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필리버스터 보고 지내고 있어요. 이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목욕탕 옆 인간극장 167 - 김민규(서울)
2016년 2월 27일, 충무로역 스타벅스
나는 요 며칠 헌법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인지 체감했다. ‘필리버스터’는 끝이 예쁘지 않았지만 서로 배웠다. 그들은 정치를 한다면서 아직 어른이 되지 못 했다. 이상한 일이다. 교과서에서 보던 그런 어른들은 어디서 만나는지 모르겠다.
따뜻한 인연을 기다리다가 연락이 닿았다. 동갑내기 ‘김민규’를 만났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기운을 얻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라디오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마음으로 팟캐스트 ‘당신의 물건’을 꾸리고 있었다. 시작은 ‘필리버스터’ 이야기였고 틈틈이 그는 관련 소식을 살폈다. 일상을 듣기로 했다. 말이 쏟아졌고 주워서 담다가 포기하고 녹음했다. 곧 백수가 될 예정이라고 했고 그냥 산다고 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요즘 필리버스터 보고 지내고 있어요. 이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요즘 하는 일은 어때요?”
“팟캐스트 하는 거 계속 하고 있고요 그 외에 특별한 일들은 없어요. 빵집 알바도 하고 있고요. 회사의 일을 인수인계 하는 중이고요. 연애를 해야 하는데 연애를 못 하고 있어요. 자다가 깬 지 얼마 안 돼서 말을 못 하겠네요.”
“좋아하는 일이 있어요?”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라디오도 좋아하고 팟캐스트 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제가 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것도 많이 들어요. 여행도 좋아하는데 요즘은 잘 못 가고요. 먹는 것도 좋아하고요. 치킨도 좋아하고요. 먹는 양이 되게 줄었어요. 치킨은 한 마리를 혼자 다 못 먹어요. 예전엔 다 먹었거든요. 나이 먹은 것 같아요. 그 외에는 뭐 별 거 없는데. 제가 그렇게 다채로운 사람이 아니에요.”
“연애는 어때요? 준비하고 있어요?”
“연애를 준비하고 있냐고요? 연애는 늘 시도하고 있어요. 잘 안 돼요. 옛날만큼 쉽지 않아요. 옛날에도 똑같이 어려웠지만요. 아주 전성기일 때 제 인생 전체를 봤을 때 가장 사람들에게 탁 던질 수 있는 때가 이미 두어 번은 있었구나 생각해요. 나는 연애에 필요한 운을 다 썼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나를 만나줬던 친구들이 대단한 운을 주고 갔구나 생각해요. 앞으로 그런 운이 있을까 생각해요. 전 누군가를 항상 좋아하고 있죠.”
"팟캐스트는 어떻게 하게 된 거에요?"
"제가 ‘당신의 물건’이라는 팟캐스트를 하고 있어요. 원래 라디오 DJ를 하고 싶었고요. 그런데 아이튠즈가 만들어지고 팟캐스트가 생겼을 때부터 서비스를 주시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에요. 이건 믿거나 말거나지만 나꼼수보다 더 먼저 그 포맷을 하려고 생각했어요.
제가 공주에 살았는데 공주교대를 이전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게 시위도 하고 민감한 정치 이슈고 행정 이슈라고 생각했어요. 공주 쪽에 있는 지역 신문사 기자랑 시의원과 국회의원과 같이 붙여서 같이 논의를 하자고 이메일 보내고 그랬어요. 이 포맷 대박이라고. 심의도 없고 무엇도 없으니까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다 말했어요. 그 당시에 제안을 받은 사람이 누가 듣냐고 해서 안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걸 접었거든요. 1년 뒤 나꼼수가 나오고 그래서 피눈물을 흘렸어요. 역시 김어준은 흐름을 잘 탄다 생각했어요. 팟캐스트가 직업이 지금도 아니지만 당시 취업하고 올라올 때 물어 보면 난 라디오를 하고 싶은데 방송국 직원이 되긴 싫다고 하면서 팟캐스트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럼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사실 팟캐스트가 발전할 때마다 계속 무엇이든 했어요. 개인 프로젝트도 해보고 지인들에게도 제안하기도 하고요. 제가 옛날에 일했던 카페에서 팟캐스트 스튜디오 만드는 펀딩도 진행하고요. 제가 하고 싶은 거라서 계속 만들어서 했어요. 그리고 지금 진행하고 있는 ‘당신의 물건’이란 팟캐스트는 전 제 프로그램을 하고 싶고 같이 하는 향주 씨는 사람 만나는 그런 걸 하고 싶어서 그게 잘 맞아서 하게 된 거예요. 향주 씨와 제주에서 만났는데 ‘한 번 해봅시다.’ 하다가 결국 하게 됐어요. 작년에 시작했고요. ‘당신의 물건’이란 방식은 제가 컨텐츠진흥원에서 한 번 했던 프로그램 소재예요 사실. 그때 잠깐 하던 걸 지금도 하고 있는 건 저희밖에 없어요.“
“지금 하는 일은 왜 그만두는 거예요?”
“전 이제 일을 그만두면 나쁘게 헤어지지 않는 법을 알아요.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 그만둘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상처 받진 않아요. 대신에 며칠 앓긴 하죠. 내가 되게 못 했구나 자책하기도 하지만요. 나중에 대표님과 정리하기로 합의하고 식사하면서 서로 잘못했다고 이야기 했어요. 서로에게 잘못이 있는 거예요. 배려하지 못 한 거예요. 새로운 사업을 하려면 기반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요. 우리의 사업이면 받아들여야지 왜 대표님이 불안해하기만 하고 결정을 못 하는지 이해를 못 했어요. 몇 개월이나 소강상태를 이어가니까 이럴 거면 하지 말자고 했어요. 밤은 나만 세고 사업은 나만 하냐 했어요 사실. 스타트업도 아니고 중소기업도 아닌데 신사업을 하려고 하면서 그걸 못 하는 거예요. 그분이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어도 그곳이 가족 기업 같은 곳이라서 사공이 많았어요. 꼭 최고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기왕이면 일을 하려면 일을 자랑할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일은 내가 자랑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이 일에 대한 자존감이나 자부심이 있을까 생각했어요. 힘들다가 그걸 다 털었어요. 이직해야 하니까 두 달 정도 유예기간을 달라고 했어요.그리고 허허 웃으면서 정리했어요.”
“고생했어요.”
“재밌어요. 그래서 요즘 매일 얻어먹고 다녀요. 이제부터 만날 소고기 먹을 거라고. 사이는 좋아요. 농담도 하고요.”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벗어나 볼게요. 옛날 이야기 해볼게요. 초등학생 김민규는 어땠어요?”
“왕따였어요. 되게 소심했고요. 친구 별로 없고요. 괴롭힘을 당하는 왕따는 아니었어요. 무관심을 받았죠. 나를 싫어하는 건 꼭 짱 같은 애들이었어요. 중간계 애들이 절 싫어하면 조용히 있으면 되는데 젤 센 애들이 절 싫어했어요. 근데 꼭 걔랑 짝이 됐어요. 그래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전 좀 순수했어요. 애들 때니까요. 흙장난도 하고 놀았어요. 좋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생각해요. 초등학교 동창 이런 친구들 한 번씩 만나면 마음이 별로 안 좋아요. 참- 그때 그대로면 사이 안 좋은 걸 이해하겠는데 그대로 커서 서른이 돼 있더라고요. 제 첫 사랑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있었거든요. 고백하려는데 전학을 갔어요. 세이클럽이 생기면 그 친구를 찾고 카카오스토리여도 그 친구를 찾고. 뭐가 새로 생기면 그 친구를 찾고 그랬어요. 요즘 그 친구를 접하면 조금 애잔함 같이 그래요.이제 우리도 순순하지 않구나 그런 생각. 초등학생 때 노는 거 좋아했어요 진심. 동네 친구들하고 숨바꼭질 하고요. 저도 애들 많이 괴롭혔어요. 주로 여자들이요. 이쁜 애들. 그래서 절 다 싫어했어요. 나중에 알았는데요. 제 첫 사랑은 제가 싫어하는 줄 알았대요. 좋아해서 괴롭힌 건데. 부족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었어요. 조금 우울하긴 했지만요.”
“중학생은요?”
“조금 비슷해요. 왜냐면 초등학생 친구들이 그대로 같이 올라왔거든요. 여전히 날 괴롭혔고. 졸업하고 나서 사회 나와서 연락도 오고 그랬어요. 전 기억도 안 나요 그 애 이름이. 미안하다고요. 중학교 때인가부터 제 사촌하고 같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편했어요. 제 사촌은 공부도 잘하고 사람들 하고도 잘 지내고 운동도 잘하고 그랬어요. 좀 생김새가 닮았어요. 그래서 사촌이라고 하면 학교 생활은 편했지만 그래도 절 괴롭히는 애는 있었어요. 너무 싫어하는 애 한 명이 있었고요. 그리고 중학교 때 우울한 게 심했어서요.자살 시도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마음만 들 때였는데요. 이만한 집에 있는 식칼 가지고 어딜 찔러야 고통 없이 죽지 그런 걸 몇 번을 했어요. 교복을 입고 다녔고 아버지가 매일 차로 데려다 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좋았던 것 같아요. 귀찮으셨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하셨을까. 그게 자식 키우는 즐거움 아닐까 생각해요. 제가 양산 출신인데요. 학교가 지금 60년쯤 됐어요. 역사가 돼서요. 제가 들어갔을 땐 50년쯤 됐어요. 교장 선생님이 만날 50년 전통의 50년 전통의 그런 걸 많이 이야기 했어요. 우리 때까지가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에게 대들어도 사회적으로 그러면 안 된다는 정서가 있었어요. 사실 대들어도 애들 마음 속이나 부모님 속에서는 사회적인 인식으로는 선생님께 대들면 안 된다는 그런 것들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정말 생 양아치들 빼고는 선생님들과 사이는 다 좋았어요.”
“고등학생은요?”
“그때부터 제가 좀 피기 시작했어요. 공부를 못 하는 편이고 안 하는 편이었는데요. 그때 성적이라면 공고나 상고를 멀리로 가야 하는데요. 아버지께서는 절대 그런 걸 바라지 않았어요. 선생님이나 상담 선생님은 다 멀리 가라고 하셨어요. 경주 같은 곳으로요. 거길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아버지께서 학교를 안 보내면 안 보냈지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전 그때 용도에 있는 방송 기술 배우는 학교에 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마침 집 근처 새로 지어진 학교에 커트라인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제 동의 없이 그곳을 썼어요. 아는 친구들이라고는 제 사촌과 몇 명 빼고는 다 처음 보는 거예요. 절 괴롭히던 애들은 다 멀리 갔고요. 그때부터 피기 시작했어요. 방송부 아나운서를 시작했고요. 우리 학교 1회 축제 MC를 제가 봤어요. 욕을 엄청 먹었지만요. 절친이라는 친구들도 그때 만나고요. 많이 폈어요. 성격도 많이 바뀌고요. 그리고 전 예체능 반을 갔거든요. 2학년부터 문과 이과 예체능으로 나눴는데요. 전 문과도 싫고 이과도 싫었거든요. 전 방송 작가로 간다고 했어요. 그래서 예체능이라고 했어요. 예체능은 한 반이었어요. 거기가 체육 선생님이 담임이었는데요. 유일하게 통제가 안 되는 게 저였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전 방송 쪽으로 간다는데 체육 선생님이 도와줄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이 손을 놓는 건 아니었는데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야자 빠져도 뭐라고 안 하시고요. 야자 다 합쳐서 7일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야자 분위기가 굉장히 엄숙하고 잘 되어있는 곳이었거든요. 공부하려면 야자하는 게 맞아요. 그때 막 시립연극단 만든다고 거기 가서 연극하고 알바 하고요. 그런데 대학은 또 수시로 갔어요. 잘 가서 선생님이 잘못한 건 없어요. 잘 풀어졌어요. 축제 MC 보고 나서 방송부 그만 두고 사진부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축제 MC 노리는 애들이 되게 많았거든요. 축제 MC를 찾고 있는데 네가 할래? 그래서 제가 한다고 했던 건데요. 그래서 절 쫓아냈어요. 비운의 운명이었구나. 그때 방송국 쫓겨나고 많이 울었어요. 그래서 그게 트라우마가 돼서 서울 와서 회사 생활하고 지내면서 그때 생각이 많이 들어요. 애들이 무의식 중에 상처를 준 거거든요. 학교 지나가면서 방송부 애들 만나면 제가 죄인이 된 기분인 거예요. 걔네들 입장에서 누구를 쫓아낸 게 처음이라 합리적으로 못 했을 수도 있죠. 그때 제가 기계 막 부수려고 하고 그랬어요. 여자들은 합의를 하고 제게 나가달라고 이야기 했고 남자들은 놀랐어요. 그때 학교 끝나면 집까지 30분씩 걸어갔는데요. 거의 2주 동안 매일 울었어요. 억울하고 분하고. 펑펑 울었어요. 나가주겠어? 그래서 사진부로 옮겼는데 너무 좋았어요. 아버지 필름 카메라 가지고 다녔어요. 별 거 아닌 사진인데 다 늘어놓고 좋아하고요. 남은 게 많은 학교 생활이었어요.초등학교 중학교는 기억이 잘 안 나고요. 사촌하고 많이 비교를 당했거든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학생회장이고 그래서요. 방송부 라디오를 시작하고 축제 사회를 보면서 길이 달라졌어요. 서로 신경 쓰지 않았어요.”
“대학생 때는 어땠어요?”
“대학생 때? 대학교 가기 전부터 대전에 살사 동호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대학교 OT를 간다는 핑계로 동호회 전체 MT를 갔어요. 원래 그러면 안 되거든요.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원래 초급을 듣고 그러고 나면 서로 면이 있을 때 제안해서 가는 건데요. 가도 되겠구나 하고요. 저는 대학교도 수시로 합격했고 공주나 대전에 재밌는 거 없을까 하다가 살사 동호회를 찾았는데 개강 전에 그 동호회에서 MT를 간다는 얘기를 들은 거예요. OT를 핑계로 대전에 1주일을 먼저 올라가서 거길 갔어요. 웃긴 상황이에요. 동호회 분들이 보기엔요. 6개월 다닌 사람이 와야 하는 곳인데 100명이 있는 곳에 제가 갔고 막내였어요. 처음 보는 앤데 여길 온다고 해서 신청했을 때부터 사람들이 놀랐대요. 살사를 시작하면서 1학년 때 F 학점을 4개를 받았어요. 그래서 학사 경고 직전까지 갔는데 그건 안 받았어요. 살사 다니고 서울에 공연 보러 다녔고요. 첫 학기 시작했을 때 무전여행도 갔어요. 드라마 '부활'을 좋아해서요. 빨간 등대 하얀 등대가 있는 곳이 있어요. 제가 5만 원 들고 거기 가는 차비를 2만 5천 원을 썼어요. 거기서부턴 고난과 역경이었어요. 관광지인데 비수기여서 아무 데도 연 곳이 없고요. 버스 타고 트럭 빌려 타고 다니고 사람들이 무전여행이라니까 돈을 빌려주고 밥을 사주고 찜질방에 다니면서 그랬어요.
2학년부터는 그래도 열심히 다녔어요. 1학년 때는 정말 열심히 놀았고요. 1학년 때 그때 생각나는 게요. 천안에 있는 살사 동호회 5주년 파티였는데요. 가장 작은 게 홍삼이고 제일 큰 게 김치냉장고였어요. 그거 때문에 파티에 6-700명이 왔거든요. 동호회에 김치냉장고 공장에 다니는 분이 있어서요. 그때 제가 그 냉장고를 탔어요. 김치냉장고 '딤채'를 타와서 집에 보냈어요. 그때 이후로 ‘딤채’가 제 별명이 됐어요.
제가 들어간 과가 신설과였어요. 디지털방송과였어요. 애들이랑은 별로 안 친했어요. 질서도 없고 술만 먹어서요. 공부를 했으면 자주 갔을 텐데요. 그래서 외부 취미를 많이 했어요. 서울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면 못 할 짓들을 많이 했어요. 그때 버스가 서울까지 한 시간 걸리는데요. 학교 버스를 타도 되고요. 주말마다 갔어요. 그때니까 그랬죠. 선배들이나 동기들과 이야기 할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필드에 나와서 많이 만났어요."
“대학을 나온 다음은 어떻게 지냈어요?”
“대학을 나왔을 때 제가 20대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만드는 곳에 들어갔었는데요. 무보수였어요. 대표와 제가 아는 사람이었어요. 마케팅 팀장과 면접을 봤는데 코드가 잘 맞았어요. 당신들이 고시원비만 내주면 생활비는 제가 어떻게 해보겠다 했어요. 그래서 거기서 고시원비를 내주고 3-4개월을 다녔어요. 제가 운이 없다고 생각한 게 뭐냐면요. 그곳이 지금이면 스타트업인데요. 밤을 새고 미래 구상을 하는 시점을 지나고 제가 들어간 거예요. 초기 창업자들은 번아웃(Burn-out)이 돼서 제가 들어온 시점에 나가고요. 그런데 이 회사에 투자한 회사는 그때 이곳은 수익을 내야 한다고 광고를 따와야 한다는 분위기였어요. 제가 지금이라면 비디오머그 같은 영상을 만들려고 했는데요.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환경이었어요. 그러다가 회사를 나와서 백수를 지내면서 친구 집을 전전했어요. 집으로 내려갈까 하다가 공연기획사에서 인턴 일을 했어요. 정직원 제안을 받을 때에는 그 판이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일은 재밌는데 더 못 하겠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카페베네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그 분야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이래도 살겠는데'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저는 섹터를 다양하게 넘나들었던 사람이에요. 의도하지 않았지만요. 되도록이면 진짜 다양한 걸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노가다를 하다가 팟캐스트를 하다가 비즈니스 쪽을 하다가 그랬어요. 일을 하다보면 청년의 감수성이었다가 NGO 감수성이다가 그래요.
전 제가 뭐가 될지 모르지만요. 전 그래도 일을 배울 만큼은 다 해보고 나왔어요. 며칠 해보고 저하고 안 맞네요? 하고 나오진 않았어요.나도 월세를 내야 하고 카드값을 내야 하니까요. 당연히 일을 해야 하지만, 나쁜 일만 빼고 다 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제가 서울에서 주유소 알바를 하고 있으면 정말 뜬금없겠지만요. 주유소 알바는 밑에 내려가서 해도 되니까요. 서울에서 있으면서 묘하게 걸치는 다리가 있거든요. 라디오를 하기 위한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한 확실한 제 사업을 하기 위한. 카페 알바를 하더라도 여기에 그래도 있는 거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묘한 그런 게 있어요. 서른쯤 되면 지방으로 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요. 올 한 해 계속 그 생각을 해보려고 해요. 왜냐면 집이 계약이 1년 정도 남았거든요. 지금 집이 되게 좋거든요. 지금 집에서 10년 살라면 10년 살겠어요. 결혼 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올해나 내년에는 결혼을 할 계획이었지만 지금 결혼은 뭐 헤어졌으니 파토가 났고요. 결혼하면 한 단계 성장하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아쉽죠. 나는 내가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어요. 나 하나는 먹여 살린다는 걸 알았어요. 결혼을 하면 다른 사람을 먹여 살리고 다른 도리를 해야 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더라고요.
생각보다 서울 온지 얼마 안 됐어요. 5-6년밖에 안 됐어요. 대단한 걸 이뤄야겠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지만 요즘은 제 평범함을 받아들이려고 해요. 먼지 같은 존재라는 걸 많이 느끼고 있어요. 솔직히 친구들과 자기고백 같은 걸 하면요. 전 어릴 때부터 제가 평범함을 받아들이기 싫어했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전 평범한 걸 피해갔어요. 그렇다고 제가 학생회장 한다거나 시민운동 한다거나 하진 않았지만요. 그래서 제가 있는 모임에서는 저 같은 사람이 없거든요. 그래서 모이면 제가 있고 없고 차이가 굉장히 커요. 제 친구들 다 직업 군인이거든요. 전 공익인데 그래도 고생담은 제가 제일 많아요. 그래서 최근까지 그걸 받아들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제가 평범한 사람이고 미미하고 먼지 같은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기 정말 힘들었어요. 별거 아니구나 나. 스스로 뽕 맞는 듯 위안을 삼고 자기 위안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걸 안 하고 있는 요즘이죠. 난 평범해. 난 평범한 걸 받아들이기 싫었던 사람이야. 이렇게 정의되고 있죠 요즘. 전 팟캐스트를 하고 그런 걸 어디서 배웠네 뭐 그런 게 특이하다고 사람들이 말하고 그러지만 그냥 전 그냥 당연한 거거든요. 그냥 하는 거거든요. 되게 어려운 일을 아무렇게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전 그런 사람이 될까 그런 생각을 요즘 하고 있어요.”
“요즘은 그래서 어떻게 지내요?”
“요즘은 그래서 몇 가지 구상을 많이 하고 있는데요. 일을 그만두면 늘 회사 하나 차릴까 싶은 병이 늘 오거든요. 그래서 우리 회사 대표님은 우리는 사무실 빌려주고 법인 만들어주는 게 일이니까요. 도와준다고 하더라고요. 여름 때까지 알바 하면서 목돈이나 좀 만들까 생각해요. 이제 추울 땐 지났으니까요. 추울 때 쫓겨나면 억울하니까요. 우리 집은 채광이 잘 들기도 하고요. 요즘은 이것저것 구상을 하고 있어요. 내년에는 유럽에서 하는 라디오 국제 컨퍼런스도 갈 거고요. 올해는 당장 다음달에 행사라서 못 가고요. 유럽 라디오 시장의 미래 같은 걸 다루는 곳인데요. 전 팟캐스트를 사실 우회해서 하는 거거든요. 라디오를 하고 싶은 마음을 돌아 돌아서 하고 있는 건데요. 그런 부분을 공부하고 있어요. 본업을 하면서 라디오를 하는 게 쉽지 않아서요. 그런데 해외는 라디오만 하는 것들에 대한 시장이 있어서 실제 그쪽 모델이 한국에서 가능할까 생각해요. 팟캐스트 네트워크가 제가 좋아하는 부분이 다 있거든요. 각자 컨텐츠들이 있으면서 네트워크를 연대하고 광고를 받고 수익을 만들면 다 할 수 있거든요. 해외는 이 시장이 분명 커지고 있거든요. 잘 만들면 이 모델을 잘 꾸리면 어느 땐 tvN에서도 인터넷 라디오 채널을 만들지 않을까. 그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서 내년에 그 컨퍼런스를 가려고 영어와 이태리어를 공부하고 있고요. 그 비행기 티켓을 마련하려고 알바를 하고 있거든요. 거기 가면 국제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거든요. 작년에 그 행사에 우리나라 PD가 두 명밖에 안 갔다고 해요. 올해는 더 간다고 하지만요. 가서 들어야 아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요. 제가 좋아하는 일이니, 어쩌면 끝까지 물고 늘어질 수 있지 않을까 느낌이 들기도 해요.”
“앞으로는 어떨 것 같아요?”
“조금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사실 지금도 제가 살고 싶은대로 살긴 해요. 살고 싶은대로 사는데 여유가 없는 거죠. 그게 금전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말이죠. 턱밑까지 올라와도 제가 살고 싶은대로 사는 거죠. 가고 싶은 데 가고 먹고 싶은 거 먹고는 있지만요.나이 들면 그런 여유는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살고 싶은대로 살지만 좀 여유 있는. 전 그 장면이 좋았는데요. 미생에서 보면요 장그레가 오과장과 피티(PT)를 하고 나서요. 우리는 상사맨이잖아. 그렇게 하는데요. 그 회의를 주관하면서 들었던 사장이 그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회의 끝나고 나가면서 골프 약속이 있었는데 오늘은 회사에 좀 있고 싶다 기분이 좋으니까 그러면서 약속을 미루는 거예요. 회사에 더 있고 싶다면서 말했던 그 여유가 좋았어요. 그건 직급이나 직함이 아니라 나이나 경험보다는 그 마음의 여유. 회의하러 모였는데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요 하면서 산책도 조금 할 수 있는 여유요. 어떤 것이 되었던지요. 누군가 상담해 줄 때도 세상 빡시게 살아야 돼! 세상이 얼마나 힘들지 알아? 그러는 게 아니라요. 그냥 안 그래도 돼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나 같은 사람을 많이 만들어서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게 목표예요.”
“버킷리스트처럼 해봐야겠다 싶은 일들이 있어요?”
“이탈리아 베니스에 가서 5년 정도 가서 사는 거요. 베니스나 그리스나. 세계일주 이런 건 바라지 않고요. 그곳 게스트하우스 그런 곳에서 일하면서 여행객들 계속 만나면서 있다가 오고 싶어요. 정말 좋겠어요. 되게 당연한 건데요. 진짜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좋겠어요.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왜인지 모르겠지만요. 전 결혼은 하긴 할 거 같거든요. 기왕이면 정말 좋아하는 사람하고 어떤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는 결혼을 하고 싶어요. 내가 있으면 그 사람이 의지되고 그 사람이 있으면 내가 의지가 되고요. 우리 아버지처럼 우리 부모님처럼 하고 싶어요.”
“이상형은 어때요?”
“오연수요. 전 이거 확실 하거든요. 손지창 와이프 되시는 분이요. 지적이고 가끔은 섹시하고. 단발머리가 엄청 잘 어울리는 사람이요.제 이상형이에요. 짧은 머리가 잘 어울려야 해요. 지금은 거기까지 욕심내진 않아요. 아니 나는 오연수 그리고 단발머리까지는 지금도 욕심 부리지만요. 사실 하나가 더 있었거든요. 하의실종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요즘은 하의실종은 이제 포기했어요. 이제 그런 사람은 못 만나겠구나 생각해서 뺐어요. 오연수 씨처럼 지적으로 보이면서 짧은 머리도 어울리면서 장난을 치고 싶으면서도 안 드러내도 섹시한 거 있잖아요. 그런 사람이 그런데 있더라고요. 사실 아이리스2가 너무 재미없어서 싫거든요. 그런데 오연수 씨가 나와서 다 챙겨봤어요. 어떤 계기로 오연수 씨를 알게 됐는데요. 뭐지 이 사람, 이렇게 생각했어요.”
“본인에게 죽는 건 어떤 의미 같아요?”
“언제든 올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제발 고생 좀 안 시키고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누가 됐든지. 마음고생이든 수발이든. 제가 아시는 분이 웰다잉(Well-Dying)이란 주제로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죽음을 준비하는. 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냥 되게 사람들 고생 안 시키면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사고가 나서 병원 신세지고 산소마스크를 써야 하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의향서 쓰는 게 있는데요. 예전에 제가 그걸 썼어요. 좋을 때 행복할 때 죽었으면 좋겠어요. 혹시라도 공중파 PD가 돼서 첫 방송을 하게 되면 그때는 그 다음에는 죽어도 좋겠어요.”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괜찮다 지금도. 지금 자체로도 충분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있으세요?”
“그 말도 똑같아요. 스스로가 모자란다고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다 괜찮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저한테도 많이 하려고 해요. 조급해 하는 건 자유지만 그렇게까지 자기 삶을 갉아먹을 필요는 없잖아요. 스스로 채찍질 해서 발전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해요. 스스로의 노력으로 부자가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해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거든요.”
“우리는 어떤 일상을 살아야 할까요?”
“현재를 살아야죠. ‘필리버스트’를 하면 그걸 봐야 해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이고 현재 문제가 무엇인지 그걸 외면하지 말고 봐야 해요. 누구나 땅을 딛고 살잖아요. 뒤늦게 이야기 해줘야 해요. 그때는 그런 일이 있었어 그때 그 사람들 노력했어 하고요. 그래야 자식을 낳아도 해줄 말이 있어요. 대단하지 않아도 현재를 살아야 해요.”
“그런 말을 듣게 되잖아요. 민규 씨 잘 지내요?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 것 같아요?”
“그냥 살죠.”
“그래요. 여기까지예요. 아, 더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박준우 씨 있잖아요. 마스터 쉐프 코리아 2등 하고 냉장고를 부탁해 나온 분이 있어요. 그분이 인터뷰 하면서 그런 말을 했어요. 당신은 글도 잘 쓸 줄 하고 기자인데 요리도 잘 하고 벨기에도 살고 오고요. 어떻게 그렇게 된 거예요? 물었어요. 그러니까 박준우 씨가 ‘그냥 살았어요.’ 말했는데요. 그냥, 되는대로 살았다는 그 말이 멋있었어요.”
우리 모두 멋진 사람들이야 너무 멀리서 대단한 걸 찾지 마, 없어.
일상 속 대단한 만남 「목욕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