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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법보다, 잘 떠나는 법을 배우고 싶다

시어머니의 치매를 맞이하며 배우는 ‘돌봄의 인내’

요즘은 하루가 길어요.
아침마다 시어머니의 눈빛을 보면, 그 안에 담긴 감정이 하루를 결정합니다.
어떤 날은 다정한 어머니이고, 어떤 날은 저를 도둑이라 부르며 문을 걸어 잠그십니다.
“내 돈 훔쳐갔지?!”
그 소리에 가슴이 쿵 내려앉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이해합니다.
그건 저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사라져 가는 기억 속에서 마지막으로 붙잡고 싶은 자존심이라는 걸 이제는 압니다.


pexels-cottonbro-5585240.jpg “햇살이 닿는 그 손 위에서, 삶은 여전히 따뜻하게 숨 쉬고 있었다.”


점심 무렵엔 또 다른 어머니가 계십니다.
조용히 제 손을 잡고 “미안하다” 하시며 눈을 감으시죠.
오전의 폭풍은 지나가고, 오후의 고요가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제 마음도 함께 무너지고, 다시 세워집니다.
치매는 어머니만의 병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병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밤이면 더 심해집니다.
불이 켜져 있지 않으면 불안해하시고,
요양보호사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시끄럽다”며 소리치십니다.
결국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떠나버린 보호사들.
남은 건 지쳐버린 가족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점점 걸음이 느려지고, 스스로를 돌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요양원은 싫다, 내 집에서 죽겠다”고 말씀하십니다.


pexels-caleboquendo-34328480.jpg “돌봄은 누군가를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일.”


그러던 어느 날, 정말로 불이 날 뻔했습니다.
어머니가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려두고 잊으신 거죠.
그날 이후 저는 밤마다 불안에 떨며 잠을 설칩니다.
“이제는 더 이상 혼자 둘 수 없구나…”
그때 처음으로, ‘돌봄’이란 말이 제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돌봄은 사랑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사랑에는 한계가 있고, 한계에는 제도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도도 결국 사람의 마음이 닿아야 작동합니다.
가족 모두가 소진되고, 우울해지고, 죄책감에 짓눌리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 역할이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pexels-kampus-7551667.jpg 함께 버티는 하루, 그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


요즘 저는 “웰다잉”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립니다.
잘 떠난다는 건, 잘 산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요.
시어머니의 하루하루를 보며 느낍니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어합니다.
“떠남”은 죽음이 아니라 관계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어머니가 제 이름을 잊으셨을 때,
저는 오히려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시어머니’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같은 시간 속을 걸어온 ‘한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덜 화내고, 덜 두려워하려 합니다.
언제든 마음이 무너질 수 있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어머니 곁에 앉아 따뜻한 차를 끓입니다.
“엄마, 차 식어요. 한 잔 드세요.”
그 말을 건네는 동안, 제 안의 분노와 피로도 잠시 잦아듭니다.


pexels-rdne-8123855.jpg 잘 사는 법보다 잘 떠나는 법을 배우는 시대, 죽음을 준비하며 삶을 되돌아보는 방법 배우기

돌봄은 누군가를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일임을 배웁니다.
이 긴 여정의 끝에서, 저는 ‘잘 떠나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과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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