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옆 인간극장 168 - 장재영(서울)
목욕탕 옆 인간극장 168 - 장재영(서울)
2016년 2월 29일, 이태원 보광동 카페 ‘공장공장’
그는 ‘여행이 가르칠 정도로 대단한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 나는 태국 치앙마이에 집을 얻어 잠시 멈춰있었다. ‘쏘주’를 한잔 하자 들었다. 서울에서 만나 삼겹살과 소주를 했다. 나는 네 가지 방향으로 진행하던 사업 계획을 꺼냈고 그때 만난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구분을 두지 않고 누구나 여행 이야기 할 수 있는 판을 기획했었다 말했다. 그 이야기를 애써 맺었다. 도리어 듣기로 했다. 그는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싸이월드에서 세계일주클럽을 운영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여행을 업으로 삼아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뒤늦게 아이들에게 줄 게 없을까 걱정되어 결혼한다면 외국에서 살 계획이라고 했다. 적어도 언어 능력은 줄 수 있지 않겠냐면서 웃었다. 불쑥 추운 날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별 거 없어요. 그냥 일상을 들어보려고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은 조금 한가하게 지내고 있어요. 성수기가 이제 앞으로 3월이라서 3월 전까지는 쉬엄쉬엄 있는 거죠. 사람도 만나고요. 안 그래도 작년에 비해서 이번 성수기가 조금 늦게 올 분위기더라고요. 작년에는 3월 중순부터 엄청 바빴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3월에도 뜨문뜨문 있어요. 한 주 일하고 한 주 쉬고 그래서요. 그래서 지금 생각으로는 국내 여행을 한 번 해볼까 하고 있어요. 77번 국도 여행을 해보고 싶거든요. 그걸 조금조금 섹터를 나눠서라도 해볼까 생각해요.”
“그럼 어떤 일이기에 성수기가 있는 거예요?”
“지금은 국내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고요. 어쨌든 우리나라 대표 여행사의 베스트셀러 상품의 국내 가이드를 하고 있어요. 5년차가 됐는데 제가 지금 본의 아니게 최고참 가이드가 돼서요. 매번 봄, 가을 시즌에는 무척이나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이 일은 언제부터 해오신 거예요?”
“사실은 제가 여행업에 굉장히 오래 몸을 담게 됐는데요. 여행업에 몸을 담게 된 계기가 있어요. 99년도에 유럽 배낭여행을 처음 했는데요. 그때 만났던 5살이 어린 덴마크 친구가 조그만한 기업체를 운영하더라고요. 그 친구가 재밌어서 1주일을 같이 지냈는데요. 그 친구가 넌 뭘 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제가 학교 졸업하고 커피숍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거든요. 산업디자인과를 나왔는데 그쪽으로 취직하고픈 생각도 없어서요. 일종의 방황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친구를 만나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럼 나는 뭘 하고 있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 취직을 해야겠구나. 그럼 어디를 취직을 해야 할까. 여행을 다니고 있으니까 여행을 다니면서 하는 여행사가 좋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땐 인터넷이 발달돼 있던 때가 아니어서요. 여행사를 직접 찾아서 이력서를 몇 개 돌렸죠. 그런데 일주일만에 여행사에 취직이 됐어요. 그때부터 허니문 전문으로 하거나 배낭여행이나 패키지를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에 있기도 했어요. 여행업도 한 번 들여다보면 굉장히 세분화 되어 있어요. 다 똑같은 여행사가 아니에요. 전 거의 모든 업종의 여행사에 다 몸을 담았죠. 그러다가 여행사 일에 회의도 느끼고 지겹기도 하고요.
사실 8년 전에 다 접고 호주로 떠났었어요. 여행사는 다 때려치고요. 마침 호주 이민 문이 넓어져서요. 호주 가서 한번 살아보자 날씨도 좋고. 갔는데 실패하고 돌아왔죠. 총리가 바뀌면서 이민법이 대대적으로 바뀌어서요. 제가 하던 걸 마쳐도 이민 자격을 받을 수 없었어요. 본의 아니게 마음의 상처와 이런 걸 겪고 돌아온 거죠. 돌아왔는데 또 할 줄 아는 게 없죠. 그래서 오자마자 인솔자로 나간 거예요. 아는 분이 절 끌어당겨서 이런 게 있으니 너도 한 번 해볼래 그래서 들어오게 됐어요. 해외여행과 국내여행은 또 다른 매력이 있어요. 다니다 보니까 나라 수는 60개국 정도 여행을 했는데요. 계속 우리나라를 다니니까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좋은 곳이 많구나 처음 느꼈어요. 새록새록 우리나라를 알아가고 있어요. 가고 싶은 곳도 많고 안 가본 곳도 많고요. 아직까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연차가 중요한 게 아니라요. 다니면 다닐수록 끝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럼 일 말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사실은 술 먹는 걸 제일 좋아하고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이것저것 많이 해서요. 몸으로 하고 움직이는 걸 꽤나 좋아했어요. 20, 30대까지요. 축구를 하기도 하고 겨울이 되면 스노우보드. 거의 시즌방에서 살 정도로 스키장에서 살고요. 어느 순간부터 그게 지겨워졌어요. 그런데 친구들을 보니까 30대 넘어서고부터 다 그러더라고요. 이제 너무 어릴 때처럼 몸으로 하고 그런 걸 조금 덜 하게 되더라고요. 뜨문뜨문 덜 하게 된 거죠. 스키도 보드도 타다가 시즌방을 이제 안 가고 일본이나 몇 번 가고요. 일본은 스키 인프라가 너무 잘 되어 있거든요. 그마저도 이제는 끊게 됐죠. 지금은 운동이라고 할 만한 건 거의 안 하고 있어요. 국내 가이드를 하니까 호텔 투숙할 일이 많은데요. 그 호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던지 그 정도만 하고 있는 거죠. 얼마 전 스케이트 보드를 하나 샀어요. 출퇴근 할 때 타고 다니려고요. 사실 호주 있을 때 그때 그게 되게 로망이었거든요. 되게 나이 많은 아저씨가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수트를 입고 담배를 하나 꼬나물고 다니는데 정말 멋있더라고요. 요즘은 추워서 못 하고 있어요.”
“또 좋아하는 것 있으세요?”
“여자 좋아해요. 이것도 역시나 젊었을 때와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젊었을 때는 물불 안 가리고 좋아했는데요. 이제는 두려움이 앞선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누구를 만나거나 할 때 어렵죠. 아- 또 내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을까. 제가 그러고 보니까 참 단순하네요. 좋아하는 게 많지 않네요. 어릴 때는 노트 한 가득을 써도 모자를 정도로 장래희망이 있었는데요. 지금은 점점 하고 싶은 게 없어지는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런 건지, 하고 싶은 게 없어지고 있어요. 어쨌든 뭐 여행을 가장 좋아하니까요. 지금은 왠지 뭘 좋아하는지 손꼽을 수가 없어요. 쓸쓸하네요. 얘기하고 나니까요.”
“그럴 때 옛날 얘기를 해봐야 하는데요. 초등학교 때 장재영은 어땠죠?”
“아 초등학교 때 굉장히 말썽쟁이였죠. 활발하고요. 이번에 제 아버님 돌아가시면서 집 정리를 쫙 했는데요. 초등학교 때 통지표가 다 보관이 돼 있어서 한 번 다 봤어요. 선생님들 평가가 다 주의력이 산만하데요. 굉장히 활발하고 운동 좋아하고 애들한테 짓궂게 장난치고요. 하여간 어렸을 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학력이 되면서 점점 정화가 되는 느낌이었어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리 부모님이 음- 아마 제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아버님께서 남자는 시골에서도 좀 살아봐야 한다면서요. 여름방학 때였는데요. 우리 큰이모님이 수원 저 아래쪽에 제부도 옆에 농사를 지으셨는데요. 거기에 절 보낸 거예요. 초등학교 1학년 애를요. 지금으로 하면 7살에 학교를 갔으니 정말 어린데요. 가서 3일만인가 울면서 집에 전화를 했어요. 무섭고 외롭고 하니까 와서 데리고 와 달라고요. 힘들다고요. 1학년은 실패하고 2학년 때 또 보낸 거예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2학년 여름방학 때는 성공했어요. 제 기억으로는 27일인가 있었어요. 그래서 이모부께서 일을 한 건 없지만 일당을 쳐서 용돈을 주셨어요. 그때 당시에 하루에 300원씩 계산해서 27일 일한 걸로 치고 제 삶에서 최초로 노동의 대가인 돈을 받았어요. 그런 기억이 나요. 3학년 때부터 안 가긴 했지만요. 종종 방학 때면 며칠 씩 가곤 했어요. 그때부터 어쩌면 여행을 간 거죠.
그러다가 5학년 때 그렇게 저희 집이 풍족하진 않았는데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았는데 저희 작은 누나가 신문 배달을 했어요. 제가 4학년이고 누나가 6학년이었는데요. 그건 왜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5학년 때 제가 한 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학교 바로 뒤에 동아일보 신문사에 찾아가서요. 일할 수 있냐고 했어요. 제 얼굴을 아니까요. 그때 거의 1년을 신문 배달을 했어요. 한 달에 7만 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같이 신문배달 하는 아주머니들은 21만 원인가 받더라고요. 왜 차별이 있냐고 물어보니까 넌 초등학생이잖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설득력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요. 어쩌면 사실 한창 놀고 싶은 나이잖아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석간 신문이라서 학교 끝나고 오후에 배달한 거죠. 그래서 애들이 놀지 못 하니까 애들이 같이 따라다니면서 신문 배달을 같이 하기도 했죠. 어느 날은 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가고 싶지 않다고 엄마한테 했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시킨 게 아니라 네가 하기로 한 건데 약속한 걸 안 가면 되겠냐고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엄마랑 같이 신문 배달도 했어요.
또 앞에 나가서 학예회는 아니지만 아이들 웃기고 그런 걸 많이 했어요. 제일 먼저 나가서 얘기를 하고 그랬어요. 일종의 MC를 보는 거죠. 하여간 재미난 아이었던 것 같아요. 6학년 때 그 당시 호랑이 선생님이란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거기서 자기네 교내 마라톤 같은 걸 개최했어요. 그걸 보고 저도 이걸 한 번 개최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애들한테 공지한 거예요. 우리도 마라톤 대회를 한 번 해보자. 아빠한테 학교에서 홍대 입구까지 얼마나 걸릴까 하니까 2km 정도 된대요. 그래서 2km 마라톤 대회를 연거죠. 대회 상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때 당시는 삐라 같은 거 주면 연습장 주고 그랬거든요. 1등 몇 권 2등 몇 권 그러면서 나름의 상품을 만든 거죠. 토요일에 그때는 학교를 갔으니까 토요일 학교가 끝나고 열었어요. 그러나 1등은 제가 했습니다.”
“그러면 중학교 때는요?”
“환경이 좀 바뀌었어요. 1학년 때는 별 게 없었는데요. 2학년 때는 학교 바로 옆에 벽돌 공장이 있었어요. 그때 2학년 때는 그 공장에서 또 알바를 했어요. 그쪽 용어로 야마 쌓는다고 그러더라고요. 벽돌 쌓는 걸요. 자세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굉장히 높게 쌓았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 빠레트 하나를 쌓을 때 3000원씩 받았어요. 어른들은 10개를 쌓는데 우리는 2개 쌓기도 힘들었어요. 그건 오래하지 못 하고 간간히 유흥비 마련을 위해서 했어요. 중학교 때는 사실 별다른 특이사항 이런 건 없었어요. 아, 그런 건 있어요. 과외를 했었어요. 아들은 하난데 기대가 크니까요. 아들 잘되라고 과외를 시켰는데 과외 하기가 싫더라고요. 공부하기가 싫어서 과외 안 하고 도망간 적이 있어요. 처음으로 가출이란 걸 해봤죠. 공부하기 싫어서요. 그런데 가출을 했는데 갈 데가 없는 거예요. 아침에 나왔는데 여기저기 한참을 걸어 다니다가 도로 다시 집 근처 왔다가 누나에게 걸렸죠. 하루만에 가출이 끝났던. 그 정도로 공부하기 싫어했었던 것 같아요. 그게 고등학교 때도 그대로 넘어간 거죠.”
“그럼 고등학교 때는 어땠어요?”
“그때도 공부하기 싫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과외니 학원이니 다녔는데 싫었어요. 취미가 없는 거예요 공부에. 처음으로 술을 배웠어요. 담배는 안 피웠어요. 술만. 그 당시 애들한테 인기 있는 건 당구 치고 그런 거였는데 그건 제 취향이 아니더라고요. 그러다가 그 술 먹고 만나고 노는 걸 좋아했는데요. 그 당시에 락카페라는 문화가 생겼어요. 지금 클럽의 시초라고 보면 되죠. 술집인데 음악 나오면 춤추고 그러는 거예요. 어디 좋은 데는 스테이지도 물론 있지만요. 2학년 때 그래서 춤바람이 든 거죠. 자주 가던 데가 홍대에 ‘보스’라는 락카페가 아주 유명한 데가 있었고요. 이대는 ‘하이델’, 신촌에 가면 ‘나사’가 굉장히 유명했던 곳이었거든요. 그게 응사에 나왔던 곳이에요. 응사에서 그걸 보고 너무 공감이 되더라고요. 그때 아무튼 춤에 미쳐서 만날 다녔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후반에서 3학년까지 소개팅을 엄청 많이 했어요. 그만큼 공부를 안 했다는 거죠. 소개팅을 하다가 소개팅한 걔네 반 애들 절반이 저를 알 정도로 소개팅을 많이 했어요. 특이하게 한 번 만나고 그러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안 만나고 말았어요. 이상하게요.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소개팅 한다고 하면 또 커피값 내주러 가냐고 그랬어요. 어쨌든 그러다가 공부를 드럽게 안 하다 보니까 대학을 갈 수가 없잖아요. 문제가 뭐냐면 사실 적성을 몰랐어요. 단순히 이과라고 전자과 전기과를 넣는데요. 전 제가 뭘 하고 싶고 그런 게 없다 보니까요. 난감하더라고요. 그래서 어쨌든 원하지 않는 곳을 쳤는데 다 떨어졌어요.
그러던 차에 작은 누나가 제안을 하나 했어요. 작은 누나가 전문대 산업디자인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너도 그냥 손재주가 없지 않으니 그림을 조금 해서 산업디자인과 쪽으로 쳐봐라 그랬어요. 전 미술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작은 누나 친구가 홍대 미대를 다녔는데 그때 시험 보는 공식 같은 걸 알려줬어요. 그때 실기가 구성이라고 그래서 주제가 두어 개가 나오면 색을 써서 그리는 거였는데요. 그렇게 봐서 전문대 산업디자인과를 갔어요.
우리가 수능 1세대예요. 94년도에. 그래서 우리는 수능을 처음 봤어요. 학력고사에서 바뀐 거라서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두 번을 보자 그랬어요. 우리 때만 1학기 끝나고 한 번, 2학기 끝나고 한 번 보고요. 200점 만점이었어요. 나름 그래도 기억 안 나지만 130점 정도 맞았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웬만한 대학은 가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또 그게 전문대로 따지면 높은 점수였어요. 그래서 실기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전공과 상관없는 산업디자인과를 갈 수 있었던 거죠. 들어가서 재밌었어요. 정원이 40명인가 그랬는데 거의 다 여자였어요. 남자가 8명인가밖에 없었어요. 별천지였던 거죠. 고등학교 때 못 겪어봤던. 손재주는 조금 있는 편이라 만드는 거나 조각하고 그러는 게 굉장히 재밌었어요.
그리고 그때 사귀던 친구 오빠가 해병대 출신이더라고요. 아빠도 해병도고 삼촌도 해병대고 그 집안 남자는 전부 다 해병대인 거예요. 그때는 해병대가 뭔지도 몰랐는데요. 그 친구가 우리 집 들어오려면 해병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뭐 그래서 간 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전 빨리 지원을 해야했고 이왕 가는 김에 빡세게 다녀오자 그런 생각이 있어서 1학년 마치고 95년도에 해병대에 가게 됐어요. 그래서 군대에 2년 있다가 제대할 때가 되니까 이제 나가서 뭘 해야 하나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때 문득 외국에 가서 어학연수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돈이 없는 거예요. 그래도 가야 하니까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런데 짧은 시간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니까요. 여기저기 알바 자리를 엄청 알아봤어요. 어딜 보니까 키 180 이상 용모 준수 이런 내용이 많았어요. 거길 가보기로 했죠. 그때 신당동에 처음 가봤어요. 간판도 없는 곳인데 들어가 보니 지하더라고요. 가보니 남자들이 바글바글 해요. 매니저와 얘기를 하는데요. 그 분이 하는 말이 눈치 챘겠지만 여긴 호빠라고 하는 거예요. 이곳이 어쩌면 여자로 하면 화류계인 거잖아요. 그런데 한 달에 500만 원을 번다더라고요. 그냥 나올 순 없으니 들어보기로 했어요. 그래서 계속 말하는데 요즘 손님이 없어서 남자 손님들도 온다더라고요. 처음엔 그 말이 이해가 안 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거기가 호빠가 아니라 게이바였던 거 같아요. 우리나라에게 이런 세계가 있구나 생각하고 뛰쳐나왔어요.
결국에 취직한 게 단란주점 웨이터였어요. 거긴 제가 몸을 파는 게 아니니까요. 한 달에 200만 원쯤 벌었어요. 3개월 정도 있었어요. 돈을 벌어서 호주로 간 거죠. 그때가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있었는데 지금 같지 않아서 그게 받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어디에 근무한 내역과 세금을 낸 내역을 내고 불법체류 하지 않을 근거를 내야했어요. 쳤는데 떨어졌죠 당연히. 제대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그래서 학생 비자로 갔죠. 6개월 정도 있었는데요. 제가 호주 가 있는 중에 IMF가 터진 거예요. 한국인 면세점에서 가자마자 일했는데요. IMF 터지니까 관광객이 안 오잖아요. 그래서 다 잘린 거죠. 돈을 못 버니까 어쩔 수 없이 집에 손을 벌려야 하는데 그게 계속 그러기 너무 미안한 거예요.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본의 아니게 다시 오게 됐어요.
와서 복학하고 졸업을 했는데요. 대학은 눈 깜박할 사이만 있었지만 재미난 게 많았어요. 우리는 산업디자인과라 작업실이 있었어야 해서요. 근처에 방을 빌려야 했어요. 거기에 먹고 자면서 그림 그리는 건데요. 작은 누나가 그 주변에 괘 유명한 작업실에 있어서요. 거기 빽으로 들어가서 있기도 하고. 제대하고는 학내 해병대 전우회 활동도 하고요. 그랬죠. 그러고 끝난 거죠 대학은.”
“20대의 장재영은 어땠던 것 같으세요?”
“좀 뭘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니까요. 뭘 잘 몰랐어요. 그냥 계획이 없고 그냥 하루하루 즐거움으로 살았던 그런 느낌 같아요. 지금 돌아보니까.
다른 친구들은 돈을 착실히 모아서 적금을 들고 그런 과정들이 있잖아요. 처음에 직장을 들어가면요. 그런데 그러한 계획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냥 여행사니까 출장을 자주 다녔거든요. 동남아 어디고 어디고 엄청나게 다녔었는데요. 그냥 그런 게 좋았어요. 1년 다니다 그만둬서 빈 시간이 있으면 엄한 돈 까먹고. 그러다 보니까 벌어놓은 것보다 빚진 게 더 많았던 인생 같아요. 20대 중반에 연예인 매니저를 한다고 까불어서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됐어요. 6개월 까먹고. 다시 여행사를 들어가고 다시 1년 반 다니다가 수틀려서 그만두고 그랬어요. 그때는 지금 생각하면 성격이 굉장히 뾰쪽했어요. 예민하고요. 까칠하고요. 친구들도 다 그랬던 것 같아요. 또 다른 어떤 면에서 쟤는 사막에 갔다가 놔도 살 애라고 그랬어요.”
“30대의 장재영은 어땠어요?”
“그거보다는 조금 안정이 된 것 같아요. 외려 20대보다 30대가 더 빨리 지나간 것 같아요. 어르신들이 하는 말이 다 맞아요. 40대가 되고 50대가 되면 그거보다 더 빨리 지나간다고 하시잖아요. 그런 느낌이 와 닿더라고요. 30대 때는 성격에 고비가 두 번 정도 있었는데요. 그러면서 성격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2005년도에 한국 생활 다 접고 외국에 가서 살아야겠다고 여행사 업무를 접고 체코 프라하에 갔거든요. 가서 살려고 갔는데 갔던 일이 잘 안 됐어요. 거기 사장이 일종의 사기꾼 비슷하게 걸려서요. 그래서 여기서 다 송별회 하고 심적으로 여기를 버리고 떠났는데 그런 일을 겪고 다시 돌아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 조금 성격이 까칠했던 게 조금 무뎌졌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다가 할 게 없으니까 미국 갔는데 보름 만에 돌아오게 되고요.
그러다가 태국에 가서 코사무이란 곳에서 가이드를 했어요. 한 3개월 정도요. 그곳은 성수기, 비수기 차이가 너무 커서 1년 내내 일을 할 수 없는 구조다 보니까 계속 있을 수가 없었어요. 한국에 다시 왔어요. 왔는데 예전에 알던 여행사 팀장님이 불러줘서 다시 여행사 일을 했어요. 싫었지만. 하지만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또 1년 반쯤 지나니까 엉덩이가 들썩였어요. 코타키나발루에 현지 여행사 직원을 채용한다는 걸 보고 또 거기 갔죠. 거기서도 또 환송회를 다 하고 떠났죠. 그때는 안 올 생각을 했으니까요. 가서 보니까 생각보다 좋더라고요. 결혼하고 애를 낳고 살면 굉장히 안정적이고 인프라도 잘 되어있고 그런 느낌이었어요. 거기는 또 두 달 만에 뭐가 삐꺽해서 돌아왔어요. 현지에 총괄하는 사람하고 의견이 맞지 않아서요. 그래서 잘 안 되고 왔는데요. 외국에 자꾸 나가서 살고 싶은 거라서 이렇게 저렇게 도전했는데 잘 안 된 거잖아요. 그래서 인솔자를 또 1년을 하면서 어떻게 지냈는데요. 그러다가 제가 공부를 해서 영주권을 받는 게 낫겠다 싶어서 다시 호주로 가기로 했어요. 친구가 지금은 호주 영주권 받기 좋으니까 오라고 했거든요. 이 이야기가 아까 말했던 호주에 갔는데 총리가 바뀌면서 이민법이 바뀌는 바람에 다시 돌아오게 된 이야기예요. 그때 돌아온 이후로 성격이 아주 많이 바뀌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사람이 많이 삭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두 번 겪으면서 많이 삭은 느낌이에요.”
“요즘은 어떠신 것 같아요?”
“그런데 갔다 와서 지금 하고 있는 내나라여행 가이드를 하면서 참 안정적으로 됐어요. 제가 한 회사에 5년씩 있었던 적이 없거든요. 사실 일이 안정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름, 겨울 때는 원한다면 외국으로 나갈 수도 있고 수익도 괜찮고 해서 뭔가 잘 풀리는 느낌이에요. 적금이랄까 그런 것도 계획을 안 하고 그랬는데요. 모이면 여행가고 모이면 여행가고 그랬는데요. 그런데 이 일은 돈 쓸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까 돈이 모이더라고요. 엄청 단순한 건데요. 안 쓰면 모이잖아요 원래. 돈도 어느 정도 모이니까 이제 다른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시기예요. 그런 거죠. 사실은 이런저런 계획이 많았었어요. 미얀마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할까 생각하기도 했거든요. 이번에 미얀마 간 것도 나도 어디 괜찮은 자리에서 해볼까 싶어서 갔는데요. 본의 아니게 여행 중에 그렇게 돼서 돌아오게 됐어요.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뭘 하려고 하면 왜 나는 잘 안 되지 그렇게 생각도 들어요. 내 인생은 뭘 하려면 왜 안 될까.”
“앞으로는 어떨까요?”
“제가 원래 점 보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전에 누가 점을 저 대신 봐줬어요. 그걸 보내줬는데요. 그 사람이 제 인생에서 어려웠던 걸 나이별로 말해주는데 얼핏 맞더라고요. 여태 고생은 이미 다 했다고. 이제 앞으로는 30대 후반부터는 조금 안정적으로 잘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것 같아요. 무언가 지금 크게 어려운 건 없으니까요. 무언가 굉장히 잘 풀리는 건 아니지만요. 어려움 없이 지나가는. 앞으로도 잘 되지 않을까요. 어쨌든 뭐 요즘은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누구라도 오고 싶어 하는 아지트 같은 공간을 만드는 게 사실은 꿈이라서요. 그게 커피가 됐던 술이 됐던 여행 이야기를 하는 카페가 됐던지요. 좋아하는 친구들과 또 좋아하는 술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걸 하고 싶어요. 내가 여행을 다니지 않아도 그 사람들이 와서 여행 이야기를 해주면 일종의 대리 만족도 될 것 같기도 하고요. 언젠가 그런 공간을 만들 꿈이 있습니다. 소박하게.
음- 남들과는 조금 달라요. 돈을 벌어서 뭐 이렇게 해야지 이런 생각은 하지만. 물론 돈을 벌면 좋지만요. 그런 것보다는 지금 생각에는 당장 무언가 재밌는 그런 게 좋아요. 젊은 친구들하고 자꾸 어울려서 그런지 굉장히 꼰대 같은 느낌 되게 싫어하거든요. 가끔 돌아보죠. 그래서 어디 가서 나이를 말하는 게 부담돼요. 왜냐면 나는 괜찮은데 나이라는 게 상대방이 저렇게 나이가 많은데 하면서 필요 없는 벽을 만드는 거잖아요. 그래서 잘 이야기 안 하게 되더라고요. 그게 오히려 편해요. 서로 나이를 모른 상태에서 그냥 나이가 나보단 많겠지 정도만 하면서 이야기 하면 편해지거든요. 언제부턴가 그렇게 됐어요. 호주에 가면서부터는 나이를 잊고 지낸 거죠. 지금도 누가 물어보면 내가 몇 살이지 가끔 생각해요.
얼마 전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자기들이 마흔 둘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걸 듣고 엄청 놀랐어요. 제가 아무리 생일이 빨라서 한 살 까도 마흔 하난데. 아니 벌써. 믿고 싶지 않은.”
“그런 게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문득 떠올렸을 때 고마운 사람이요.”
“우리 엄마가 제일 고맙죠. 요번에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됐고요.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까 어머니 오래된 일기장을 봤어요. 저는 사실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어머니 일기를 보니까 저희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더라고요. 거기서 우리 자식들을 마당 있는 집에서 뛰어놀면서 키우지 못 한 게 너무 미안하다고 하시는 거예요. 어쩌면 그런 노력들 때문에 제가 그렇게 느꼈던 거겠죠. 어머니, 아버지가 고생하셔서 그걸 못 느끼고 자랄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두신 거니까요.
그런데 어머니 일기장이 조금 특이해요. 일기장 한 장에 5년치 일기를 쓰셨더라고요. 그냥 한 장에 같은 날짜지만 연도만 다르게 해서 계속 적어 오셨더라고요. 한 장에 날짜를 위에 쓰고 일기를 한 문장만 계속 쓰시는 거죠. 한 장 가득 하나의 날짜 일기를 쓰는 게 아니고요. 짧은 문단 정도만. 그래서 한 장에 1980년부터 85년까지 있는 거예요. 재미난게요. 누나들은 생일이 음력인데 나만 생력이 양력이에요. 우리 집에서. 저 때는 그게 신식으로 바뀌어서요. 그걸 양력으로 하는 게 생겼대요. 그러니 누나 생일은 다 다른 날짜니까 여러 곳에 써두셨는데 저는 양력이니까 생일 일기가 한 장에 다 같이 있는 거예요. 80년 1월 19일 81년 82년 83년 위에 날짜는 다 똑같아요. 오늘은 재영이의 생일이다 다 똑같아요. 이걸 보니까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그걸 보면서 누나들 에피소드도 많이 나오고요. 누나들한테 카톡으로 보내주고요.
고마운 사람이라고 하면 지금 딱 어머니.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은 어머니랑 사이가 좋진 않아요. 다른 아들들처럼 막 어머니한테 사근사근하고 이런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요. 언젠가는 우리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올해 목표가 아들이랑 친해지는 거다. 그럴 정도니까요. 많이 친하진 않고 특히나 제가 여행 많이 다니다보니까 집에 연락을 잘 못 해요. 한 달에 한 번도 연락 안 할 때도 있고요. 지금도 따로 떨어져 사니까요. 일산이라 별로 멀지 않음에도 몇 달씩 안 가볼 때도 있고요. 이번에 어머니랑 여행도 같이 다니고 집에도 며칠 있고 그랬더니 조금은 친해진 느낌이에요. 그건 저한테 숙제죠. 어머니한테 다른 자식들처럼 번듯한 직장이 있어서 용돈도 꼬박꼬박 챙겨드리지 못 하니까요. 앞으로 그렇게 해야죠. 제가 잘 돼서요. 어머니한테도 좀 잘 해드리고 그래야죠.”
“그리고 제가 계속 물어보는 질문이에요. 이상형은 어떻게 되세요?”
“그게 사실 되게 어려워요. 저는 옛날부터 이상형이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딱 하나의 특정 지을 수 있는 상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도 사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없어요. 지금까지 만났던 분들을 보면 같은 상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너무나도 다양해요. 지금은 다른 건 없고요. 저랑 이야기를 하면 같이 공감할 수 있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요. 근데 그게 의외로 어렵더라고요. 자기 사고방식으로 나름대로 살아왔는데 이걸 서로가 맞춰준다는 이게 쉽지 않잖아요.”
“결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결혼을 안 하고 싶진 않아요. 결혼을 때가 되면 빨리 해야 되겠죠. 지금 생각을 해보니까요. 참 망설인 것 같아요. 사람을 어느 정도 만나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사실 당연한 건데요. 매번 망설였어요. 어 이게 맞나 이런 생각이요. 이 사람이 맞나. 그래서 항상 그랬어요. 무언가 확신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게 없었어요. 그런데 그 확신이 점점 희미해진 것 같아요. 이제는 누구를 만나도 확신이 안 들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언젠가 됐든 결혼을 하고는 싶어요. 그런데 결혼을 하면 저는 우리나라에는 안 살 것 같아요. 결혼을 하면 어떻게 됐던 외국에 나갈 것 같아요. 왜냐면 내 자식들은 우리나라에서 키우고 싶지 않아요. 우리나라를 비하하거나 그래서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사실 해줄 게 없잖아요. 예를 들어 호주를 예로 들면 최소한 언어적인 능력은 줄 수 있잖아요. 넓게 사고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요. 우리나라처럼 틀에 박힌 사고를 하는 구조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막 갑자기 이상형이 생기네요. 나랑 같이 외국에 나가 살 수 있는 사람. 사실 외국 나가 사는 가장 큰 문제가 영주권인데요. 영주권 받기 가장 쉬운 게 사실 남미거든요. 거기서 애를 낳으면 전 가족에게 영주권을 줘요. 그래서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결혼할 여자가 생기면 남미에 가야 하나. 그래서 요즘 보고 있는 나라는 에콰도르예요. ‘바뇨스’라는 동네. 거기가 그렇게 땅기더라고요. 거기가 굉장히 유명한 동네예요. 레포츠 천국이고 ‘세상 끝 그네’인가 그런 게 있어요. 가보진 않았는데 아는 분이 거기 다녀와서 쓴 책을 읽다보니까 왠지 그 동네는 나를 위한 동네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영주권이 해결은 되더라도 일단 살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공간을 가서 만드는 거죠. 커피숍도 좋고 게스트하우스도 좋고요. 그런저런.”
“혹시 본인에게 죽는 건 어떤 의미예요?”
“제가 예전에 입버릇처럼 하던 이야기가 있는데요. 사람 인생이란 모르잖아요. 어떻게 죽을지요. 입버릇처럼 하던 이야기가 나 내일 죽어도 후회 없다. 전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당장 내일 죽어도 영혼이 돼서 육신을 딱 떠나면 육신이 내려다보일 것 아니에요. 바라다보면서 야- 장재영 잘 살았다 그런 느낌. 당장 내일 죽어도 물론 사실 남아있는 사람이 슬프긴 하지만요. 지금도 사실은 놀 거 다 놀고 잘 했으니까요 별 후회는 없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이왕 죽는다면 죽음을 선택 할 수 있다면 객사만 하지 말자. 지금 너무 나돌아 다니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객사를 안 할 가능성이 더 없지만요. 그렇게만 죽지 말기를 그런 소망이죠 소망. 사실 만날 여행 다니니까 비행기 사고 또 테러며 그런 거 얼마나 많아요. 그렇게 안 죽는 게 어떻게 보면 신기한 거죠.”
“스스로에게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이것도 제 삶의 모토중 하나인데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겠지만 쪽팔리게 살지 말자. 예전에도 그랬고. 항상 어떤 일을 할 때 스스로에게 쪽팔린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항상 해요. 아주 거창한 거 아니에요. 예를 들면 쓰레기를 길바닥에 버리려고 하는데 이거 나한테 쪽팔린 거 아닌가. 그런 거예요. 쉽게 얘기해서요. 그게 인간 장재영이란 사람을 버티게 해준 것 같아요. 내 스스로에게 안 쪽팔려야 하니까요. 앞으로도 마찬가지 같아요. 여태까진 잘 그렇게 한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있으세요?”
“근데 사실 다른 사람에게 충고 같은 걸 잘 안 하거든요. 다른 사람한테 충고를 하면 꼰대가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요. 그런데 굳이 한다면 그 사람들도 자기 스스로 쪽팔리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음을 서로 가지면 우리나라 좋은 나라가 되겠죠.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하면서 살다보니까 제가 생각했던 상식과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제가 나이 먹으면서 느낀 건데요.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염치가 없어지더라고요. 쪽팔린 거랑 비슷하지만요. 요즘은 더러 젊은 사람들도 염치가 없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창피한 줄 모르고 이상한 행동들을 하는 것 같아요. 조금 모호한가요?”
“아니에요. 제가 생각하는 방향과 같아요. 제가 요즘 그러거든요. 음- 누가 재영 씨 잘 지내세요? 물어보면 무슨 이야기 해주고 싶으세요?”
“저는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항상 그렇죠. 그게 답이었던 것 같아요. 또는 그럭저럭. 뭐 한 번도 아 잘 지내요 이렇게 이야기 해본 적은 없어요. 그냥 내 딴에는 최고의 대답이 그럭저럭. 근데 뭐 사실 잘 지내고 있는 거죠. 특별한 일 없는 거니까요. 인생 살면서 아까 말했듯이 어렸을 때 육체적인 노동이며 나이 들어서 정신적인 어려움이며 겪어보니 사실은 많이 무뎌진 거죠. 웬만한 외부 충격에 크게 힘들거나 하지 않으니까요. 사람에게서 오는 스트레스도 예전보다 덜하니까요. 안정적으로 늙어가고 있는 거죠. 그 정도면 잘 지내는 거 아닌가요? 도드라지지 않아도.”
“여기까지가 제가 묻고 싶었던 이야기예요.”
“재밌네요.”
“뭐하고 지내나 제 스스로 의문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물어보는 것 같아요. 재밌어요.”
우리 모두 멋진 사람들이야 너무 멀리서 대단한 걸 찾지 마, 없어.
일상 속 대단한 만남 「목욕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