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병아리가 태어났다. 백봉 암탉은 야생성이 강해 포란을 열심히 한다고 듣긴 했는데, 파워뱅크도 꺼지는 겨울을 뚫고 병아리가 태어날 줄은 몰랐다. 백봉의 흰 배 아래서 머리를 내민 병아리는 검은색이었다. 턱 밑만 하얀 모습이 얼핏 아델리 펭귄 같았다. 둥지 위에선 병아리와 꼭 닮은 검정 청계가 병아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래 암탉은 각자 둥지를 틀고 정해진 장소에서 알을 낳고 품었다. 검은 병아리를 품은 백봉은 제 둥지가 아닌 검은 청계 둥지 안에 있었다. 그러니까 제 알이 아닌 청계알을 품었다. 어쩐지 둥지와 알을 뺏긴 청계가 백봉 몸을 밀쳐내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청계는 아직 알을 품을 마음이 없어서 백봉에게 알을 맡겼다. 알 입장에선 덕분에 태어날 기회를 얻었고, 청계는 제 유전자를 남겼고, 백봉은 원하던 대로 포란하고 부화에 성공했다.
두 달 전 흰 병아리 두 마리를 낳은 암탉도 제 알이 아닌 남의 알을 품었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장난스레 솟은 병아리 모두 제 어미와 달랐다. 모습은 똑같은 흰색인데 다른 백봉 어미와 쏙 닮았다. 예상으론 검은 병아리를 낳은 암탉네 새끼였다. 병아리와 어미가 어쩌다 마주쳤지만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생김새나 유전자보다 각인이 앞서는 듯했다. 어릴 적 엄마에게 들었던 농담이 떠올랐다.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거짓인 걸 알면서도 눈물을 뚝뚝 흘렸고, 엄마가 짓궂은 표정으로 얼굴을 닦아줬다. 엄마는 농담이라 했지만 이후 거리로 나설 때마다 부모님과 안 닮았다는 주변 평들이 농담이 아닌 진실일 수 있다는 의혹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때 불안했던가, 고민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혈육은 같은 농담에 "그럼 다리에 데려다줘봐요"라고 답했단다. 여러 방식으로 출산이 가능해진 현대에는 먹히지 않을 농담이었다. 어쨌든 지금이라면 각인된 어미를 따르는 게 내게는 잘 맞으니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겼을 테다. 본래 가족이란 유연한 개념으로 얼굴도 모르던 타인이 가족이 되기도 하고, 얼굴은 같지만 타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혈육이란 무엇인가를 종종 생각한다. 주변에서 '결국 남는 건 혈육'이라지만, 그 말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궁금하다. 오히려 혈육이 가족이라는 인식은 때로 덫이 된다. 대체 가족이란 무엇일까, 너무 복잡하게 고민한 건 아닐까, 흰 암탉 속 검은 병아리를 보며 생각했다.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기온에 병아리와 암탉을 집으로 데려왔다. 한 마리씩 부화하여 네 마리가 되었다. 암탉도 육아 방식이 다양해서 빨간 벼슬 백봉은 병아리보다 자신이 먼저 밥을 먹었다. 좀 거칠게 키우는 듯했지만 어쨌든 잘 자라고 있다. 오히려 백봉보다 날개가 큰 청계라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어미 등으로 날아올랐다. 터프한 어미와 잘 어울리는 튼튼한 병아리였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뺙뺙 울기 시작한 병아리를 닭이 제 속에 품었다. 따뜻해지면 병아리가 울음을 그치고 잠들었다. 어미 벼슬을 물고 장난치다 부리를 쪼았다. 암탉과 병아리는 서로의 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까 짧은 머리로 생각하기에 흰 암탉 아래에는 검은 병아리가 있고, 저 검은 병아리가 언젠가 흰 알을 낳을 수도, 검은 청계가 백봉 알을 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 품어본 적도 낳아본 적도 없지만 어쨌든 세상에는 수많은 방식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