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담마코리아에 갔던 날은 무려 3년 전. 당시 이래저래 마음이 좋지 못하던 시기에 엄마가 명상을 권했었다.
나는 그때 종교에 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리숙한 마음에 나는 내가 이 세상 최고인 줄만 알았더랬지. 여하튼 명상은 그 시절 나에게 괜찮은 자기 수련 방법이었던 것 같았고, (스스로를 스스로가 단련한다는 의미에서) 엄마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 후 12일의 위빳사나 수련을 떠났다.
그곳에서의 대략적인 생활은
새벽 4-5시쯤 기상해 방에서 자율 명상을 하고,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강당에 모여 점심 전까지 함께 명상을 하고, 점심을 먹고, 1시간의 쉬는 시간을 가진 뒤 다시 저녁시간 전까지 명상을 한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법문 시간이 있고, 9시쯤이 되면 잠자리에 든다.
식사는 모두 비건식이고, 어떤 누구와도 말 한마디 섞을 수 없다. 노래를 듣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완전한 고립. 정말 자기 자신과 온전히 보내는 시간이랄까..
어찌어찌 12일을 버텨내고
나는 다시 평소와 같은 생활을 살아갔다.
여전히 내 입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한없이 떠들어댔고, 또 후회하고, 그날의 나와 마주할 자신이 없어 또 취하고, 다른 대화들을 나누고, 또 후회하고.
덮어두기의 무한 반복. 해소의 방법은 없었다.
그럼 그렇지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나 고작 12일로!
그래도 지난 3년간 엄마 덕분에 외부에서 진행하는 명상 프로그램이라던가, 주역 수업 같은 것들을 들어왔고, 나이가 좀 들었던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조금은 성장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꼭 필요한 말만...
그동안 정신없는 날들을 보냈고, 딱히 큰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과도 나름의 타협을 봤고, 꽤나 만족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쌓아왔던 내가 슬슬 무너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말들에 예민해지고, 그 말들을 방어하기 위한 듯 분노와 자기 연민은 커져갔으며, 그 자기 연민을 핑계 삼아 받은 위로 뒤에 숨어버렸다.
결국 나는 또 도망가기로 결정했다.
언제나 그렇듯 시작은 술과 사람.
그다음은 여행.
하지만 알다시피 이 방법들은 그저 일시적일 뿐,
오히려 도망치기 위해 흐트러놓은 내 방이
다시 돌아온 나를 마중할 때 느껴지는 마음은
떠나기 전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렇게 궁지에 몰려 버렸을 때 날아온 카톡,
담마 코리아에서 정원 가꾸기 봉사자를 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봉사하는 기간은 내 맘대로 정할 수 있고,
하루 종일 명상만 하는 것도 아니고, 정원 가꾸기도 함께 한다니, 꽤 해볼 만하게 느껴졌다.
아니 일단 정원 가꾸기라는 말이 굉장히 우아한 취미처럼 들렸다.
혹시 힘들지도 모르니 5일 정도로 신청을 해놓고
담마로 도망치는 날만 기다렸다.
3년 전의 괴로웠던 자기 성찰의 시간은 다 잊어버리고...
주방 뒤편에 있던 화분들
어쨌든 나는 담마로 돌아왔고,
그곳을 향하는 길은 약간의 설렘과 평화. 버스 안의 멀미마저 기분이 좋았다.
벚꽃이 다 진 후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과 조금은 뜨거워진 햇빛. 인기척도, 강아지 짖는 소리도 없는 마을.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지.
나는 그곳에 다른 봉사자들보다 하루정도 늦게 갔기에
캐리어를 이고 이미 단체 명상이 진행되고 있는 홀을 조용히 지나 오피스로 향했다.
꽤 많이 바뀌어있는 (전보다 활기 있어진) 담마 홀과
먼저 도착한 봉사자들이 정원에 펼쳐놓은 흔적들,
흙과 땀에 잔뜩 절은 목장갑 이라던가, 수레 가득 차있는 돌덩이와 잡초 같은 것들이 아늑히 나를 반기고 있었다.
최소한의 것만 갖춘 방
3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방을 둘러보고,
나의 짐을 그곳에 채우고, 얼른 정원으로 나갔다.
행복과 기대감에 고조된 상태의 나는 허겁지겁 일을 도왔고,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그 일에 다 쏟아붓고 있는 중이었다.
한창 일을 하다 둘러보니
다들 설렁설렁 일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은 억울한 마음과 괜스레 내가 대단해져 버린 듯한 마음이 함께 울렁울렁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더 열을 내기 시작했고, 조금은 신경질적이 되어버린 듯 땅을 마구 헤집고 있었을 때 다른 봉사자분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할 일이 많으니 지치지 않게 쉬엄쉬엄 하라고.
나는 대충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속으로는 콧방귀를 뀌었다. 나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라고.
그렇게 다음날이 되고, 나는 전날과 같은 속도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날씨는 전날보다 더 습해졌고, 햇빛은 더 강하게 내리쬐었다.
나를 설레게 했던 노란 수레
얼굴은 점점 발갛게 달아오르고, 옷은 땀으로 젖어가고,
장화 속은 후끈한 공기와 작은 돌덩이들로 가득 찼다.
점점 이 일이 벅차 오는 게 느껴졌지만, 어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 패기를 포기할 수는 없기에 (사실 아무도 관심 없어했을 수도) 꾸역꾸역 놓아버리고 싶은 맘을 참아가며 묵묵히 아스팔트 옆에 새싹을 심었다.
그렇게 울며 겨자먹기로 맡은 일을 하고 있던 와중 한 봉사자분이 지속적으로 말을 걸어오셨고, 결국 나는 뻥 터져버려 시뻘건 얼굴로 내가 내보일 수 있는 한의 최대한 우악스럽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그 봉사자분은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으셨고,
나는 또 꾸역꾸역 새싹을 심었다.
3일째 되던 날
결국 나는 앓아누웠다.
더위를 먹은 탓인지, 너무 무리했던 건지
몸은 침대에 무겁게 내려앉았고,
술에 잔뜩 취한 것처럼 눈앞이 흐릿했다.
그날의 일정 (명상과 정원 가꾸기)을 모두 포기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봉사자분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시간을 피해 다녔다.
아스팔트의 아지랑이와 함께했던 날
4일째,
머쓱한 표정으로 나는 다시 필드에 등장.
봉사자분들이 괜찮냐는 말을 연이어 물어왔고,
그중에는 내가 신경질적으로 대해버렸던 봉사자님도 있었다.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에 시선을 내리고 괜찮아졌다고 대답했다. 내심 단순히 그날의 나를 보고 나를 판단하지 않으신 것만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나 같았으면 그다음부터 말은커녕 시선조차 안 줬을 텐데 말이지.
정원에 나와 다시 속도를 찾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천천히, 지치지 않도록.
중간중간 큰 나무 아래서 장화를 벗고 누워 짧은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진득한 땀 내음이 날아가던 그 순간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다른 분들과 호흡을 맞추고,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꽃 이름도 배워가고, 이제와 서야 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뭘 얻어가고 싶었어서 이곳에 다시 왔는가. 캥캥, 호미로 돌을 파내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생각했다.
마지막 봉사의 날. 웃기게도 비가 왔다.
5일간 우리가 했어야 할 모든 일들을 마치고
마무리로 남은 흙먼지 들을 쓸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5일 내내 계속 더워지는 날씨에 새싹들이 죽어버릴까 걱정했었는데, 마치 누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라도 한 듯 비가 내렸다. 문득 처음 이곳에 와서 수련 마지막 날에 내렸던 첫눈이 생각났다. 고마운 추억이 이렇게 또 하나.
살생이 금지된 공간에서 벌레의 이동수단.
짧은 5일이 지났고, 내가 찾은 것은 내 식사자리 머리 위에 붙어있던 문장이었다.
'담마를 피난처로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이에게 자애의 마음을 가지세요.'
나는 위로를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적어도 내 세상은 계속 즐겁게 돌아가야만 했고,
남의 아픔이 혹여나에게 흡수될까 안간힘을 써서 밀어냈다.
다른 사람들의 작은 실수들을 경멸했고, 이해하려 하지 않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나에 대해서도 엄격한 기준을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