된다.(그는 이를 지우기 위해 간 피부과의 의사와 연애를 하게 된다.)
3. 결혼식에 서로의 전 연애 상대(상대의 경우 전남편)를 부르자고 한다. 그의 결혼 상대는 결국 전남편과 함께 결혼식에서 도망친다.
4. 파티에서 우연히 한번 만났던 사람을 몇 년씩 그리워하다 운명적으로 만나지만, 사실 그가 자신과 전혀 통하는 상대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테드는 다시금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맞는 단 한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만났던 사람이 결국 자신의 단 한사람이 아니었다고 해도 낙심으로 오랜 시간을 지새우지는 않는다. 다른 캐릭터들도 마찬가지다. 테드가 유독 연애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테드의 친구들은 제각각 커리어, 가족관계에서 이런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는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들 더러는 이런 시행착오 끝에 해피엔딩인지 아닌지 조금은 애매한 엔딩을 맞이하기도 한다. (아마 등장인물 대부분이) 그러나 이 시트콤에 나오는 이들은 모두 그것이 어떤 결말이든 이를 받아들이며 본인의 삶을 살아나간다. 이것은 분명 그들이 처음 설계하고 목표했던 삶의 모습과는 다른 방향이었을 테다. 그럼에도 그들은 늘상 만나던 바에서 서로 만나 웃고 떠들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우리가 흔히 놓치고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그들은 아는 것 같다. 어차피 산다는 건 설계한 대로 살아지지 않으므로 살아가면서 실수하며 끊임없이 경로를 바꾸어가며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 테드와 그의 친구들이 하는 실수들을 시행착오라고 부르는 것은 애초에 잘못됐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경로 중 하나였을 테니까.
You can’t design your life like a building, it doesn’t work that way. You just have to live it and it will design itself. – lily aldrin, S04E24
시트콤은 오랫동안 진행되었고, 테드 아이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마지막 시즌이 되어서야 공개된다. 이 시트콤이 방영될 때는 많은 시청자들이 테드가 그동안 여자친구로 나왔던 사람 중 한 명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곤 했는데 (시즌이 많은 만큼 그는 워낙 많은 연애를 했다. 세어 본 적은 없지만 100회가 훌쩍 넘을 것 같다) 반전 아닌 반전으로 테드의 부인은 시즌9이 되어서야 처음 등장을 한다. 실제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100번이 넘는 연애를 했음에도, 정작 자신의 단 한사람을 그 100번이 지나간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니. 아마 현실이었다면, 보통은 그 수많은 시행착오를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아찔하다. 테드가 98번째에서 멈췄더라면, 99번째에서 멈췄더라면, 그는 평생의 연인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란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에게 그런 해피엔딩이 찾아올 것이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인생에 해피엔딩 따위 없을 것이다’를 믿느니, ‘언젠가는 해피엔딩이 있을 것이다’고 믿는 편이 더 좋다. 어차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결론을 모르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자명하다. 끊임없이 실수하는 것. 다만, 다음에는 조금씩은 더 나아지는 것, 혹은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결국 산다는 건 스테이크를 굽는 것보다는 라자냐를 만드는 일에 가깝다. 삶이란 한번에 구워지는 것이 아니라 실수와 시행착오들로 한 층씩 켜켜이 쌓아나가는 것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