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 필경사의 대만 유랑기

에필로그

by 박둘비

안녕하세요. 2025년 10월 현재 대만 타이베이에 살고 있는 박둘비라고 합니다.

회사에서 연수를 보내줘서 지난 4월부터 이곳으로 1년간 오게 됐고, 가끔씩(이라기엔 꽤 자주) 회사 일도 좀 보고 그렇게 여유롭게 지내는 중입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정말 훌쩍 지나갔네요. 대만에는 사실 이전에 한 번도 안 와보기도 했고, 중화권 문화도 전혀 익숙하지가 않았어요. 부끄럽게도 중국어도 전혀 못 했었고요. 그동안 이곳에 적응하느라 나름대로 분투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사실 대만에 오기 전에 작은 목표가 하나 있었어요. 이곳에서 어떤 주제로든 책을 한 권 써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창한 목표를 이루기엔 정말 여러 어려움들이 있더라고요. 일단 대만에 대해서 미리 공부를 하지 못한 채 정말 생짜로 왔던 게 가장 큰 심리적 장벽인 것 같아요. "이 정도로 짧은 식견으로 정말 책을 쓸 수 있겠어?"라는 의문을 스스로 벗어던지기가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언어 문제도 물론 굉장히 크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저의 게으름이겠죠. "한국 지성계(?)에 파장을 일으킬 정도의 책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비대한 자의식에 비해, 성실함은 근처도 가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예전에 꿈높현시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죠(나이가 대충 짐작이 되죠?). 몇 가지 주제를 생각해 봤고, 일부는 취재 시도도 해봤지만 도저히 새로운 책을 써낼 만큼의 노력을 들일 엄두가 나지를 않더라고요. 어영부영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잘 갔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대만에서 처음 겪는 건 아녜요. 예전에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바틀비와 바틀비들'이라는 책을 찾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엔리께 빌라 마따스라는 엄청 낯선 스페인 작가가 쓴 단편 소설 모음집인데요. 창작 욕구와 의지만큼은 여느 작가들보다 부족하지 않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글을 완성해내지 못하고 '작가'라는 타이틀의 언저리만을 맴도는 가상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잔뜩 모아 놓은 이상한 책입니다.

'바틀비'라는 건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서 따온 것입니다. 엔리께 빌라 마따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며 타인과의 소통을 끊는 것을 넘어 정상적인 일상까지 거부했던 바틀비라는 독특한 캐릭터에서 모티브를 얻었던 것 같아요. 이런 문학적 마비 상태를 '바틀비 증후군'이라고 지칭해, 예전 문헌들을 뒤져 그런 사례를 찾아내 가져오기도 하고, 거기에 좀 더 각색을 더하기도 하고, 일부는 자기가 상상으로 이야기를 지어내 총 86개의 사례를 제시합니다. 그 와중에 참고 문헌은 정말 방대해, 읽다보면 정말 '쓸데없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엉뚱한 이야기의 계속된 반복 때문에, 굳이 끝까지 다 읽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도 그 아이디어 자체는 제 머릿속에 굉장히 오랫동안 남아 있어요. 왜냐면 저도 제 스스로 비슷한 경우라고 느끼기 때문이었습니다.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아도취, 의식 언저리에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는 포부, 그러나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피지컬, 그런 괴리에서부터 오는 무기력함. 사람 사는 게 예전이랑 다른 게 하나도 없구나. 자조와 위안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신기한 책이었습니다.

대만에 왔다고 해서 이런 관성이 쉽게 없어지지는 않겠죠. 그래도 이런 소중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리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가볍게 블로그부터 시작해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마비 상태'를 벗어나려는 재활의 첫번째 시도라고나 할까요!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대만 사회를 배우려고 들인 노력이 아깝기도 하고, 이런 가벼운 공유가 혹시 있을지 모를 독자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물론 많은 대만 선배들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기대도 조금 가져봅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만에 참 많이 오가지만, 이상하게 대만에 대한 한 단계 깊은 이야기는 웹에서도 책에서도 찾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더듬더듬 반년간 헤맨 짬밥이 있으니, 앞으로 대만이라는 사회에 대한 저만의 해상도를 바짝 높여가 볼까 합니다. 또 여기에 이야기를 풀어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으면 조금 더 부지런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제가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굉장히 장황하게 설명해 봤습니다. 조금 공감해 주실 분들이 계셨으면 좋겠네요. 아래에는 제가 지금까지 대만에서 찍은 사진 중 좋아하는 것들 몇 가지만 간단히 붙여 볼게요. 참고로 제목 부분에 붙여 놓은 사진은 대만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양명산' 위 대초원에 살고 있는 물소떼를 찍은 사진입니다. 여유가 되신다면 방문하셔서 대만을 상징하는 한갓지고 평화로운 풍경 눈에 담고 오시길 추천드립니다.


이 사진은 타이난에 여행을 갔다가 해변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햇빛을 가려주기 위해 아버지가 우산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요. 그런데 한 아이만 그늘에서 햇빛을 피하고 있죠?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과, 따뜻한 마음만으로는 모두를 적절히 보듬지 못하는 현실의 간극이 잘 드러난 사진 같아서 참 마음에 듭니다. (그냥 와이프가 시켜서 휴대폰 보면서 성의없이 들고 있던 걸수도 있습니다.)

이건 타이베이에서 엄청 유명한 라오허제 야시장 앞에 있는 츠유궁이라는 사원의 내부 사진입니다. 저는 대만에 오시는 분께 무조건 대만의 사원을 방문해 보라고 추천합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진심을 다해 기도하는 대만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이질적이고 신기합니다. 대만에 사원은 여러 군데가 많지만, 저는 특히 실내 장식이 아름답고 층이 높은 츠유궁을 가장 좋아합니다. 야시장보다 훨씬 재밌어요.

이건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관광지 지우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지우펀 라오지에를 따라 지우펀 고개 꼭대기까지 올라오면, 건너편 해안선이 잘 보이는 곳이 나옵니다. 보통 라오지에만 방문하고 이 풍경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꼭 챙겨서 감상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이었는데, 노을이 참 이쁘게 들었어요. 사진기를 다루는 게 익숙하지 않아 좀 어두컴컴하게 나온 게 아쉽지만, 그 나름대로 느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절주절 말이 너무 길었죠. 제가 살고 있는 동네 사진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칠까 합니다.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아침식사 가게 '푸항또우장' 맞은편에 있는 거리죠. 건물들 모서리 부분이 수직으로 시원시원하게 찍혀서 상승감이 잘 나타난 것 같아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이게 사진기 사자마자 찍은 사진인데, 왜 더 카메라에 익숙해진 지금은 이런 사진이 잘 안 찍히는 걸까요? ㅠㅠ 아무튼 급마무리하겠습니다. 두서도 없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