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시먼딩(西門町) (1)
대만에 처음 오시는 분이라면, 반드시 타이베이 구도심의 중심, 시먼딩(西門町)에 들르시게 될 겁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정확히 서울 명동에 해당되는 포지션이죠. 일단 쉽게 찾을 수 있는 숙소들이 이쪽에 몰려 있기도 하고, 먹거리 볼거리 등이 모두 모여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만 왔는데 아종면선(阿宗麵線) 곱창국수, 행복당 밀크티 안 먹고 갈 수는 없잖아요. 팝마트 가서 라부부 인형도 함 봐줘야 하고요.
근데 저는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좀 싫어합니다. 여행도 항상 비수기에 다니고, 관광객들이 줄을 서는 곳은 웬만하면 안 가려고 하죠. 그래서 대만 오고 난 뒤에도 시먼딩 쪽으로는 잘 찾아가지 않았어요. 가끔 가더라도, 볼일만 보고 후딱 돌아오는 편이었습니다. 길도 복잡하고, 동서남북 구분도 잘 안 되고, 사람들은 많지만 딱히 가볼 곳은 없는 '전형적인 관광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러다가 시먼딩 역에서 서쪽 방향의 안쪽 깊숙한 곳까지 몇 번 들어가 보게 됐어요. 바깥쪽에서만 보던 시먼딩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장소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늘 화려하고 북적대는 메인 거리만 다니면 시먼딩은 예전에도 이랬고, 또 미래에도 영원히 그럴 것만 같은 느낌을 받잖아요. 그러나 안쪽으로 점점 들어갈수록 "이곳도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변해온 공간이구나" 하는 실감이 확 들었습니다.
시먼딩은 일제 시대 처음 상권으로 개발돼, 100여년동안 타이베이를 대표하는 거리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요즘은 명동처럼 대만사람들보다는 관광객들이 더 많이 찾는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여전히 구석구석에 대만 사람들의 흔적과 사연이 숨어 있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이제 대만에 비교적 익숙해진 만큼, 시먼딩 골목골목을 다니며 타이베이의 변천사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미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많이 알려진 곳들은 과감하게 생략했습니다. 타이베이 여행이 n회차이시거나, 사람 많고 유행 타는 곳은 죽어도 싫다는 외골수 성향의 여행자분들께서 이 글을 참고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가보지는 않아도 되는, 그러나 굳이 가보게 되면 대만을 한꺼풀 더 벗겨볼 수 있는 곳들을 위주로 안내해 보고자 합니다.
사자림 쇼핑몰 獅子林商業大樓
https://maps.app.goo.gl/pbZJtcf22tvAkna96
첫번째 행선지는 과거 시먼딩의 랜드마크였던 '사자림 쇼핑몰'입니다. 1979년 처음 문을 열었으니 개장한 지 벌써 46년이 된 곳이네요. 10층짜리 노란색 건물로, 예전에는 길에 지나다니다 보면 눈에 확 띄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빛도 바래고 주변에 높은 건물들도 많아, 딱히 랜드마크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네요.
사자림은 '사자 숲'이라는 뜻인데, 왜 이름을 사자림으로 지었는지는 아무리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나오지가 않아요. 중국 쑤저우의 사자림이라는 유명 정원이 있는데, 그걸 그대로 가져왔다는 설도 있는데요... 어쨌든 이 건물은 '사자'라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입구인가 어딘가에 사자 석상도 있다고 하는데, 저는 못 찾았네요.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쉽습니다.
과거에는 여기가 시먼딩의 '패션 중심지'였다고 하죠. 온갖 수입 상가와 화려한 옷가게, 잡화점, 양장점, 예복 전문점 등이 입점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들어가보면 꽤나 을씨년스러운 모습입니다. 1층에는 휴대폰 매장, 인형뽑기 기계가 대부분 들어차 있었고, 2층은 '무대용 의상' 가게들이 몇 있었지만, 절반 이상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3층은 '성인' 오락실이 들어서 있는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요. 바깥쪽부터 아저씨가 지키고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가보지는 못했습니다(중국어 소통 실패). 바깥쪽에 세워 둔 오락기 앞에서는 어떤 분이 엎드려 주무시고 계셨네요. 담배연기 전 퀴퀴한 냄새, 등골이 조금 오싹해졌습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 갑자기 다른 세계에 진입한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죠..
그리고 4층에 들어섰을 때는 맙소사... 컴컴하게 불이 꺼져 있는데 피로한 얼굴의 사람들이 서로 대화도 없이 한가득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이것은 어둠의 인력시장인가 무엇인가 도대체... 진짜로 무서워지기 시작하는데...
알고보니 이 4층은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극장이었고, 이 줄은 애니메이션 1인 1매 현장판매밖에 하지 않는 '체인소맨' 극장판 표를 사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네요. 티켓 오픈 시간 몇 시간 전부터 기다리는 것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사자림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이곳은 대만군 보안국이 있던 곳이래요. 한국으로 따지면 예전 보안사령부 건물이 도심 한가운데 있었던 셈이죠. 대만은 과거 무려 38년간 계엄령이 지속됐던 곳입니다. 여기서도 수많은 사람이 고문을 당하고 죽어나갔다고 합니다. 그 건물을 허물고 커다란 쇼핑몰을 세운 셈이죠. 그런 역사가 있어서 그랬던 건지, 으스스한 풍경에 제 상상력이 한껏 자극되던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이 건물이 과거에 누렸던 권세와 영광을 유추해 볼 수 있는 10층 꼭대기 식당 '사자대주루'로 향합니다. 이 빌딩이 세워지자마자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못 찾겠는데, 아무튼 45년 가까이 운영했다고 하죠. (맨 오른쪽 사진은 엘레베이터 천장 사진입니다.) 예전 홍콩, 대만, 중국 등 중화권 영화에서만 보던 빈티지하게 화려한 식당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귀여운 사자 로고. 입구에서 살아 있는 거북이, 잉어들이 손님을 반갑게 맞아줍니다.
입장하면 이렇게 거대한 붉은색 홀이 나옵니다. 휴대폰으로 광각으로 한 번 찍었어야 하는데, 아직 초보 블로거라 놓친 사진들이 너무 많네요 ㅠㅠ 여튼 엄청난 규모의 홀입니다. 예전에 홍콩에 가면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광동식 딤섬 가게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딤섬 카트가 식당 복도를 통해 돌아다니면, 거기서 먹고 싶은 걸 고르는 방식입니다. 홍콩 여행해 보신 분들은 한번쯤 경험해 보셨을 법한 시스템이죠? 소, 중, 대 딤섬이 있고 거기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데요. 소자만 해도 한 접시에 벌써 5000원이 넘습니다. 절대 싸지 않은 가격입니다...
저는 새우 만두인 샤오마이,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고깃덩어리 만두, 또 닭발 조림, 곱창 조림, 새우 창펀을 카트에서 꺼내 왔습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은 아니지만, 꽤 맛있기는 합니다. 샤오마이 새우 결도 잘 살아 있고, 창펀도 부들부들하니 잘 넘어가며, 곱창은 살짝 향은 나지만 거부감 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닭발 양념도 칠리처럼 달달한 감칠맛 좋았고요. 저기에 우롱차 한 주전자까지 해서 한 3만7000원 정도 나왔던 것 같습니다. 계산을 하지 않고 막 먹었더니 대만 치고는 엄청나게 비싸게 값을 치렀습니다. 딤섬 카트에 없는 딤섬 메뉴는 별도로 주문할 수 있고, 요리 종류도 시킬 수 있습니다. 단체 손님들 많이 오더라고요. 다들 요리 시켜 놓고 딤섬 몇 개 더 가져다가 먹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대만까지 와서 광동식 딤섬을, 그것도 가성비도 별로 좋지 않게 먹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죠. 제목처럼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식당입니다. 다만 1980년대 대만에서 가장 잘 나가는 최신식 빌딩 맨 꼭대기 층에는 이렇게 큰 광동식 딤섬 가게가 들어섰다는 사실, 2025년에도 직접 가서 경험해 볼 수 있다는 점이 포인트입니다. 그만큼 당시 대만에서는 무엇이든 홍콩이라고만 하면 고급스럽다는 이미지로 통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홍콩의 샐러리맨들처럼 엄청 금전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특별한 날 기대를 안고 새로 생긴 백화점 꼭대기 식당에 다같이 식사하러 오는 대만의 중산층 가족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혹은 이곳을 대관해 홍콩 삼합회와 단체 조인트 회식을 하는 조직폭력배 형님들도 상상해 볼 수 있겠네요. 점심에 차와 딤섬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는 등 여유를 부리는 것이 홍콩의 '얌차' 문화입니다. 천천히 식사를 즐기면서 이 공간에 얽힌 이야기들을 상상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겠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건물 6~8층은 이렇게 주거용, 오피스용 공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건물은 애초부터 주상복합으로 설계된 셈인데요. 이렇게 보면 홍콩의 청킹맨션 같은 느낌도 들지 않나요? 이쪽 방을 숙박 시설로 운영하기도 하는 것 같으니, 궁금하신 분은 여기서 머물러 보시는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만년 쇼핑몰(萬年商業大樓)
https://maps.app.goo.gl/dCDS97RtHes2HZBK8
사자림 쇼핑몰과 쌍벽을 이루는 시먼딩의 또다른 랜드마크, 만년 쇼핑몰로 발걸음을 옮겨 보겠습니다.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만년 쇼핑몰은 사자림보다 6년 앞선 1973년 처음 문을 열었습니다. 원래 일제 시대 때부터 여기에 유명한 '국제 극장'이 있었는데, 그걸 갈아엎고 새로 만든 대형 건물이라고 하네요. 사자림 건물과는 달리 빛바랜 초록색이 상당히 눈에 띄고, 특히 붉은색으로 걸린 간판이 보색 대비를 이뤄 밤이 되면 눈에 잘 띕니다.
만년 쇼핑몰은 한국 사람들한테도 이미 친숙합니다. 바로 지하 1층 아케이드 식당 때문이죠. 타이베이를 대표하는 우육면 식당 중 하나인 라오샨둥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https://maps.app.goo.gl/5NfNJV1eJsVZetZp7
이건 다른 날 방문했을 때의 사진입니다. 저는 이런 초유명한 가게는 사실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비교적 마지막까지 아껴두는 편인데요. 사실 줄서는 게 싫어서죠... 시먼에 있는 다른 우육면 집을 갔다가 거기에 사람이 너무 많길래, 홧김에 한번 와봤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들어갔습니다.
먹고 나오니 이만큼 줄을 서 있더군요...
저는 우육면을 시키면 무조건 우삼보면(牛三寶麵)을 시킵니다. 대부분 소고기 덩어리, 소 힘줄, 내장(대개 양 부위)을 '세 개의 보물'이라며 섞어서 줍니다. 여기는 우삼보면이 240대만달러(1만1000원 정도)네요. 결코 싸지 않은 가격입니다. 넓다란 수타면은 쫄깃쫄깃 아주 잘 삶겼고요. 국물이 깊지만 약재 향이 꽤 나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맛으로 느껴집니다. 물론 저는 가리지 않고 먹습니다. 꼭 다시 올만한 맛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만두(약 2000원)도 평범합니다.
https://maps.app.goo.gl/e49f3TFiCLTTje9RA
우육면 집 바로 옆 위치하고 있는 진위엔파이구, 엄청 유명한 돼지갈비 튀김 집입니다. 여긴 아직 안 가봤어요. 대만에서 평소에 밥반찬으로 먹는 돼지갈비튀김이 사실 다 거기서 거기인데요. 여기는 뭔가가 다른지 항상 줄을 길게 서 있더라고요. 언젠가는 제가 격파 한 번 해보겠습니다.
이 건물은 관광객들도 지하 1층 식당만 갔다가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층별로 쭉 둘러보는 것도 굉장히 즐거운 경험입니다. 특히 2~5층이 흥미로운데요. 이른바 일본발 '서브컬처'라고 할 수 있는 만화 피규어, 장난감, 프라 모델 가게, 갓챠(뽑기 기계) 등이 빼곡히 들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엄청 많더라고요.
특히 눈에 들어왔던 건 서브컬처 관련된 잡지를 모아 놓은 서점이었습니다. 대개 일본 잡지들을 그대로 수입해 온 거였는데요. 여전히 이런 활자 문화가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좀 부러웠습니다. 물론 저는 긴 글을 잘 못 읽기는 합니다.
5층은 오락실이 들어와 있네요. 여기는 원래 롤라장이었다고 합니다. 사자림에 있던, 들어가보지 못했던 성인 오락실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네요.
10층, 9층은 만화방, 카페, DVD방이 들어와 있었어요. 나머지 층은 호텔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10대 청소년들을 위한 공간으로 설계된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건물이 오래돼 가게들이 매우 클래식한 분위기가 나지만, 분위기만큼은 매우 활기찼습니다. 자기 취향에 정말 진심인 10대 20대 대만 친구들이 좋은 물건을 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는, 프로들의 공간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국인 따위들이 기웃거리는 시먼딩 본거리의 장난감 가게들과는 공기가 다릅니다.
사자림과 비슷한 시기에 오픈한 쇼핑몰이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사뭇 상반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동대문의 두타, 밀리오레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두 쇼핑몰의 운명이 이렇게 나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20년 뒤에도 이런 격차가 계속되고 있을까요? 아니 그때까지 이 쇼핑몰들이 남아 있기는 할까요?
혼자 다닐 때는 신나게 휙휙 다녔는데, 글로 정리하다 보니 감당하기가 힘들 만큼 길어지네요. 시먼딩 2편에서는 시먼딩 안의 작은 거리들 탐방을 해보겠습니다. 아마 3편까지 계속 이어질 것 같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