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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 Oct 01. 2024

마드리드 벼룩시장

매주 일요일마다 열리는, 엄청난 스케일의 엘 라스트로 시장

실수를 한 탓에 다음 지역으로 떠나는 기차도 줄줄이 놓치고, 숙소비까지 날리게 된 나는 지쳐버렸다. 겨우 새로운 숙소를 찾아 까무룩 잠들고는 아침에야 눈을 떴다. 그제야 피로가 조금 회복되었고, 기분도 더 나아졌다. 마드리드에 무슨 인연이 있는지, 참 오래도 머무는구나 싶었다. 홀로 해외여행을 나온 것도 처음이었고, 유럽 여행은 더더욱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번 사건에 겁을 먹은 터였다. '오늘은 바쁘게 돌아다니지 말고 숙소에서 쉬자. 날씨가 좋으니 빨래나 하자.'하고 코인 세탁소를 검색한 뒤, 숙소를 나섰다.


그런데 한산하던 평소와 다르게 마드리드의 길거리가 시끌시끌했다. 온통 사람들이 가득했고, 길거리에는 벼룩시장이 한창이었다. 여러 노포가 어깨를 부대며 만들어낸 길은 어림잡아 삼십 분은 걸어야 끝이 보일 정도로 길었다. 각각의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도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국적인 물건들이었다. 푹 눌러쓴 모자에 추레한 여분옷을 입은, 빨랫거리를 손에 가득 든 한국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길을 구경하며 세탁소로 걸어갔다. 마드리드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장이 선다고 한다. 오후 3시에 끝나는 짧은 일정이지만, 그때까지 온 거리는 약간의 축제 분위기를 띠고 엄청난 프로모션 가격으로 세컨핸드 제품들을 판다. 


그렇게 큰 벼룩시장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눈앞의 광경이 신기하기도 했고, 저렴하게 좋은 물건을 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래를 세탁소에 맡겨놓고 거리로 나와 천천히 물건들을 구경했다. 가죽으로 만든 가방, 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자수정 목걸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두르는 천들을 구경했다. 오랜 여행에 짐이 되지 않으면서 자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단벌신사였던 나는 추위로부터 나를 막아줄 빅사이즈 셔츠를 한화 3,000원 정도에 구매했고, 푸른 터키빛의 은 귀걸이를 한화 15,000원에 구매했다. 


곳곳에서 열리는 작은 공연들도 볼만했다. 청년 대여섯이 모여 기타를 치면서 정열적이고 신나는 리듬의 스페인 풍으로 보이는 노래들을 부르자, 주변 사람들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둘러쌌다. 리더로 보이는 청년은 두툼한 뱃살에 북슬북슬한 턱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공연을 진정으로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좌우로 왔다 갔다 하고 춤을 추기도 하며 관중을 휘어잡았다. 그 장면이 너무도 신나고 신기해서 나는 절로 웃으며 손뼉을 쳤다. 이외에도 흑인들이 전통 악기들을 두드리며 음이라기보다는 구호처럼 들리는 노래를 불렀다. 


오후 세시가 되자 곳곳에서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어떤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물건을 구경하던 나에게 상점 직원들이 폐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벼룩시장이 열리는 줄도 몰랐다가 어리둥절한 감정으로 길거리를 구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그 넓은 거리가 깨끗하게 정리되는 장면에 한번 더 어리둥절했다. 아쉬운 마음에 옆가게 아저씨에게 이번 벼룩시장이 이벤트성이었는지 묻자, 이곳에서 매주 장터가 열린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정기적인 벼룩시장이 이렇게 크다니, 스케일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전날에는 형편없는 기분으로 잠들었지만, 이날은 뜻밖의 행운에 즐거워했다. 여행은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기에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틀간의 해프닝은 나에게 꼭 필요했던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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