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시작에서 답을 찾기 위해서 창세기에서 시작한다. 모든 것의 시작 창세기를 통해 답을 찾으려는 저자의 시도는 아마도 표지에 '창세기1'로 표시된 것으로 보아 시리즈 설교를 염두에 둔 것 같다. 본 책에서 창세기 6장까지 다루어졌으니 저자의 책은 그 이후 장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책을 읽으며 나갈 때 한 권의 책을 관통하는 주된 키워드가 무엇인가를 늘 염두하며 읽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둘인 것 같다. 바로 안식과 동행. 실제로 안식은 책의 앞부분에, 동행은 책의 뒷부분에 주로 다루어지지만, 이들 두 키워드는 모든 내용의 기반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관점의 뿌리가 바뀜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관점이 뿌리째 뽑히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관계가 새롭게 시작합니다.
시작에서 답을 찾다, 두란노, 조정민, p.61
바로 그 시작을 위한 이야기의 시작은 ‘원형 origin’에 대한 내용이다. 창조, 하나님의 형상, 안식, 죄, 부끄러움, 죽음, 후손, 타락에 이르기까지 성경에서 창조를 기점으로 세상의 원형이 된 중요한 사건들을 다룬다. 저자의 말대로 성경이 과학책은 아니기 때문에 창세기의 한 단어 한 단어를 꼽씹어 보는 것보다 맥락과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시작에서 답을 찾기 위한 저자의 시작은 당연히 창조이고, 창조는 믿음을 요구한다. 창조 없는 믿음은 없고 믿음 없는 창조도 없다. 여기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갈리는 지점이고, 삶이 달라지는 지점이고, 향후 이어질 안식을 누릴 수 있는지 여부의 지점이 되고, 동행 여부가 결정되는 지점이 된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 창조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 저자는 구원을 재창조라고 언급한다. 결국 창조의 개념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기원을 믿는데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구원은 창조주의 재창조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이 믿어지지 않으면, 구원을 받아 들 일 수 없습니다.
창조가 믿어지지 않으면, 구원은 내 사건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구원은 한낱 개념에 불과하게 됩니다.
시작에서 답을 찾다, 두란노, 조정민, p.25
저자는 구원의 본질을 알기 위해 창조를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며,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창조의 이해 > 창조의 동의 > 창조의 관점 > 새로운 이해 > 새로운 관계" 이러한 순서를 통해 '창조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고, 출발점(p.63)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결국 창조를 믿음으로 새로운 관계가 성립되는데,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다.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믿음이다.
창조에 대한 개념 이해를 통해 우리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만물을 온전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에게 돌아갈 때 회복할 수 있고, 구원에 의미가 있습니다.
창조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다가가게 됩니다.
창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온 땅과 하늘의 질서이고, 온 우주의 질서입니다.
시작에서 답을 찾다, 두란노, 조정민, p.57
드디어 안식에 대한 개념이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저자는 안식은 존재의 근원을 기억하는 시간임을 설명(p.93)한다. 안식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해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독특한 해석이기도 한데, 안식을 누리는 것을 쉽게는 편안한 삶, 평안한 상태, 몸과 마음이 즐거움, 이렇게 쉽게 이해하는 편인데, 저자는 안식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안식은 몸과 마음이 편한 상태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질의 안정적인 상태를 향한다. 인간의 본질은 결국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발견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관계이므로, 결국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안식을 누리는 삶’은 하나님과 친근하게 관계하며 나의 본질을 깨닫는 삶이다.
안식은 시간의 분리이며 일에서 사람을 건져 내는 시간입니다.
일에서 잠시 떨어져 일을 시작하신 분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 안에서 일의 의미와 목적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비가시적입니다.
시작에서 답을 찾다, 두란노, 조정민, p.89
3부에 이르러 드디어 죄의 문제에 도달한다. 창조로 시작하여 안식에 이르렀으나 죄가 등장한다. 저자는 죄의 시작과 죄로 인한 결과인 죽음을 설명한다. 죄의 파괴력은 실로 대단해서 저주가 내렸을 뿐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된다. 창조 이후 죽음의 등장은 이 세상을 말할 수 없는 탄식의 상태로 전환시킨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는 반전이 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신다. 죄로 인해 인식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 인간을 부르신다. 그 부르시는 목적은 용서를 위한 목적이고, 용서를 통해 안식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하며 함께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창세기 전반에 서려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기회요 특권입니다.
시작에서 답을 찾다, 두란노, 조정민, p.163
자연스레 죄의 상태에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중요한 화두인 동행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11장의 소제목이 가슴을 찌른다. ‘교회를 다녀도 왜 죄를 이기지 못하나?’ 4부의 소제목으로 너무나 적절하다. 이제까지 창조를 거쳐 안식에 이르고 죄가 등장하고 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긍휼을 경험했으나, 우리는 왜 죄를 이기지 못하는가.
저자는 하나님을 아는 인간이라도 안식하는 삶과 안식하지 못하는 삶은 구분되며 그 차이를 이 장에서 충분히 보여준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알았으나 등을 돌리고 떠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었다. 이러한 행위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도 동일하다.
4부에서 저자의 기술 방법은 ‘대조’다. 하나님을 알거나 모르거나 결국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과의 대조다. 동행 여부에 따라 성경의 인물들의 삶은 극명히 대조된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삶이 동일한 상황에서 어떻게,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갈라지는데, 그 순간에 세상과 다른 무엇을 위해,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며,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양껏 받으면,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시작에서 답을 찾다, 두란노, 조정민,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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