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을 물들이는 모든 추억에는 처음이 있다, 시작이 있다
쁘니의 산책은 대부분 할머니와의 추억이 깃든 동네에서 이루어졌다.
할머니와 걷던 길을 조용히 걷다가 해가 중천에 떠서 뜨거워질 때면 놀이터의 나무 그늘이 드리운 벤치에서 고로롱 하며 잠시 그 따뜻함을 즐긴다. 그러다 해가 살짝 넘어간다 싶으면 다시 동네를 순찰한다.
시기는 항상 꽃이 피고 지는 늦봄이나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여름. 그런 쁘니를 따라다니는 입장에서 에미는 산뜻한 나들이 복장을 자주 입을 수 있어서 만족하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정해진 산책길이기에 오늘도 가벼운 나들이 복장을 입고 나섰던 에미는 문을 나서자마자 한기가 도는 바람이 불자 그대로 멈춰 섰다.
먼저 걷던 쁘니가 의아하다는 듯이 돌아봤지만 에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부는 바람에 에미는 얼른 뒷굽을 부딪혀 따뜻한 옷으로 바꿔 입었다. 추운 곳으로 갈 거면 미리 이야기해 달라고!
에미가 떠들거나 말거나 화를 내며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본 쁘니는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 씩씩대던 에미는 이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자주 산책을 가던 할머니의 동네가 아니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혼자서 꿍얼거리며 몇 번이나 두리번거리던 에미의 귀에 희미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쁘니는 귀를 쫑긋 하더니 노래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걸었다.
구불거리는 주택가를 지나 조금 넓어진 곳에는 작은 공터가 있었다. 그 너머로 아파트 입구가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북적거리는 시장 입구가 보였다.
그 모든 곳이 이어지는 공터였기에 자그마한 공원도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곳에 몇몇 사람들이 노래를 들으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한 청년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쁘니는 노래에 맞춰 꼬리를 살랑이다가 에미가 다가오자 훌쩍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쁘니를 어깨에 올린 채로 사람들 사이에 앉은 에미는 청년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쁘니가 ‘이바구’에 오기 전에 거북이 이야기를 해주었던 청년이었다.
타오르는 불 속에 거북이를 두고 온 것인지 꿈을 두고 온 것인지 헷갈린다던 사내.
언젠가 쁘니에게 별처럼 빛나는 꿈을 노래하는 청년이 있었다고, 숨어있던 무거운 거북이 등껍질은 내다 버리고 별을 노래하는 빛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놀라서 돌아보는 에미의 시선에 쁘니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청년의 노래에 집중했다.
박자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천연덕스럽게 꼬리를 지휘하듯 휘두르는 그 모습에 에미는 그냥 설풋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산책인데 어디로 간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에미는 눈을 감고 그 음악을 온전하게 받아들였다.
예전 청년이 이야기를 풀어놓던 날 보았던 빛나던 별과 은은하게 세상을 밝히던 보름달이 떠올랐다.
그 고즈넉하고 은은한 풍경 사이로 통통 튀는 듯 약간 높은 목소리가 하늘을 날던 거북이처럼 어색하면서도 이색적으로, 또 묘하게 몽환적으로 어울리며 울려 퍼졌다.
사람의 마음을 몽글거리게 만드는 음악이었다.
춤추듯, 혹은 미끄러지듯 이어지는 그 음악이 끝나고 잠시 떠나가는 음악의 뒷모습을 음미한 후에 에미는 힘껏 박수를 쳐 주었다. 쁘니도 꼬리로 에미의 어깨를 탁탁 소리 나게 쳐서 박수소리에 보태주었다.
노래를 부른 청년은 환하게 웃으며 감사를 표하고는 한쪽에 앉아 있는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희 어머니는 항상 걱정이 많으십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회사를 다니는 지금에도, 집에서 나설 때면 차 조심해야 한다, 빠트린 것 없이 다 챙겼니,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하고 말해주십니다.
처음 버스킹을 한다고 했을 때도 어머니는 걱정이 많으셨어요.
그거 불법 아니니,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면 안 된다, 그거 괜찮은 거 맞니? 하고요.
그런데 지금은 누구보다 응원해 주십니다. 버스킹을 하면서부터 제가 밝아졌다고 하네요. 재밌는 일을 하니까요. 게다가 어머니가 응원해 주신 이후부터는 더 즐거워졌습니다. 그래서 막막 신나요.
이렇게 신나게 노래 부르는 순간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오늘은 어머니를 초대했습니다. 오늘은 칭찬만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들은 말이 있어요. 모두 다 아시는 말일 텐데.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머니, 저는 정말 노래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어머니가 좋아요. 그래서 이번엔 어머니를 위한 곡을 부를게요.”
청년은 웃으며 말을 마쳤다.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는 부끄러운 듯 얼굴이 발갛게 변했지만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청년의 모든 모습을 눈에 담겠다는 듯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에미는 늘어난 박수 소리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청년의 주변을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감싸고 있었다. 그들 모두 즐거운 분위기였다.
조용히 시작하는 음악도 왠지 흥겹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충동적으로 에미는 말했다.
“쁘니야. 고마워. 노래도 좋고 이런 분위기도 너무 좋네. 덕분이야.”
쁘니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에미에게 얼굴을 비벼왔다. 살랑이며 휘어지는 꼬리가 기분 좋게만 느껴졌다.
그 따스함 너머 청년을 둘러싼 관객들 사이에 한 노인이 보였다. 어색하게나마 옆에 선 부인과 아이들에게 연신 말을 걸어보려는 노인.
대부분 뻘쭘하게 말을 멈추고 혼자 서 있었지만 때때로 아이들과 부인이 말을 받아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노인은 반색하며 웃으며 얼른 말을 이었다.
그 어색하고 어설픈 모습에 에미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쁘니가 알고 온 것인지 모르고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쁘니의 ‘간절함’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있었기에 에미는 아주 환하게 웃었다.
그 기쁜 웃음에 화답하듯 쁘니는 평소와 다르게 에미의 얼굴을 보듬어주었다.
바람이 살짝 차게 느껴지는 오후였지만 왠지 아까와는 다르게 춥게 느껴지진 않았다.
추억은 남겨지는 것이라 결국 마음으로 스며들고 만다.
그것이 슬픈 추억이라면 지워지지도 않아서 손에 닿을 때마다 울컥 눈물을 쏟아내고 말지만 그 위로 따뜻한 추억이 스며들면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 되기도 한다.
사라진 거북이는 희망의 노래가 되었고 빛나는 목소리는 어머니를 웃게 했으며 그 둘의 이야기는 어색하게나마 용기를 낸 노인의 등을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 보여 준 쁘니에게 에미는 감사를 담아 배방구를 선물했다.
몇 번의 배방구를 참아내던 쁘니는 이내 냥펀치를 꺼내 들었고 익숙한 냥펀치에도 에미가 물러서지 않자 에미의 머리를 살짝 깨물기까지 했다.
그 익숙한 폭력과 꼬순내에 쁘니에게서 떨어진 에미는 여전히 따뜻한 음악과 빛나는 목소리와 이 몽글거리는 오후의 분위기에, 이 모든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