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 흔한 중세 로망스(4)

- 누구나 아는, 모두가 앓는, 피할 수 없는 그 지독한 열병에 대하여

by 블랙스톤

그녀가 결심을 하고 기사들이 충성을 맹세하며 병사들이 이탈 없이 그녀를 따르기로 했다고 해도 전황이 좋아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직 자작령을 점령한 이들의 병력은 저희보다 몇 배나 많았으니까요. 그래도 방향을 정했기에 전보다는 회의가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립된 전략은 적의 보급선을 괴롭히는 방향이었습니다.

수도는 이미 포위되어 있으며 한차례 귀족들의 지원군이 격파된 상태였기에 이제와 지원을 가느니 뒤에서 보급선을 공격하기로 한 거죠.


저희는 자작령의 경계를 넘나들며 적을 공격했습니다. 첫 번째 습격에서는 적의 보급을 탈취할 수 있었고 두 번째 습격에서는 적의 보급을 불태울 수 있었죠. 이후에는 습격이 쉽지 않았습니다.

경계가 삼엄해져 접근하기도 쉽지가 않았죠. 하여 조금 더 치밀하게 습격을 계획하는 중에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회의를 열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허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죠.


왕자 하나와 공주 하나만 탈출에 성공하고 왕과 나머지 왕자, 공주들은 모두 사로잡혔다고 했죠. 그리고 적국은 왕의 입을 빌어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충성을 바치는 모든 이들은 항복하라고. 그들은 명목상의 왕을 그대로 두고 총독부를 만들어 왕을 지배할 생각이었습니다.

달아난 왕자가 숨어서 병력을 모은다는 소문이 돌자 이내 왕이 왕자를 반역자로 선포했습니다. 반역자가 된 왕자는 왕성에 갇혀 포로가 된 왕을 구하겠다며 반발했죠.


자작령 기사들은 자작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자작은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죠. 국가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맹목적인 충성은 어디까지나 자작님을 향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여 왕을 대신하여 국가를 대표한다는 왕자의 주장은 많은 힘을 얻기가 힘들었어요.

당장 자작령의 기사들만 하여도 지도력을 보인 아가씨가 어떤 판단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나라를 위한다는 애국심보다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판단해 보려는 움직임이 더 컸어요.


하루를 꼬박 고민한 그녀는 병사들과 함께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했어요. 모두는 알았죠. 무언가 중대한 이야기를 하겠구나. 그녀는 모두와 같은 밥을 먹고 조용히 한잔의 술을 마신 후에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각자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남자처럼 머리가 짧아진 그녀는 서서 모두를 천천히 돌아보았는데 갸녀린 모습이었음에도 무거운 기세가 느껴졌어요.

몇 번의 전투와 죽음들이 그녀를 다스리는 자의 모습으로 바꿔버렸죠. 그 힘든 시간을 담금질의 시간으로 받아들인 그녀는 위태로울 정도로 단단해져 있었고 그 날카로운 가시에 저는 안타까움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죠.


“자작님은 자작령의 울타리가 되어 주셨다. 나 또한 그 뒤를 따라 자작령의 울타리가 되려 하였다. 울타리를 넘어 내 사람들을 공격한 이들을 징치하려 하였지.

어쩌면 처음에는 오로지 복수라는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아버지를, 오라비를 죽인 이들에 대한 복수. 하지만 그런 이기적인 복수를 하려는 나를 따르는 이들과 나를 도우려는 이들을 보고 느낀 바가 있다.

그들을 가엾게 느끼는 나를 보며 느낀 바가 있다. 나는 이 땅을, 이곳에 사는 이들을, 나를 좋아해 주는 모든 이를 사랑하는구나.

이 땅에서 난 것들을, 이 땅에 선 문화를, 그 문화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행복을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어쩌면 그 모두를 하나로 이어주는 이 나라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너희들에게 복잡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해산하고 이름을 바꿔 살아가거나 다른 나라로 가버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당연히 죽을지 모르는 일이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 되겠지.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사는 이 땅이 좋은 만큼 이 땅에 들어와 난장을 치고 있는 저들이 싫다. 충성, 애국, 애민, 모두 잘 모르겠다.

나는 내 사람을 지키고 싶고 내 사람을 마구 죽이고 수탈하는 저들이 싫을 뿐이다. 그러니 다시 한번 선택지를 주겠다.

지금이라도 미래를 꿈꾸는 자는 떠나라. 나는 미래를 약속해 줄 수 없다. 다만 나는 받은 만큼은 무조건 돌려줘야 하겠다. 돌려주기 위해서 내 목숨을 걸라고 하더라도.”


말을 마치고 그녀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하나하나의 눈을 맞추며 돌아보곤 자신의 막사를 향해 움직였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랐습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죠.

그녀는 곁눈질로 저를 확인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어요. 경 말고 또 따라 나선자는 없나?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서, 아까의 단호한 모습이 생각나서, 내게만 보여주는 여린 모습이 귀여워서, 그리고 감사해서, 저는 살짝 웃었습니다.

제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는 살짝 입을 삐죽였죠. 그 모든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또다시 웃었다가는 단단히 삐질 것만 같아서 얼른 답했습니다. 분위기를 잘 잡아주셨으니 노기사가 알아서 할 겁니다.


그녀는 안도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어요. 그리고 말했죠. 항상 고마워. 경에게도, 노기사에게도. 든든한 내 편이란 거 정말 좋네.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았거든요.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어요.

제 웃음도, 붉어진 얼굴도 그녀는 모르고 있을 테니까요. 그녀에게 저의 든든한 모습만 보일 수 있으니까요.


몇몇 떠나는 이들이 있었지만 기사는 전부 남았습니다. 노기사는 떠나는 이들에게 이곳의 소식을 은밀히 전파해 달라고 했고 떠나간 이들이 전한 소식 덕인지 병사는 오히려 불어났죠.

노기사는 소문을 따라 저항할 이들과 토벌할 이들이 함께 올 것이라 예상하고는 사방에 정찰병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적이 이동할 경로를 찾아 함정을 준비했어요.

적들도 몇 번 당해봐서 신중하게 움직였지만 능구렁이 같은 노기사를 피할 순 없었습니다. 계곡도 아니고 평원에서 미리 야영할만한 곳을 찾아 준비를 해놓은 덕에 적들은 야습을 피할 수 없었죠.


어떤 미친놈이 평원에 땅굴을 파고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무슨 수를 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기다리던 곳에 야영을 시작한 적의 본대는 궤멸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보호받던 적의 귀족도 여럿 생포할 수 있었습니다. 노기사는 운이라고 표현했지만 전투에 참여했던 기사들과 노기사의 옆에서 지휘를 함께한 그녀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죠.


이 전투로 자작령은 해방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자작성에 남은 소수의 적을 제외하곤 자작령에 적의 병력은 없었으니까요.

그녀는 자작성을 탈환하고 싶어 했지만 노기사는 왕자에게 합류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자작성을 탈환해 봐야 도우러 올 이들이 없는 지금은 스스로 우리에 갇히는 꼴이라고요.

그녀는 아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곤 저를 돌아보며 말했죠. 언젠가 꼭 자신을 자작성으로 데려가달라고요.

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습니다. 반드시 자작성에 그녀가 설 수 있도록 해드리겠다고.


왕성에서 도주한 왕자는 뒤늦게 합류한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왕자의 곁에는 수도에서 유학하던 자작의 둘째 아들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왕자는 자신과 함께 대피한 공주의 남편감 자리를 두고 귀족들이 경쟁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더 많은 병력과 지원을 바치길 원했죠. 그리고 둘째 공자 역시 그 자리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자작령의 병력이 생각보다 건재했기에 금방이라도 공주의 남편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는 자작령의 기사들이 모두 그녀를 따르자 당황했어요.

둘째 공자는 왕자가 있는 자리에서 정통성을 언급하며 자작령의 기사들이 자신이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요.

왕자는 고민하다 그녀에겐 전쟁터 대신 좋은 혼처를 알아주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심복의 손을 들어주더군요. 그녀는 항변했지만 이번엔 노기사마저도 그녀를 도울 순 없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따라 후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제 덩치를 본 왕자나 둘째 공자가 저를 선봉에 세우길 원했지만 저를 태울 말을 구할 수 없는 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라 이내 포기하더군요.


저는 호위를 위해 그녀의 곁에 남게 되었습니다. 작전회의에 참석했던 노기사는 가끔 그녀를 보겠단 명목으로 찾아왔습니다. 그의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았어요.

노기사의 의견은 일방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했어요. 왕자를 가장 크게 후원하고 있는 대귀족의 입김대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현재의 진형이나 진군 방향에 대해서 아무리 경고를 해도 듣지 않고 있다고. 적들이 한 달도 되지 않아 수도를 포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기습을 당한 탓이라 생각 중이라고.


그동안 노기사에게 지휘를 배우고 있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어쩌면 이후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녀의 부탁을 받은 노기사는 둘째 공자를 구워삶아서 제 몸에 맞는 갑옷과 무기를 건네주었습니다.

만일을 위한 것이기에 저는 최대한 튼튼한 무기를 원했고 노기사는 ‘울부짖는 이빨’이라는 양손도와 철로 된 큰 방패를 얻어왔습니다.

둘 다 성인 남성 키정도의 크기였지만 제게는 한 손으로 쓰기 좋은 크기와 무게였습니다. 좋은 무기를 얻은 덕에 저는 둘째 공자에게 가서 감사를 표해야 했어요.

공자는 그녀가 결혼하고 나면 제가 공자의 호위무사가 될 것이라 말하더군요. 저는 그저 감사를 표했습니다. 제 힘을 버틸 수 있는 무기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으니 고마운 마음은 진짜였습니다.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이것으로 그녀를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녀에게 다시 돌아와 다시 한번 기사의 맹세를 올렸고 그녀는 제 손을 꼭 잡으며 고맙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전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됐습니다. 싸울 의지가 있는 이들이 왕자의 편으로 모여들었기에 병력은 적과 거의 비등할 정도였죠. 오히려 이쪽이 기사의 숫자가 더 많았기에 기사단 돌격이라는 필승카드를 쥐었다고 느끼고 있었죠.


몇 번의 전초전 이후 이어진 전면전에서 적의 빈틈을 향해 달려든 우리의 기사단은 적이 던진 노예병들에게 발이 붙잡아버렸습니다. 이후에는 전장을 우회해서 적의 기사단이 달려들었죠. 그리고 적의 기사단이 우리의 진형을 뚫는 순간 왕자를 필두로 한 고위귀족은 겁을 먹고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녀가 입은 갑옷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전장을 확인하기 위해 열려있던 안면 가리개까지 내려준 이후 제 무장을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긴 전투가 될 예정이었기에. 어쩌면 마지막 전투가 될 수도 있었고요.

그녀는 이 와중에도 침착하게 귀족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도주해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그녀가 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제 등에 그녀의 손이 닿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갑옷을 입고 있기에 느껴질 리 없는 따뜻함이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경을 온전히 믿습니다. 이번에도 구해주실 거죠?”

“언제든. 어디서든. 저는 아가씨의 검이며 방패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