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글 쓴다는 핑계

by 바삭

글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산책을 좋아한다. 정확하게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라 걷기를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 많은 사람들은 좀 걸을 필요가 있다. 방구석에서는 한없이 커 보였던 걱정의 괴물도 한낮 햇빛 아래에선 작게 쪼그라들기 때문이다. 괴물 그림자가 사라진 머릿속은 한결 가뿐해진다. 뽀송뽀송 향기 나는 생각들을 차곡차곡 접어 넣을 준비가 되었다.


글감은 모니터 앞이 아닌 길 위에서 자주 떠오른다. 몇 번은 퇴근길에 아주 신기한 경험을 했다. 마치 오락실 게임 캐릭터가 동전 그래픽을 밟고 지나가면 효과음이 나듯이, 집 근처 '그 골목'의 '그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예외 없이 이야깃거리가 떠올랐던 것이다. 갑자기 멈춰 서서 휴대폰 메모장에 문장을 휘갈겨 쓰는 나를 누군가 봤다면, 길에서 앞은 안 보고 핸드폰만 보는 딱한 젊은이 정도로 여겼을 수도 있겠다.


하필 그곳이 나의 영감 버튼이 된 이유를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으나 명쾌한 결론을 내지 못하였고, 다만 확실한 것은 지겨울 만큼 익숙한 장소에서 글감이 더 잘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멋지고 새로운 곳에서는 머릿속 모든 감정 세포가 한 데 모여 '멋지다⋯'라는 생각 말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까, 영감 같은 게 끼어들 틈이 없다. 내가 여행 도중에 여행기 쓰는 걸 지독하게 못 하는 이유다. 감정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간 뒤 익숙한 장소에 화분처럼 처박힌 뒤에야 비로소 그 감정을 글로 정리해 낼 수 있다. 모종의 우주적 힘으로 인해 여러 생각들이 소화되는 익숙함의 교차점이 바로 '그 골목'의 '그 가게' 앞이 되었다는 가설을 세워 본다.


이렇게 엄청난 인내심을 거쳐 나온 글감치곤 내가 초점을 맞추는 대상들은 어째 좀 사소하다. 반짝이는 에펠탑이 아니라 좁고 냄새나는 지하철에서 휘청이는 날 잡아준 아주머니의 미소에 대해서 쓰고,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가 아니라 아무도 없는 변두리 미술관 옥상에서 바라본 별들에 대해 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세상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


신입사원 시절엔 말하는 아이디어마다 너무 마이너 하다는 피드백을 종종 받았다. 심지어는 '인디 밴드 느낌'이라는 피드백도 있었는데(이 말은 '참신하지만 임원 보고는 통과 못할 것 같다'라는 뜻이다), 당시엔 가슴 아프지만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회사는 큰 규모의 비즈니스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남들한테 인기 있는 것에 내 안목을 맞추는 게 맞았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취향을 고쳐 나가다가도 가끔 초라해졌다. 세상 사람들은 나처럼 길가의 풀꽃 하나를 보느라 멈춰서는 일 없이 쭉쭉 달려 나가는데, 나만 사소한 것들에 자꾸 마음이 붙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작년에 책을 한 권 낸 뒤로 가장 먼저 사라진 증상이 바로 이 '메이저가 되고 싶어' 병이다(또 다른 완치 목록으로는 '내가 또 쓸데없는 짓을' 병과 '이럴 시간에 주식투자를' 병 등등이 있다). 어차피 회사에선 못 하니,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엄청나게 사소한 것들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마음을 붙들어 두었다. 작은 반짝임을 오래 곱씹은 뒤 별자리처럼 점을 이어 문장을 지었다. 너무 공감되어서 밑줄 치며 읽었다는 독자님의 한 마디는 이 섬에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구조 헬리콥터였다. '그래, 마이너면 어떠하고 메이저면 어떠하리. 중요한 건 거짓 없이 살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다⋯.' 중얼거리며 센치한 마음으로 잠들곤 했다. 작고 평범한 것들의 힘을 믿는 이 사람들은 다 어디 숨어 있었을까. 글로써 그들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아니고 부장님 책상에 사직서를 내던질 만큼 부와 명예를 얻은 것도 아니지만, 작가님이라는 낯선 호칭에 적어도 경기를 일으키진 않는 지금은 '글감'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작은 것들에 대해 마음껏 생각할 수 있어 행복하다. 어차피 거대한 부귀영화를 좇는 삶도 아닌데, 쓸데없는 것에 마음이 뺏겨 도착이 늦어진다 해도 걸음걸음 기쁨을 누리고 나누었다면 괜찮은 거 아닐까. 숲을 보는 독수리가 있다면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을 보는 애벌레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거제의 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