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톨레도는 방어에 최적화된 완성도 높은 요새 도시이다. 굽이치는 강으로 둘러싸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좋으면서도, 연노랑의 건축물로 둘러싸인 큰 언덕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처럼 보였다. 스페인의 현 수도인 마드리드가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면, 톨레도는 아시아에서 경험하지 못한 독특하고도 이국적인 경관을 보여줬다. 여행객으로서 만족도가 높은 도시였다. 낯선 나라의 지방에서 겪을 수 있는 불편함은 물론 있었지만, 그것조차 즐겁게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톨레도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쯤이었다. 나는 톨레도의 메인 도시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는데, 그곳 할아버지가 영어를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나 역시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 체크인을 하는데 약간의 고생을 해야 했다. 숙소에 도착한 뒤 연락을 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20-30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문을 열어주신 할아버지는 에어비앤비 앱 프로필에 있던 젊은 여자 호스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와 손녀였을까, 추측을 해본다.
할아버지는 시종 거친 기침을 하며 가래 끓는 소리를 내었기 때문에 조금 으스스한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그는 아픈 와중에 4층의 높은 층계를 오르며 나에게 방을 안내해 주었고, 화장실과 부엌이 어디에 있는지, 혹시 난처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맛있는 음식점이나 버스정류장이 나오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문제는 이 모든 설명이 스페인어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내가 잘 알아듣는지 찬찬히 뜯어보는 느낌이었는데,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그의 흐릿한 눈을 마주 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조금 서늘했지만 조용한 편이었고, 호스트가 내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설명해 줬다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잠시 짐을 풀고 여독을 풀다가, 그가 추천해 준 음식점을 찾아갔다.
그곳은 식사하기보다는 동네 술 좋아하는 아저씨들이 모여 회포를 푸는 장소 같았다. 벽면에 붙은 큰 TV에서는 축구 방송이 한창이었다. TV를 둘러싼 바 자리에는 덩치가 거대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40대 전후의 아저씨들이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는데, 그들은 한창 취한 것처럼 보였다. 젊은 남자가 바 안쪽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서빙을 하고 계산을 하고 있었다. 문으로 이어진 부엌에서는 요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의 반대편에는 4인석 자리가 하나 있었고 어린 남자아이와 부모로 보이는 두 명의 어른이 앉아 있었다. 내가 음식점에 들어오자 시끄럽게 대화하던 사람들이 말을 잠시 멈추고 나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뭔가 쑥스러운 느낌이 들어 모자를 눌러쓰고 기둥 옆에 붙은 2인석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를 주문하기 위해서는 바 쪽으로 가야 했는데 시끌벅적 고함을 지르는 네 명의 아저씨가 좀 무서웠고, 나는 약간 쫄아버린 얼굴로 젊은 남자 직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캔 유 스픽 잉글리시, 하는 질문에 노라고 대답을 했고 서로 난감한 표정을 주고받다가 그가 주는 영문 메뉴판에 써져 있는 글씨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런 내가 재밌어 보이는지 아저씨들은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웃는 모습이 한국 아저씨들과 비슷한데, 갑자기 친근감이 들어버린 나는 아저씨들에게 슬쩍 물어봤다. 메뉴를 하나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그들 중 한 명은 영어를 할 수 있었고, 고기가 든 음식 하나를 추천해 줬다. 이곳에서 이 음식이 베스트라고 생각한 댔다. 내가 갑자기 말을 건 것에 놀라고 재밌었는지 아저씨들은 또 한 번 호탕하게 웃었고, 나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기에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내친김에 맥주도 하나 추천받아 자리에 앉았다.
사실 유일하게 영어를 쓸 줄 아는 아저씨는 다소 샤이한 성격이었던 것인지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스페인어만 쓸 줄 아는 아저씨들이 뭔가 재미있다는 것처럼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스페인어였으니 나는 맹한 표정으로 벙글 바보 같은 웃음만 지었을 뿐이었으나, 그 표정만으로도 아저씨는 꽤나 만족한 듯 내 빙글한 웃음에 호탕하게 껄껄거리며 화답해 주었다. 조용한 식사를 예상했던 밤은 시끌벅적했다. 맥주를 홀짝거리며 지난 여행과 앞으로 있을 여행들을 생각해 보았다. 고기는 짜고 질겨서 내 입맛에 잘 맞지 않았다.
음식을 다 먹고 계산을 하러 바 자리로 갔고, 남자 직원이 살짝 웃음을 지었다. 표정을 보니 호탕한 아저씨들 사이에서 고생했어, 비슷한 말을 표정으로 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따라서 살짝 웃음을 지었고, 주머니에서 꼬깃한 지폐를 꺼냈다. 돈을 꺼내는 중에 예의 옆에 있던 아저씨들이 맛있었니, 물으며 엄지 척을 하길래 나도 덩달아 엄지 척을 하다 손에 있던 지폐를 놓쳤고, 바람을 타고 날아가던 지폐는 따봉 아저씨의 무릎에 툭하고 떨어졌다. 웁? 하고 아저씨가 말했다. 그 순간,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던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빵 하고 웃기에 나도 따라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뭔가 창피하고도 웃긴 이상한 기분에 후다닥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왔다. 내가 나오고서도 식당에서는 끊기지 않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그 웃음은 호감이 섞인 웃음이었기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적적한 여행에 일어나는 이런 에피소드는 환영이다.
다시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역시 직원의 추천을 받아 와인 한 병을 샀다. 미리 챙겨 온 와인 따개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마시는데 금방 취했다. 알딸딸하고 노곤한 기분에 어두워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타지에서의 하루가 또 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새소리가 요란했다. 하늘은 깨끗했고, 길거리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호스트가 알려준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 잠시 시간을 보냈다. 곧이어 나를 태울 버스가 왔고, 나는 톨레도 근처의 적당한 지역에 내려 요새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나름대로 일렀는데도 홀로 혹은 둘이 온 여행자들이 배낭을 메고 언덕을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계속 오르막길이었지만, 경사는 완만했고, 가는 길 내내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힘들다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았다. 가장 높은 곳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르고 톨레도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무척 조용하고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