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하는 마음에 대하여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아무 의미 없이 법칙에 따라 그냥 도는 것뿐이다. (김상욱, 떨림과 울림)
내게 없는 것이 더 크고 좋아 보일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여유로운 마음이 그렇다. 가지고 싶어 조바심을 낼수록 여유는 멀어진다. 가끔은 나도 꽤 여유로운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진짜’를 만나고 나면 순식간에 알아챌 수가 있다. 나는 한참 멀었음을. 가볍기 그지없는 나의 마음이 누군가의 작은 입김에도 이리저리 불안스럽게 날아다닐 때, 여유를 가진 사람들은 마치 마음 한가운데에 무거운 모래주머니가 있는 것처럼 그 자리에 딱 멈춰 있다. 입김은커녕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는 것이다.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했던가? 나도 덩달아 여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며 일부러 그런 사람들 옆에 얼쩡거려도 보았지만 오히려 대비감만 극명해졌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를 탐낸 일은 살면서 별로 없었으나, 출처 모를 그 묵직한 여유를 가진 사람만큼은 항상 부러웠다.
관심이 있는 것에는 저절로 눈길이 간다. 신발을 사려고 마음먹었을 때 사람들이 신고 있는 신발만 유심히 보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여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사람이기 때문에 여유로운 사람들을 곧잘 발견하고 관찰한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듯이, 이제는 나도 겉으로만 여유로운 척 꾸며내는 건 어느 정도 도가 텄다. 뭐든지 꾸며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용히 눈을 맞추고, 따뜻한 미소를 더 자주 짓고… 그러나 진짜 여유는 일상 곳곳의 사소한 습관에서 무심코 튀어나오는 것에 가깝다. 바쁜 출근길에도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고, 주변 이들의 실수를 너그러이 눈감아주고, 일희일비하는 일 없이 스스로의 일상을 친절하고 성실하게 돌보는 것. 쉬워 보이지만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눈 뜨고 자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여유가 없으면 남들과 스스로 모두에게 친절해질 수 없다.
나는 일희일비의 아이콘이다. 일희일비가 형체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바로 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변화가 크지 않을 뿐 마음속에는 항상 거친 파도가 철석거리고 있다. 사실은 그게 싫은 것만은 아니다.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내가 이루어낸 거의 모든 성과는 바로 그 전전긍긍하는 태도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잘 써진 문장 한 줄, 유난히 맘에 드는 옷, 지나가는 누군가의 칭찬 한 마디가 내 하루를 살렸고, 거기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가 또다시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사람을 자기가 못 가진 것을 일생동안 탐하다가 결국 가지지 못하고 죽는 존재라고 정의한다면, 아마 나는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는 여유롭지 못한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아무 의미 없이 법칙에 따라 그냥 도는 것뿐이다. 우주에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심오한 의미는 없다고, 과학자 김상욱은 말한다. 그의 문장이 가슴을 쳤다. 그래, 내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런 태도였구나! 모든 것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조용히 관조하는 것. 나는 눈의 양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앞으로만 내달리며, 어쩜 그리 작은 것에 집착하며 살고 있는지… 그렇게 책 속 문장 한 줄에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며 일희일비하다가 책을 덮는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바로 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은 진작에 평화로워졌어야 했다.
나는 오늘도 가득 찬 그릇을 안고 뛰어다니는 심정으로 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그릇 안에 무엇이 든 건지는 나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고, 그게 반드시 지켜야 할 정도로 소중한 건지 확신도 없지만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 조심하고 경계하면서. 여유라고는 하나도 없는 태도로 말이다. 그러나 일단 깨달음을 얻었으니 실천하는 시늉이라도 해 보기로 한다. 당분간의 목표는 그릇을 반 정도만 비워내는 일이다. 좀 더 가벼워진 그릇의 무게를 느끼면 비로소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새로운 것들로 그릇을 다시 가득 채울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냥 반 정도만 차 있는 채로 유지하는 쪽이 더 좋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그들의 좋은 점을 배우려면 나를 어느 정도는 비워둘 필요가 있으니까. 이미 가득 찬 그릇은 그 어떤 새로운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누군가 말해 주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도 나처럼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 찬 그릇을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분을 느껴 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