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아는, 모두가 앓는, 피할 수 없는 그 지독한 열병에 대하여
노기사의 체계적인 훈련 덕인지 몸은 쑥쑥 자랐어요. 다른 성인들보다 머리가 두 개는 큰 덩어리가 되고 나서야 노기사는 저를 앞두고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저를 태우고 달릴만한 말이 있어야 마상 훈련을 시작할 텐데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그런 말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으니까요.
마을의 노새나 마차를 끄는 말들은 저를 태우기도 힘들어했고 혹은 태우더라도 몇 걸음 걷기 전에 꾀병을 부리곤 했죠.
노기사는 여러 방면으로 말을 구해보려 했지만 저를 태울만한 말은 구하기가 어렵다는 대답뿐이었어요. 말을 구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게 제 훈련은 순조로웠습니다.
노기사가 평생 다뤄온 무기술은 날렵하게 검을 날리고 단단하게 방어하며 순간의 재치로 상대의 검 뒤편을 노리거나 상대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종류였습니다.
상대의 틈을 노리는 그 무기술이 제 큰 몸뚱이와 괴력을 만나니 좀 다른 방향으로 무서운 무기술이 되었죠. 틈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방패를 때려 빈틈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쓰는 방식이 달라지니 쓰는 무기조차도 전부 새로 만들어야 했어요. 말년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것이 생겼다며 노기사는 즐거워했지만 저는 피곤했습니다. 매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실험해봐야 했으니까요.
시간이 흘러 저는 제 힘과 제 덩치를 어떻게 싸움에 쓰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노기사는 묵묵히 검을 휘두르는 저에게 욕을 해서라도 상대를 흔들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었어요. 훈련이 지속될수록 이게 무기술을 배우는 건지 욕을 배우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욕을 먹어가며 무기를 휘둘렀죠.
몸을 혹사시켜 가며 욕을 듣고 있자니 항상 정신이 멍해져서 그녀 모습만 떠올랐어요. 힘이 세다며, 대단하다고 말하며 다가오던 그녀의 모습, 웃으며 마차를 타고 떠나가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죠.
제가 훈련하던 공터에는 언제나 욕을 하는 노기사와 욕을 먹으며 히죽거리고 있는 제가 있었죠.
그렇게 제가 열여덟이 되었을 때 그녀가 저희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그 사이에 저는 키도, 덩치도 더 자랐어요. 그렇게 제가 변해버린 만큼 그녀는 더 아름다워진 것 같더군요.
훈련을 마치고 돌아보는데 그녀가 훈련장 공터 입구에 있기에 그대로 멈춰버렸습니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봄내음도 그녀와 함께 다가왔죠.
약간 붉은빛이 도는 금발머리에 파란 리본을 하고 있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죠. 땀에 젖은 옷이 부끄러워 슬쩍 고개를 숙였던 것 같네요.
뒤늦게 다가온 이들이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저는 오직 그녀만 보여서 뭐라고 하는지는 듣지도 못했습니다. 아마도 걱정하는 말인 것 같았어요.
그럴 만도 하죠. 이제 저는 남들보다 머리가 세 개는 큰 사람이니까요. 이제 어지간한 말이나 소도 제가 다가가면 겁부터 먹는걸요. 전설 속에서 들었던 괴물들이 이 정도로 컸을까요. 자고 일어나면 아직도 더 자라 있을까 봐 가끔은 무섭기도 했으니까요.
그녀는 웃으며 제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그 파란 눈동자로 제 눈을 빤히 바라봤습니다. 제가 고개를 돌리면 얼른 따라와서 제 눈을 바라보더군요.
저는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그녀의 코와, 입술과, 턱 끝과, 그 찬란한 파란 눈 사이의 눈썹 끝을 바라봤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저를 보던 그녀가 키득거리며 말했어요.
“예전에 저를 구해준 아저씨 맞죠?”
“아, 네.”
아저씨는 아니지만 이번에도 아저씨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녀의 동그란 코가, 도톰한 입술이, 보드라워 보이는 턱 끝이, 잘 다듬어진 그 눈썹이 모두 다 예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거든요. 제가 무슨 대답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군요.
“대박. 저랑 한 살 차이 난다면서요? 근데 왜 그래요? 그 수염 때문인가?”
“죄, 죄송합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녀를 웃게 했고 저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도망가고 싶어 졌어요. 노기사의 훈련 덕에 어떤 적에게도 기죽어 본 적이 없었는데 숨까지 턱 막히더군요.
그런 제 모습이 신기한 것인지 아니면 웃긴 것인지 그녀는 웃으며 자꾸 제게 말을 걸었어요. 문제는 제가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거였죠.
머리가 하얗게 된 상태로 기억도 못할 대답들을 하고 있었을 때 노기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곤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죠.
“아가씨. 여전히 호기심이 먼저로군요. 저를 먼저 찾으셨어야죠.”
“에이. 경은 매번 보던 사람이잖아요. 이렇게 큰 기사님은 처음 보는 데다가, 소문이 워낙 많아서 궁금했단 말이에요.”
그녀가 제 소문을 궁금해했다는 말이 귀를 때리는 느낌이라 정신을 조금 차렸어요. 그렇게 정신을 조금 차리고 나니 주변 상황이 보이더군요.
노기사는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고 그녀의 수행원들은 그녀의 곁에서 노기사와 눈으로 아는 척을 하더군요. 그녀와 살갑게 말하고 있는 것이 둘은 아주 편한 사이처럼 느껴졌고요.
노기사는 슬쩍 저를 끌어다가 그녀와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순간만큼 노기사님이 위대해 보이고 고마워 보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배운 예법을 겨우 떠올려 그녀에게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치마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마주 인사를 건네왔습니다. 그리곤 다시 웃음을 터트렸어요. 노기사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말했습니다.
“멍청아. 그거 춤 신청할 때 하는 인사잖아. 그리고 인사하는 손발이 반대 방향이다.”
그녀는 떠나가는 순간까지도 한참이나 웃었어요. 사실 그래서 그녀와 대화를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제가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웃음이라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으로 나들이를 가던 중이었다던 그녀는 제 이름을 듣고 웃으며 떠나갔어요. 아마 제 이름을 잊기는 어려울 것 같다면서요.
별 뜻 아닌 말이었겠지만 제게는 별 뜻있는 말처럼 들렸어요. 아닌 걸 알면서도 그 말을 곱씹으며 매일 상상하고 그녀를 떠올렸죠.
노기사는 저를 보면서 저거 중증이네, 하고 중얼거렸지만 저는 괜찮았습니다. 이런 병이라면 더 깊어져도 좋을 것만 같았으니까요. 언제까지나 낫고 싶지 않은 병이었어요.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저는 다른 곳에 퍼져 있다는 제 소문을 들을 수 있었어요. 거인 기사. 거인의 피를 이은 기사. 그리고 더 많이 알려져 있다는 반푼이 기사지망생.
제가 말을 탈 수 없을 만큼 크고 무거운 덕에 기병전에 쓸모가 없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엔 반푼이라는 말이 더 널리 퍼져 있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들었다던 소문에 대해 노기사는 크게 신경 쓸 것 없는 이야기라고 했지요. 조금 신경 쓰였지만 이내 마음에서 털어냈습니다.
어차피 누가 뭐라고 하던 저는 얼마 전까지 땅이나 일구던 농노였으며 지금도 가르침은 받고 있지만 신분상으로는 농노이니까요.
노기사는 제가 사는 곳이 자작령의 장원이기에 나중에 자작님께서 직접 보시고 면천을 해주실 거라고 했어요. 사실 편지를 통해 반쯤은 허락을 받은 상태라고.
사실 자작령의 기사들이 거의 대부분 저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고 있다고 했어요. 노기사는 그만큼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며 자작령 기사들의 스승 격인 존재라고 말했지만 저는 그냥 그러려니 했어요.
사실 허풍이 심하긴 해도 노기사가 자작에게 편지를 보낸 이후 저는 더 이상 농사일을 하지 않아도 됐거든요. 그것만으로도 그가 대단한 기사였다는 걸 알 수 있었죠.
그리고 한 달 후.
전쟁이 터졌어요.
엄밀히 말하면 침략을 당했죠. 자작령에 동원령이 떨어졌을 때는 이미 적이 왕성 근처까지 도달했다고 했어요. 노기사는 전신갑옷을 차려입고 저를 대동하고는 자작님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달려갔어요.
그리고 불타는 자작성을 마주했죠.
전투가 끝나지 않은 듯 아직도 비명소리와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가득한 그곳으로 우리는 뛰어들었습니다. 노기사는 저를 돌아보며 말했어요.
“나는 말년이라 괜찮아, 너는 슬쩍 봐서 빠져!”
“제 덩치가 어디로 빠져요. 말 뒤에 서 있어도 상체가 그냥 보이는데. 숨긴다고 숨겨지는 걸 숨기라고 해야지.”
“이 새끼가 말만 늘어가지고. 일단 가자! 가보자!”
노기사가 달려들고 뒤를 이어서 제가 들이치니 약탈에 정신 못 차리던 녀석들이 혼비백산 흩어지더군요. 중간중간 모여서 농성하던 기사나 병사들을 만날 때면 노기사는 한쪽으로 모이도록 지시해서 퇴로를 열어두려 했어요. 다행히도 노기사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서 금방 지시를 하고 이동할 수 있었죠.
그리고 안쪽 성까지 이동했을 때 피투성이가 돼서 탈출하는 자작일행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화살을 맞은 자작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자작의 딸인 그녀는 평소의 발랄하고 화사한 모습은 어디 두고 잔뜩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제 가슴을 너무 아프게 했습니다. 멍하니 그녀만 보고 있자니 노기사가 제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어요. 정신 차려! 지금 그럴 때야?
우리가 왔던 길을 거슬러 가다가 적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걸 깨달은 이후에 노기사는 다른 기사 하나를 불러 지금까지 길목을 지키라고 했던 병력에게 후퇴를 전달하라고 명했어요.
산 너머 마을 근처의 숲에서 다시 만나자고. 그리고 우리는 노기사가 알고 있다는 성의 뒷길을 통해서 이동했어요.
가끔 우리를 추격한 기사를 만날 때도 있었죠. 그들은 뭐가 그리 궁금한지 먼저 자기 이름을 말하고 제 이름을 물었어요. 그때마다 저는 사람 키만 한 대검을 한 손으로 휘둘러서 답해줬죠.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전쟁터의 소음은 제게 욕을 하거나 상대와 말을 섞을 여유를 주지 않았아요. 제게는 모든 순간이 긴박하게 느껴졌으니까요.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이, 겁먹은 그 눈망울이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자고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전투망치를 꺼내 들고 적들에게 달려들었어요. 방패로 막으면 방패를 날리고 검을 맞대면 검을 부쉈어요. 단 한걸음도 낭비하지 않고 오로지 달려 나가는 것에만 신경 썼죠.
그저 그녀의 얼굴에 다시 화사함이 깃들길 바랐어요. 저 겁먹은 얼굴은, 그 슬픈 얼굴은 보기가 싫었을 뿐이었죠.
자작성을 돌파하고 성밑 마을을 피해 산 하나를 넘어 적의 추격을 떨쳐냈을 때 저는 날이 망가져버린 검을 내려놓았어요.
뒤따라온 병사들은 아무 데나 주저앉았고 노기사와 몇몇 살아남은 기사들이 자작을 둘러싸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죠.
그리고 끝내 숨을 거둔 자작을 붙잡고 그녀가 울고 있었어요.
웃는 얼굴만 기억하던 제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날이었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꺽꺽거리며 우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슬펐어요.
그 커다란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리 죽여 오열하는 그녀의 모습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죠.
아니, 사실 그녀의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는 것에 슬펐는지도 몰라요. 몇 시간이나 싸우면서도 떨리지 않던 손이 떨리고 다리가 풀려 서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녀의 세상이 무너지던 날, 제 세상도 무너지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