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아는, 모두가 앓는, 피할 수 없는 그 지독한 열병에 대하여
자작님이 돌아가시고 기사들은 혼란에 빠졌죠. 노기사가 있었기에 기사들이 흩어지진 않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을 거란 걸 모두 알았습니다.
일단 흩어져있던 병사들을 수습하고 주변의 상황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수도가 포위되었고 수도를 구원하기 위해 나선 귀족들의 군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죠.
노기사에게 눌려있던 기사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통일되지 않은 목소리였기에 저항도 항복도 쉽게 결정하지 못했죠.
소란스러운 회의 자리의 구석에는 항상 그녀가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고개를 숙이고 그 소란을 묵묵히 받아들였죠.
저는 노기사의 뒤에서 그녀를 바라봤습니다. 기사들이 말하는 정세며 정황이며 돌아가는 형세 같은 이야기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그녀가 가혹한 이 상황을 잘 버텨낼 수 있는가 뿐이었습니다. 흐지부지 회의가 끝나가려는 차에 자작성의 상황을 살피고 온 정찰병이 도착했습니다.
성 앞에 시체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미처 탈출하지 못한 이들을 처형해서 전시해 두었다고.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기사들을 바라보았지만 기사들은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녀를 외면했죠. 이건 누가 봐도 단체로 탈출한 기사들을 잡아들이려는 함정처럼 보였으니까요.
노기사만이 침착하게 정찰병에게 물었습니다. 보고 온 상황을 정확하게 알아야 작전을 짜거나 포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외면하는 기사들과 상황을 파악하는 노기사, 그리고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나를 모두 외우려는 듯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가며 확인했어요.
며칠 동안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것만 같았던 그녀의 파란 눈이 섬뜩하게 빛났습니다. 저는 그녀가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것이, 그것이 복수든 혹은 실망이든, 그녀가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그날 밤, 그녀가 제 막사로 찾아왔습니다. 길고 아름다웠던 머리를 싹둑 잘라서 단발머리가 된 그녀는 제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너무 놀라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까지 숙이며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그 가련하고 처량한 모습을 보면서도 저는 그냥 이쁘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더군요. 그녀의 비장한 결심마저도 제게는 그저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순간에도 그녀의 아름다움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제가 어리석고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제가 그녀의 아름다움에서 눈을 뗄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습니다. 가녀린 그녀는 깃털처럼 가벼웠죠. 그리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기사의 맹세를 했습니다.
저는 기사가 아니지만 기사의 맹세를 했고 그녀는 군주가 아니지만 저의 맹세를 받아주었습니다.
달빛이 드리운 빛을 받은 그녀는 마치 아름다운 조각상 같았어요. 저는 다시 한번 목숨을 드리겠노라고 맹세했습니다.
그녀는 성 앞에 있다는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저항군이 있음을 백성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또한 포위된 수도에 병력이 추가되는 상황을 막으려면 자작성에서 함부로 병력을 빼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제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저는 그녀를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그녀는 말을 타고 저는 수레를 탔습니다. 제가 뛰어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먼저 앞서 나가는 그녀를 보며 저는 슬쩍 고개를 돌려 제 막사 옆을 보았습니다. 역시나 노기사가 서 있더군요.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주고받았습니다. 노회한 그가 어떻게든 뒷수습을 해줄 거라 생각하니 조금은 불안감이 가시는 듯했습니다.
성에 근접하니 새벽녘이더군요. 의도하진 않았지만 기습하기 좋은 시간대였죠. 함께 나서려는 그녀를 성 밑 마을의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저만 수레를 끌고 시체가 매달린 장대로 다가갔습니다.
성밑 마을의 중앙에 있는 여섯 개의 장대에는 사람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죠. 보초를 서는 두엇을 처리하고 시체를 장대에서 내려 수레에 모두 실었을 때 주변이 환해졌습니다.
역시나 함정이었던 거죠. 예상했던 일이기에 놀라지 않고 수레를 몰아서 대로변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이 끝나는 곳 근처에 목책으로 길이 막혀있는 것이 보이더군요. 저는 수레에서 내리며 대형 전투망치와 커다란 방패를 꺼내 들었습니다. 막혀있다면 뚫어야 했으니까요.
누구도 제 일격을 막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제 방패를 제대로 타격할 수 없었죠. 방패를 내려치는 순간 교묘하게 비틀거나 밀어붙여서 힘의 전달을 흩어버렸으니까요.
목책은 제 망치질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습니다. 저는 수레를 끄는 말의 궁둥이를 쳐서 대로를 통과해 마을 입구로 달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적들을 막아섰습니다.
여섯이나 되는 시체를 실은 수레가 빨라봤자 얼마나 빠르겠어요. 금방 따라 잡힐 것이 뻔했기에 일단 이들의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흉포하게 날뛰었습니다.
저 멀리 성에서도 불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기에 본대가 출발하기 전에 이 마을에서 매복했던 이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 더 세게 적을 후려쳤어요.
방패를 부수고 검을 꺾으며 적을 부숴버리자 등을 돌리고 도망가는 자들이 생기더군요. 저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들을 오만하게 바라보고서는 방패와 전투망치를 들고 돌아서 걸었습니다. 어느 정도 멀어지자 뛰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화살이 날아오더군요.
수레자국을 따라 뛰어서 산의 초입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죠. 기마대의 추격 소리인 것이 분명해서 다시 무기를 잡으려는데 저 앞에서 노기사의 목소리가 들렸죠.
“계속 앞으로 달려!”
“경의 목소리가 이렇게 달콤하게 들리긴 처음이에요! 제겐 역시 경 뿐인가 봐요!”
“헛소리하지 말고 신호 줄 때까지 계속 달려!”
한참이나 싸우고 여기까지 달리느라 입에선 단내가 났지만 노기사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힘이 솟더군요.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앞으로 달려 언덕을 올랐습니다.
기마대가 언덕을 오르기 시작할 때쯤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고 미리 준비한 듯 돌과 나무가 굴러왔죠. 저는 한쪽으로 피해서 그것을 바라보며 숨을 돌렸습니다. 노기사는 제게 다가와 어깨를 툭 치곤 말했습니다.
“잘 봐둬. 기사가 싸움만 잘한다고 기사가 아닌 이유니까. 전장을 지휘하는 자가 기사다.”
멋들어지게 말한 후에 노기사가 손짓을 하자 일단의 병력이 나타나서 적의 뒤를 막더군요. 분명히 오글거리는 대사인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가 참 멋있게 보였습니다.
숨을 돌린 저도 망치과 방패를 들고 싸움에 끼어들었죠.
추격해 온 기마대는 선발대였고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은 우리는 패잔병을 수습하려던 본대를 다시 기습해서 섬멸할 수 있었습니다.
추격을 따돌리고 숲으로 돌아온 이후에 우리는 시신을 화장했습니다. 시신은 그녀의 첫째 오빠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눈물 한 방울 없이 화장을 지켜보고는 단발이 된 자신의 머리를 또 한 줌이나 잘라서 불 속에 던져 넣었어요. 죽은 오빠와 자신의 일부를 함께 태우는 그 행위가 너무도 비장해서 모두가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지금 이 순간 자작가의 첫째 아들과 함께 셋째 딸은 죽었다.
나는 여인으로 태어나 여인으로 길러졌으나 이 순간부터는 그저 자작가의 셋째로서 살아갈 것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말씀하셨다. 귀족은 목장주라고. 울타리를 지키고 그 안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이라 했다. 울타리가 위협받는 지금, 아버지가 쓰러지셨으니 울타리를 지키는 역할을 내가 받도록 하겠다.
나와 함께 끝까지 울타리를 지킬 자들은 남고 아닌 자들은 떠나라. 누굴 잡지도, 원망하지도 않겠다. 울타리를 무너지게 한 자작가의 잘못이기에 떠나는 이들을 이해하겠다.”
잠시 불타는 소리만 들려왔어요. 아무도 먼저 나서지 못했죠. 노기사가 제일 먼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죠. 뒤를 이어 제가 무릎을 꿇고 하나 둘 천천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한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기사와 병사가 원으로 둘러싼 그 한가운데에서, 화장을 위해 쌓아 올린 제단 옆에서, 그녀는 강렬한 햇볕을 온전하게 받으며 오롯하게 섰습니다.
그저 아름다운 여인에게 가졌던 제 첫사랑은 그 순간, 주군을 경애하는 마음까지 더해서 더 단단하게 변했습니다.
오직 하나뿐인 사람.
이 순간 그녀는 저에게 단 하나의 확신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