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책은 접할 때마다 조금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얇은 책이라도 한 줄, 한 줄을 읽어갈 때마다 쉽사리 넘어갈 수 없는 생각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의 기본 지식이 그의 의견 개진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같은 생각은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독교’ 시리즈(성서유니온. 5권으로 구성된 기독교 개요 시리즈)와 ‘십자가란 무엇인가’(IVP)는 매우 얇지만, 그 깊이는 무시할 수 없는 책을 접하고 했던 생각이다.
먼저 원서의 제목을 확인했다. 'Through a glass darkly' 무슨 의미일까? 책을 읽기도 전에 제목에서 C.S. 루이스의 느낌이 살짝 났다.(사실 이때만 해도 그와 루이스의 관계를 전혀 몰랐으므로 그가 루이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이 책이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회심기를 다루었다면 루이스 책 '예기치 않은 기쁨'(홍성사)은 루이스의 회심기를 다룬 책이다. 루이스의 회심기는 읽어보아도 명확한 회심의 스토리가 잡히지 않는다. 약간 어렴풋한 느낌만 남을 뿐이다. 그 제목처럼, 그 논리적인 루이스에게 예기치 않았던 기쁨이라니!
이렇게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회심을 다룬 제목을 보며, 비슷한 느낌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흐릿한 창문을 통하여’라니.. 그의 제목에 언급된 표현은 책 여러 곳에 계속 반복된다. 책을 읽고 나서 보니, 이 한 줄이 그의 회심기를 다루는 중요한 키임을 깨닫게 된다. 제목에서 조차도 둘은 닮아있다.
그것은 깊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불빛을 켜서 처음으로 나로 하여금 사물을 분명하게,
아니 밝게 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순간이었다.
다시금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의 문지방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흐릿한 창문 또는 약간 초점이 안 맞는 렌즈를 통해 보는 것처럼
저 너머에 놓인 무언가를 흘끗 목격했던 것이다.
지성적 회심, 알리스터 맥그래스, 생명의말씀사, p.89
책은 1, 2, 3부로 나뉘여 있다. 주로 그의 성장 과정과 신앙과 과학의 사이에서 탐구와 갈등 단계를 오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1, 2부이며, 3부는 신앙을 갖게 된 이후에 자신이 고민하던 신앙의 난제들을 그의 논리로 해석한 것을 풀어주는 내용이다. 그의 성장기와 회심기를 엿보는 기분은 상당히 흥미롭지만 한편으로는 천재의 삶은 역시 범인의 삶과는 다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1, 2부의 내용을 긴장감과 함께 읽어 내려갔다.
루이스와 정말 비슷하게도 그는 10대 초반부터 자신만의 철학을 시작한다. 과학을 위한 철학이 될 수도 있고, 신학을 위한 철학일 수 있겠지만, 그는 어렴풋하게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무한한 존재를 향한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그의 고민이 시작되자, 과연 그가 어느 지점에서 회심의 기미를 보일지 내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진로가 화학자로 나아가는 동안, 과학의 논리 앞에서 신앙이라는 관념은 마르크스주의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과학자로의 진로와 더불어 그의 신앙에 대한 탐구도 병행하여 진행되었는데, 진행될수록 그의 확고한 과학에 대한 철학은 조금씩 그 기초가 흔들려 간다. 특히나 칼 포퍼의 과학철학을 접하면서 그의 과학에 대한 신뢰는 확실히 무너진다.
나는 칼 포퍼에게 시선을 돌려 그의 저술을 긍정적으로 면밀하게 읽었고,
특히 그의 에세이 ‘반증으로서의 과학’과 그의 책 ‘과학적 발견의 논리’가 인상적이었다.
만일 포퍼가 옳다면, 모든 과학 지식이 잠정적이고 추측적이고 가설적이라는
거북한 실재를 받아들이는 법을 나는 배워야 했다.
우리는 우리의 과학 이론들의 결정적인 증거를 결코 제시할 수 없고,
기껏해야 이론들을 (잠정적으로) 확증하거나 (확정적으로) 논박할 수 있을 뿐이다.
지성적 회심, 알리스터 맥그래스, 생명의말씀사, p.70
어린 시절부터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사고를 추구하며 성장했던 그에게 칼 포퍼의 ‘반증 가능성’의 개념은 그의 사고를 뒤흔들었던 개념일 것이다. 그가 언급한 것처럼 과거의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정립되었던 과학 이론들의 등장으로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해 모두 폐기되고 있었다. 결국 모든 과학 이론은 반증 가능성에 의해 현재 기준으로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에 불과해진다. 그리고 언젠가는 폐기될 운명이다.
그런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에서도 이 반증 가능성은 기본적인 방법론 개념으로 자리 잡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왜 더 이상 알리스터 맥그래스와 같은 지성적 회심이 파도처럼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물론 저자가 ‘나처럼 회심하게 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p.208)’라고 한 것처럼 모두가 그처럼 사유하지 않는 까닭이리라 생각해 본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신앙을 실증적으로 증명하고, 반증 가능성이 없는 가설로 받아들이게 되어서 회심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세상과 과학을 넘어 그것들이 존재하는 그 의미는 어느 누구도 밝혀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의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의미는 역시 제목처럼 어두운 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어렴풋하다.
하지만, 그 믿음을 선택하는 순간. 어렴풋한 느낌은 사라지고, 실재를 경험하고, 그 실재를 뚜렷이 볼 수 있게 된다. 루이스의 표현대로 이 순간은 예기치 않은 기쁨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기독교 복음은 다름 아니라 실재를 다시 상상하라는 초대,
보다 폭넓은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라는 초대,
상상력을 발휘해 새로운 형판을 채택하라는 초대,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실재를 뚜렷이 보여줄 망원경을 통해 보라는 초대였다.
지성적 회심, 알리스터 맥그래스, 생명의말씀사, p.97
신앙을 갖게 되면 과학을 버려야 할지에 대한 두려움을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가졌었다. 그가 고백하듯, 우리가 추구하는 실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선이 필요하다. 인간이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은 다른 관점을 보완해 준다. 그도 다른 학자의 말을 빌려 인식론적 다원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앙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과학이 말해주고, 과학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신앙이 말해준다.
이렇게 지성을 기반으로 한 믿음은 그의 신앙을 키워나간다. 한글 책 제목을 '지성적 회심'이라고 정한 것은, 정말 탁월한 결정 같아 보인다. 이 두 단어 말고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의 회심기를 보면서 나의 회심은 어땠었나 하고 시간을 되돌려 보았다. 그와 달리 믿음을 갖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여 신앙을 가졌었다. 오히려 그가 신앙을 갖기 전에 고민했던 내용들이 나에게는 나이가 들면서 고민거리로 다가왔고, 어느 정도 그와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과학을 신앙의 대척점에 있는 것인 양 생각하는 교회 문화는 이러한 사유가 시작되기도 전에 '머리가 커진다'라는 이유로 짓밟아 버린다. 맥그래스의 회심기를 보면서 신앙을 위해 지성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무언가 뜨거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가슴에서도 피어나지만, 머리에서도 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나는 곧 육안이 지닌 한계를 깨달았다. 나는 어렴풋하게 보았으나, 망원경은 내가 더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밤하늘은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더 아름다웠다. 마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만 같았다. 이제까지 늘 존재했지만, 이 순간까지 나에게 명료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 보지 못했던 세계였다.
지성적 회심, 알리스터 맥그래스, 생명의말씀사, p.20
나로서는 과학이론이 우주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이해와 관련이 있지 그 의미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과학이론들은 도덕적으로 또 실존적으로 불가지론적이다.
지성적 회심, 알리스터 맥그래스, 생명의말씀사, p.30
#생명의말씀사 #알리스터맥그래스 #지성적회심 #독서 #과학신앙 #경건서적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