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 흔한 중세 로망스(5)

- 누구나 아는, 모두가 앓는, 피할 수 없는 그 지독한 열병에 대하여

by 블랙스톤

도주를 해야만 하는 입장에서 말을 타지 못하는 호위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거의 없습니다. 미끼가 되어 시선을 끌거나 시간을 끄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그날의 전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혹시나 있을 패퇴를 예상한 노기사와 그녀는 저에게 한 가지 지령을 주었습니다.


최대한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라. 그리하여 그대의 뒤에 이동하고 있는 아가씨의 존재를 숨겨라.


처음엔 그녀의 곁에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제가 말을 탄 그녀의 곁에서 같이 달릴 방법이 없더군요.

불안해하는 저에게 노기사는 슬쩍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지휘나 전략전술에 재능을 보이고 있으니 이번에 붙인 호위병들이면 충분할 거라고. 예기치 못한 상황만 발생하지 않도록 잘 봐달라고 하더군요.

사실 최악의 상황을 준비하면서 자작령의 최정예 병력을 모아 호위병으로 붙여놓은 상태였습니다. 미리 대비까지 한 그녀와 정예들을 믿으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지혜롭고 찬란한지 알고 그것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기에 그만큼 불안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 불안은 마음 한구석 깊은 곳에 밀어두었습니다.

제가 불안해한다는 것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녀에게는 저의 단단한 믿음만이 보이길 바랐습니다.


후퇴가 시작되면서 저는 ‘울부짖는 이빨’을 휘두르며 적들을 도륙했습니다. 단단하고 제 힘을 버틸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이번에 주어진 도는 엄청난 물건이었습니다.

단단한 것은 물론이고 쇠를 이물감 없이 갈라내고도 이빨 하나 나가지 않았으니까요. 덕분에 한 번의 휘두름으로 서넛의 적을 쓰러트릴 수 있었죠.

놀란 적들이 아우성치며 제게서 멀어지는 덕분에 도주로는 쉽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말을 탄 호위병들과 함께 빠져나가는 그녀가 잠시 멈춰서 안면가리개를 열고는 제게 말했습니다. 걱정되지만 걱정하지 않겠어. 다만, 꼭 돌아와야 해.


그녀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 투구 안의 제 얼굴은 웃고 있었을 겁니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어쩌면 제가 가진 불안과도 같은 거라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더군요.

그녀가 빠져나간 방향으로 튀어나가면서 저도 모르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기쁨의 함성을.


달아나며 전투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져 몇 번이나 실수를 했습니다. 새로 장만한 갑옷이 아니었다면 큰 부상을 입고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길을 뚫는데 시간이 지체되면 적이 늘어나 다시 포위가 되었습니다. 하여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죠. 몸을 사렸다가는 적들에게 파묻힐 판이었어요. 해서 일부 공격은 갑옷을 믿고 몸으로 받아내며 달려 나가야만 했죠.

적들이 몰리면 몰릴수록 시선이 잔뜩 끌린 덕에 전장에서 이탈하기도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웃긴 것은 그녀의 도주를 돕기 위해 싸우는 제 덕에 살아서 이탈하고 있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심지어 제 쪽으로 합류하는 이들도 있었죠. 무슨 상황인가 싶어 다가왔던 적의 기사 몇을 베고 나니 드디어 전장에서 이탈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깽판을 치고 합류한 패잔병들과 함께 이동했지만 바로 적들의 추격이 붙지는 않았습니다. 소규모 추격이야 바로 격파했기에 더욱 문제는 없었죠.

패잔병들은 흩어지지 않고 제게 달라붙었습니다. 아마도 제 옆에 붙어 있으면 살 수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어요. 저는 쉬지 않고 반나절 거리의 숲을 향해 달렸습니다.


노기사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그녀는 제게 적을 떨쳐낼 수 있는 장소를 세 곳이나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 곳은 내륙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험지들이었죠.

의아해하는 제게 그녀가 처연히 웃어 보였습니다. 전투에 패배한 왕자와 귀족이 향할 곳은 이웃 국가일 수밖에 없다더군요.

그렇기에 국경의 반대 방향으로 도주해야 하며 그 와중에 많은 병력을 살릴 수만 있다면 뒷일을 준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추격대를 박살 낼 수만 있다면 더 나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이더군요.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달리면서 저는 그녀가 제게 남긴 이야기만 되뇌었습니다. 걱정되지만 걱정하지 않겠다. 꼭 돌아와 달라.


작전이니, 대국이니, 세력의 향방이니 하는 것은 제게 전혀 와닿지 않았습니다. 지금 제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남긴 그 말과 따뜻했던 눈빛, 걱정이 가득했던 표정이었죠.

지친 제 발걸음을 한 번이라도 더 내디딜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사실 작전이나 책임감이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 그것뿐이었습니다.


목표했던 숲에 도착해 병력을 수습하니 생각보다 많은 숫자였습니다. 병력을 추스르며 휴식을 취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죠. 아니나 다를까 왕자를 추격하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추격대가 저 멀리 보였습니다.

휴식을 취하던 패잔병들은 추격대를 보고 겁에 질렸지만 도망을 치진 않았습니다. 휴식을 명하며 곧 적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이었죠. 적을 숲 깊숙이 끌어들인 후 공격해서 적을 후퇴시켰습니다.

격파가 아니라 후퇴가 맞는 말이었습니다. 패잔병이 된 아군은 겁을 먹어 공격에 소극적이었고 제 칼을 피한 대부분은 살아서 후퇴했으니까요. 우리는 다시 도주를 선택했습니다.


두 번째 장소는 숲을 넘어서면 나오는 산맥의 입구였습니다. 숲이 끝나자마자 나오는 탁 트인 구릉. 그 완만하게 높아지는 언덕에 방책과 임시 막사를 만들어 두고 숲 입구에 매복을 했습니다.

숲을 지나며 경계하던 이들은 숲 앞에 방책이 보이자 우리가 그곳에 진을 세웠다 방심하더군요. 그들은 일단 추격을 멈추고 진형을 가다듬으려 했고 때마침 이어진 기습에 놀라 궤멸당했죠.

한 번의 승리를 맛본 패잔병은 더 이상 제 지휘에 소극적이지 않았고 덕분에 적을 박살 낼 수 있었습니다. 전장을 수습하고 방책 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다시 움직여야 했습니다. 추격대가 박살 났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적의 군대가 올 테니까요.


세 번째 장소는 산맥의 옆쪽으로 비껴나간 구릉과 산맥 사이를 따라 흐르는 강가였습니다. 우리는 그 강을 따라 이동했고 군대가 회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넓은 강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병사들은 더 이상 주눅 들어 있지 않았고 새로이 합류한 패잔병들을 다독여줄 수 있을 만큼 안정되었습니다. 그들은 선두의 저를 가리키며 패잔병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죠.

사실 제가 한 것은 노기사와 그녀가 짜준 계획을 가져다 쓴 것 밖에는 없는데 말이죠.


우리는 배를 만들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하루가 지나자 적의 추격대가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방벽과 방책을 세우고 배를 만들며 도하를 준비하고 있는 저희를 보고는 진군을 멈췄고 다시 하루가 지나자 추격대의 본대로 보이는 이들이 도착했죠.

그들은 급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를 타고 강을 도하하는 순간을 노려 공격한다면 큰 피해 없이 저희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혹시라도 그것이 무서워 그대로 웅크려 있는다면 포위해 고사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적의 본대가 도착해 식사를 하려는 듯 연기가 올라오는 순간에 맞춰 우리는 도하를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적의 본대는 오랜 행군에 이어 밥도 먹지 못하고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준비한 대로 강가에 설치된 커다란 물통들을 모두 부수고 어설프게 만든 뗏목에 올랐습니다. 특별히 선발한 용감한 병사들과 저는 남아서 적들의 공격을 막았죠.


우리가 선택한 전장은 비가 오면 진창이 되어버리는 강가였습니다. 강가였기에 준비한 물은 충분했고 순식간에 진흙탕으로 변해버린 환경에 말들은 멈춰 섰습니다. 달려오던 보병들도 걸음이 느려진 건 마찬가지였죠.

이어지는 우리의 저항에 적은 멈춰 섰고 그 순간 강 너머 산맥에서 우리가 준비한 마지막 비수, 자작령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산맥에 숨겨놓았던 방책을 꺼내 강가에 세웠습니다. 방책 위에는 사람이 올라갈 만한 단상도 준비되어 있었죠.

단 한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엉성한 방책이며 망루였지만 그 위에서 발사되는 화살은 적의 머리에 떨어졌죠.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뗏목은 하류로 가서 강가에 절반의 병력을 내렸습니다. 내린 병력은 강가에 진형을 짜며 교두보를 마련하고 뗏목에서 내리지 않은 절반의 병력은 산맥쪽으로 강을 건넜습니다.

산맥 쪽의 보병이 준비된 나무를 뗏목에 때려 박자 어설픈 배다리가 완성됐죠. 그렇게 적의 옆구리에서 신경 쓰이게 하는 보병의 도하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병대가 진흙탕에 멈춰 서고 화살은 머리에 떨어지고 오른쪽에선 보병이 도하를 하는 상황에서 적들은 몇몇 부대로 나뉘어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적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산맥의 입구 지점에서 출발한 기사단이 크게 우회하여 진흙탕 밖의 적을 공격했습니다.

적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대응을 하는 순간부터 저도 앞으로 나서며 적들을 공격했습니다. 병사를 베고 기사가 나서면 기사를 베었으며 귀족이 나타나면 칼등으로 적을 쓰러트렸죠.

보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포위한 셈이었지만 사방에서 들리는 함성에 적들은 전의를 잃고 이탈하거나 항복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대승이었어요.

그리고 전투가 마무리될 때쯤 노기사와 뗏목을 타고 넘어온 그녀가 제게 활짝 웃어주었습니다. 경은 내 보물이야! 최고라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 덕에 그녀가 외치는 말은 들리지도 않더군요. 그 밝은 웃음은 전쟁 전의 밝기만 하던 그녀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환해진 얼굴이 너무 좋아서 저는 헤벌레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노기사의 말에 의하면 진정한 미친놈이었다더군요.

피칠갑을 한 상태로 안면 가리개를 올리고 입이 찢어져라 웃는 거인은 누가 봐도 피에 미친놈으로 보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