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전에는 이성에 관심이 없었는데 중학교 때 친구의 영향으로 갑자기 화장도 하고 이성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부모로서 걱정이 돼요.”
고등학교에서 담임을 맡으며 부모님들과 상담하다 보면 종종 듣는 말이다. 걱정되는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지금 나이에는 이성에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고, 친구의 영향이라고 단정 짓기도 어렵다.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우리 반에는 두 쌍의 커플이 있었다. 내가 담임을 맡은 2학기에 반장과 상담을 하던 중 혹시 커플이 있느냐 물었더니 슬쩍 귀띔해 주었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알고만 있고 학생들 앞에서는 모르는 척했다. 그 외에도 혹시 1학기 때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들이 있었는지, 혹은 내가 알아야 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지를 물었더니 반장은 여태까지의 임원 경력의 바이브를 내뿜으며 내게 반 친구들에 대한 정보를 적절한 양으로 전달해 주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그 두 쌍의 커플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헤어졌다. 한 커플은 비슷한 자리에 앉아서도 싸한 분위기를 뿜어냈으므로 싸웠나 생각했었는데 결국 헤어졌다고 한다. 나머지 한 커플은 여학생이 내게 고민을 털어놓아서 헤어진 것을 알게 됐다.
두 번째 커플이 헤어진 이유는 남학생이 너무 이기적인 말을 많이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친구의 고민을 이야기하면 자기랑 상관없다느니, 왜 이렇게 반 친구들한테 말을 차갑게 하냐고 하면 내가 너한테만 착하게 얘기하면 되지 왜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친절하게 말을 해야 되냐고 받아치는 태도 때문에 정이 떨어졌다고 한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여학생이 이렇게 고쳐지지 않을 거면 헤어지자고 통보하자 친구들이 헤어지라고 시켰냐면서 오해를 하기 시작했고, 아니라고 말해도 그 내용을 SNS에 써서 자신과 자기 친구들을 저격해서 고민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카톡으로도 서로 공유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자기와 자기 친구들 욕을 너무 많이 해서 그 친구들이 전부 자기에게 욕한 캡쳐본을 보내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다고 했다. 뒤에서 욕하지 말고 앞에서 말하라고 얘기했는데도 계속 자기와 친구들을 저격하고 있다고 너무 기분이 나빠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게 상담을 해 온 것이다.
나는 욕하는 수준의 수위를 확인하고 아이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은 뒤에 담임으로서 어떤 도움을 주길 원하는지 물었다. 그냥 내게 조언을 구하려는 건지, 자신의 상황을 알려 들어주기만을 바라는 건지, 그 친구를 불러서 상담해 주길 원하는 건지, 학폭을 걸고 싶은 건지 확인했다. 아이는 아직 학폭까지 걸고 싶지는 않고 그냥 이런 상황이라 고민이 된다고 하기에 전남친이 아직 이성관계에 대한 배움이 부족한 것 같다고 하며 어떻게 대처할지 조언해 주고 행동이 더 심해지면 내게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자세한 것은 몰라도 첫 번째 커플이 조용히 헤어짐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연애도, 이별도 연습과 경험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었다.
학생이 상담하고 간 이후에 그들이 사귀고 있던 걸 알았던 교무실의 다른 선생님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서 “헤어지면서 싸웠는데 남학생이 뒤에서 욕을 하고 다녀서 여학생이 신경 쓰이나 봐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 뒤로 교무실에서 고등학교 커플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가끔 고등학생들이 서로 사귄다고 하면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가벼운 연애를 할 거라는 둥, 저러다 사고 치면 어쩌냐는 둥, 혹은 성적이 떨어질까 봐 감정소비로 아이가 힘들어할까 봐 등등 어른들의 걱정은 차고 넘친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은 공부할 시기라고 뜯어말릴수록 사랑은 더 거세게 불타오를 것이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 마음에 드는 이성 친구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교제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이 고등학교이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계속 같이 있으니 없던 마음도 생길 판이다. 게다가 요즘은 초등학교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성교제가 이루어지다 보니 학생들 사이에서도 커플 탄생이 예삿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 학생들이 사귄다고 하면 걱정의 시선이 더 많은 것 같다. 어른이든 학생이든 상관없이 사랑 앞에서는 어리석어지는 순간이 있기 마련인데도 말이다.
‘나는 Solo’라는 프로그램에서 ‘모태솔로 편’을 본 적이 있다. 제대로 이성을 사귀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었음에도 연애하는 방법을 모르는 듯했다. 상대 앞에서 이성적인 매력을 어필하기는커녕 눈물을 흘리며 고민 상담만 한다든지, 상대를 제대로 배려하지 못해 점수를 잃는다든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그저 편지를 상대 뒤에 ‘툭’ 떨어뜨리거나 “너무 좋아서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라고 해도 가겠다.”라고 표현하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경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어려서 사랑에 서툰 것이 아니다. 안 해봐서 서툰 거지. 이성적인 관계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른이 이성을 사귈 때 생기는 문제는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으므로 친구들과의 우정과는 다른 이성 관계의 시작은 늘 배움을 전제로 한다.
연애는 의사소통과 공감, 타협, 갈등 해결 등의 사회적 기술을 습득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가 된다. 어른들이 말하는 ‘감정소비’는 감정 관리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 된다. 누군가가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자존감을 높일 수도 있다. 또 연애를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탐색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이는 자아정체성 형성에도 기여하는 중요한 일이다. 물론 친구관계에서도 이런 것들이 가능하지만 연애는 친구보다 더 밀도 있게 형성되는 관계이므로 그만큼 더 빠른 시간 안에 진지한 사유가 가능하다. 그러기에 심리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큰 기회가 되는 것이다.
내 첫 번째 연애는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의 연애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자다가도 이불을 차 던진다. 하지만 흑역사는 언제나 필요한 법. 연애예찬론자인 나는 그 뒤로도 관계를 배워나가기 위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고 내 연애 스타일을 파악한 뒤 나름 나랑 맞는 연애 상대를 알아보는 눈을 기르게 됐다.
그러니 학생들의 연애를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연애가 웬 말이냐고? 그럼 한창 취업준비할 나이인 20대에 연애는 웬 말이며 한창 돈 모아서 안정을 추구해야 할 나이에 연애가 웬 말인가. 결혼에 실패한 사람, 가난한 사람, 나이 든 사람.. 연애를 하면 안 되는 환경 같은 건 없다. 상황 때문에 연애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연애하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연애를 하고 있는 자녀가 있다면 걱정부터 하지 말고 자녀가 이만큼 성장했고,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면 좋겠다. 자녀와 터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부모 자식이 가까워지는 놀라운 경험까지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여태까지 내가 보았던 학생들의 연애는 그들이 성장하는 경험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음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그 과정 속에서의 행복과 아픔, 희열과 실망, 길 옆의 작은 풀마저도 아름답게 보였던 순간들. 그 모든 감정과 장면들이 그들에게 하나도 버릴 수 없는 마음의 양분이 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