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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 Oct 01. 2024

노숙 위기

큰일 났다. 기차를 놓쳤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낸 후, 다음 지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약 일주일간의 숙소와 기차표를 모두 예매해 둔 터라, 몸만 움직이면 되었다. 모바일 티겟을 확인하고 기차를 타기 위한 지하철역을 확인했다. 내 숙소 근처의 지하철 역을 찾았고, 몇 호선을 타고 어디로 가면 되는지 체크했다. 나는 타고난 길치였기 때문에, 혹시나 잘못된 방향의 지하철을 찾을까 걱정이 되었고, 옆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다른 승객의 도움을 받아 가는 길을 다시 체크했다.


그러나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나는 지하철을 반대로 타고 말았다. 기차역에 도착할 시점에는 이미 차가 떠날 시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기차표를 찾기 위해 애플리케이션을 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날의 기차표는 모조리 매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날 기차표는 터무니없이 비쌌다. 유럽을 여행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곳은 차표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수요에 따라 가격이 유동적으로 변한다. 이 값이면 비행기를 타도 되겠는데, 싶어서 어쩔 수 없이 구해둔 숙소와 기차표를 취소하고 마드리드에 더 머물기로 했다.


나는 숙소와 기차표를 예약한 홈페이지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하고 환불을 요청했다. 고객센터의 상담원들은 한국인들과 다르게 매우 느긋한 편이었는데, 전화를 하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 했고 무언가 확인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10분씩 대기하고는 다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일이 반복되었다. 숙소는 결국 환불받지 못했지만, 기차표는 환불 대신 다음 예약 시 30% 할인을 받는 바우처를 받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는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왔고 이미 시간은 저녁이 다 되었는데, 예약할 수 있는 방이 남지 않았다. 나는 환불건으로 고객센터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내야 했으며, 다음 일정이 틀어진 것, 그리고 추가 비용을 내야 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는데, 그래서 지하철에 평소보다 사람이 많다든지, 다들 무언가에 흥분해 있다든지 하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예약할 수 있는 방이 없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기차를 놓친 그날부터 며칠간 마드리드에는 큰 페스티벌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방값은 평소보다 세배는 높았고, 그마저도 예약을 수락해 주는 곳이 없었다. 아직 지하철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잔뜩 겁을 먹었다. 유럽은 지하철이 주요 우범 지역이라, 물건을 훔쳐가거나 나쁜 짓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기차를 놓치고, 숙소를 놓치고, 다음 숙소를 찾아보며 강도를 당하지 않을까 불안해했던 시간은 나에게 끔찍한 경험이었다.


다행히, 한참만에 내 위치에서 멀고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가격대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을 수 있었다. 안도감이 들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종일 들고 다닌 배낭이 내 몸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너무 피곤했다. 눈먼 돈을 날리게 된 것도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지쳤는데도, 숙소에 가기 위해 마지막 힘을 쥐어짜야 한다는 사실이 비루하게만 느껴졌다. '괜찮아. 숙소에 들어가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스스로를 위로했다. 여행이 언제나 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때때로 어쩔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그럴 때 조금 여유롭게 가져온 돈은 이런 위기로부터 나를 구해준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치트키쯤은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의 지도를 열었다. 


미처 가지 못한 세고비아와 론다가 아쉽게 느껴진다. 계획대로 움직이는 사람의 인생에도 단점은 있다. 줄줄이 세워진 계획, 줄줄이 해놓은 숙소와 기차 예약을 모조리 취소해야 하는 기회비용이 크기도 하고,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순발력이 떨어지고, 계획이 어그러졌을 때 머릿속도 함께 어그러지며 금방 회복하지 못하는 점이 그렇다. 글을 쓰는 지금도 가지 못한 두 지역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여러모로 아쉬운 기억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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