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예전보다 월등히 좋은 키보드를 사용해 타이핑한 글이다. 그렇다면 예전보다 글이 좋아졌나?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글을 쓰고 싶어'지기는 했다.
모든 건 장비발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둘 중 어느 말이 맞는지는 때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미대에 가기 위해 입시미술을 할 때는 후자 쪽이었다. 비싼 물감이 더 좋아 보이긴 했지만 그걸 사서 쓸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에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며 합리화를 했다. 비싼 물감을 사서 썼다 해도 돈값은 못 했을 거다. 당시의 미대 입시는 한 번의 시험을 위해 수천 장의 종이를 버려 가며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버리는 그림에 비싼 물감을 쓸 만큼의 정신적, 물질적 여유가 당시 내게는 없었다. 엊그제 회사 동료와 점심을 먹으며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큰맘 먹고 산 명품 가방이 상할까 봐 쇼핑백 안에 넣고 지하철을 탔다고, 가방은 진작에 본질을 잃었다는 자조적인 농담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물건이라 감당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소유하지 않는 편이 낫다.
장비발을 세우는 게 어느 정도 통하는 분야도 있는데 바로 전자기기다. 컴퓨터의 성능이 일의 능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당연한 사실을 사무직 N년차에 뒤늦게 깨달았다. 벽돌만큼 두꺼운 데다 켜지는 데만 5분 이상이 걸리고 모든 입력에 0.2초의 딜레이가 있었던, 신입사원 시절 사용했던 노트북과 이별하고 나서 확실히 일을 더 잘하게 되었다.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도구는 2019년에 구매한 아이패드와 블루투스 키보드다. 아이패드의 성능은 만족스럽지만 (내가 결제한 금액을 생각하면 만족해야만 한다) 블루투스 키보드는 묘하게 손에 붙지 않아 마음에 안 들었다. 키보드가 거슬려 글을 쓰다가도 멈추기를 수십 번이었으나 매번 '내가 뭐 대단한 글 쓴다고…' 하는 결론에 부딪치며 꾸역꾸역 사용해 오기를 4년째. 마침 생일선물로 필요한 걸 사 주겠다는 친구의 물음에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기계식 키보드'라고 대답했다. 알고 보니 키보드의 세계도 캠핑 장비, 음향 장비의 세계 못지않게 광활하고 깊은 분야여서 고르는 데 애를 먹었지만, 며칠 뒤 택배로 도착한 매끈한 새 키보드는 돈값을 톡톡히 하는 중이다.
이것은 예전보다 월등히 좋은 키보드를 사용해 타이핑한 글이다. 그렇다면 예전보다 글이 좋아졌나?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글을 쓰고 싶어'지기는 했다. 일단 키보드의 가격을 생각하면 뭐라도 쓰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렁찬 소리 덕분에 타이핑은 더 신명 나는 일이 되었다. 무아지경으로 타이핑을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면 새삼스럽게 기분이 좋아진다. 와, 나 지금 글을 쓰고 있네? 주인공의 직업이 작가였던 한 영화에서 이런 장면 본 것 같은데! 찰나였지만 장래희망이 학교 선생님이었던 시절이 스쳐 지나간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칠판에 분필로 글씨 쓰는 게 좋아서였다. 나는 그냥 장비가 주는 쾌감에 집착하는 성향으로 태어난 게 아닌가 싶다. 덧붙이자면 요즘은 교실에서 분필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중학교 교사로 일하는 친구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살짝 서운해졌다. 시대의 변화를 마주하고 씁쓸해진 마음을 신명 나는 타이핑으로 달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