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아는, 모두가 앓는, 피할 수 없는 그 지독한 열병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사실 너무 길고 구구절절하며 구차해 보일 수 있지만 흔한 이야기입니다. 사랑 이야기. 간단한 이야기이기도 하죠. 저는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해도, 결국은 예, 그렇습니다.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저는 농노 출신입니다. 물건 취급받는 노예보다는 낫지만 땅에 묶인 부속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사실 땅만 벗어나지 않고 성실히 농사만 짓는다면 자유민과 큰 차이도 없습니다. 자유민이라고 땅을 쉽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요.
물론 자유민보다 세금을 많이 내고 권리도 제한당했지만 사실 백성들에게는 어떤 영주가 오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죠.
좋은 영주라면 농노에게도 큰 제한이 없었고 악독한 영주라면 자유민이라도 억압을 받았으니까요.
다행히 제가 태어난 자작령은 좋은 영주에 속했습니다. 자작님은 스스로를 목장주라고 부르곤 하셨습니다. 울타리 안이 풍족해야 목장 안의 동물들도, 목장주도 모두 행복해진다고 하셨죠. 자작령의 모두가 자작님을 좋아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죠.
그녀는 그런 자작가에서 모두에게 사랑받고 자라난 영애였습니다. 땅을 벅벅 기는 제가 감히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분이었죠.
어느 날 나들이를 가던 그녀가 잠시 쉬기 위해 저희 마을에 들렀을 때 처음 봤습니다. 햇볕에 타서 시커멓고 붉게 익어버린 저와는 다르게 하얀 사람. 이쁘더군요. 웃는 것만으로 주변을 화사하게 만드는 듯했습니다.
그녀는 마을의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주고 놀아달라고 달려드는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깨끗한 옷에 아이들의 때 묻은 손이 닿아도, 흙투성이의 강아지가 먼지를 묻혀도 신경 쓰지 않고 활짝 웃어 보였습니다.
주변의 기사나 하녀들은 그런 그녀가 신경 쓰이는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미소 짓고 있었죠.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게 하는 사람.
참 예쁘고 착해 보였지만 저와는 딴 세상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신경 쓰이는 마음을 툭툭 털어버렸죠. 일부러 관심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녀가 떠나는 날 촌장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탄 마차가 마을 입구의 진창에 빠졌다고 하더군요. 길이 꺾이는 지점이라 소나 말이 끌어내기가 애매한 곳이라고.
저는 개간작업을 멈추고 촌장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진창에 빠진 마차를 들어서 옆의 평평한 곳에 내려두었죠.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어요. 힘쓰는 저를 처음 본 호위들은 입을 떡 벌리거나 눈을 크게 뜨고 있었죠. 그때 그녀가 다가왔습니다.
“우와. 힘 진짜 세네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 네. 말 편히 하시지요. 아가씨.”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힘이 셀 거 같기는 했어도 마차를 가볍게 드는 걸 보니 너무 놀랬어요. 아저씨! 대단해요!”
내 팔뚝을 꾹꾹 눌러보며 말하던 그녀가 활짝 웃었습니다. 세상에 오로지 그녀만이 있는 것 같더군요. 눈을 뗄 수도 없고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멍청하게 대답도 못하고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하고는 마차에 올랐죠. 그녀가 마차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저는 중얼거릴 수 있었습니다. 나 아저씨 아닌데.
그녀를 호위하던 기사 하나가 저에 대해서 촌장에게 물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곤 제 나이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제 열여섯. 성인 취급보다는 애송이 취급을 받는 나이. 그리고 세상 밝기만 한 그녀보다 겨우 한 살이 많은 나이. 덥수룩한 턱수염에 어지간한 성인 남자보다 머리 하나는 큰 제가 애송이라고 하니 놀랐다고 하더군요. 그리곤 그 기사가 제 힘이 아깝다며 눈을 빛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기사가 저를 보며 눈을 빛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의 활짝 웃는 얼굴이 제 가슴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어떤 이야기도 들리지 않더군요.
눈치 빠른 촌장은 제 팔을 두드리며 한참이나 웃었습니다. 네 나이 때에는 그럴 수 있다면서요. 그분은 이 땅의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서요.
“사랑은 불길이란다. 게다가 첫사랑은 마음이 겪는 처음의 불이기에 가장 화려하고 빠르게 타오르지. 처음 겪는 그 열기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단다.
너무 뜨거워 불안하고 무서운데,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고 멀리 떨어지고 싶지도 않지. 제 몸을 태울 걸 알면서도 그 안까지 들어가고 싶어지고, 심지어 잘 꺼지지도 않아요.
그렇지만 다 지나간단다.
네 마음을 모두 태우고 나면 그 불길도 사그라질 거야. 불이 난 들판 위에서 더 비옥한 작물을 얻을 수 있듯이, 네 마음도 더 단단해질 거란다.”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촌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떠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촌장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게 아니었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촌장이 제게 ‘첫사랑’이라고 말한 것에 고개를 끄덕인 거죠.
이게 사랑이구나.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가슴이 미어지는 이게 사랑이구나, 싶었던 거죠.
며칠이나 멍하게 지냈습니다. 일이야 몸에 배어 있으니 어떻게든 한다고 해도 정신을 차리면 하루가 지나있곤 했습니다.
흐릿한 하루들 속에 오직 그녀만이 오롯하게 기억이 나더군요. 그녀의 향기, 웃는 모습, 흩날리던 머릿결까지. 첫사랑의 불이, 그 열기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촌장의 말을 그제야 이해했습니다.
그녀가 떠난 후 몇 주가 지나고 은퇴한 노기사가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호위기사에게 여기 힘 좋은 애송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자질이 괜찮다면 말년에 심심풀이로 가르쳐볼 생각이라고.
다들 축하해 줬습니다. 기사의 종자가 되어 운이 좋으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다른 의미로 기뻤습니다. 그녀의 호위에게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노기사. 어쩌면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주 어쩌면, 제 이야기가 그녀에게까지 흘러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녀가 떠난 이후 흐릿하던 하루하루가 조금 선명해졌습니다. 노기사의 교육은 엄격하고 어려웠습니다. 기사의 종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에 맞춰 나를 깎는 일이었습니다.
경험 많은 노기사는 제 한계를 귀신같이 알고 끝의 끝까지 밀어붙이곤 했죠. 그런데도 할만했습니다. 기사가 되려면 영주성에 가봐야 할 테고 그러면 그녀를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죽겠다고 쓰러졌다가도 그녀가 떠오르면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노기사의 가르침이 고될수록 그녀는 선명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웃을 수 있었죠.
그런 저를 보며 노기사는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때때로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에잉. 젊은것들이란. 그래도, 좋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