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리지만 꾸준한 그대를 위한 환상곡, 한 곡 더
진태는 눈을 떴다. 마스터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기억난다. 마지막으로 밀어준 푸른빛이 도는 빠알간 칵테일을 시원하게 단번에 마신 것도. 그런데 머리가 아프지도 않고 숙취도 없다. 게다가 바에서 나온 기억도 없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자갈밭. 마치 예전 집의 마당에 깔려있던 그 자갈밭을 몇백 배는 뻥튀기해 놓은 듯 널찍한 공간. 아주 멀리 저 끝에 뭔가 수평선 같은 것이 보였다. 저 끝에 있는 수평선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라고? 도대체가 말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진태는 마음이 진정됐다. 꿈인 거구나.
오른손을 들어 오른뺨을 내리쳤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눈물이 핑 돈다. 아픈데? 아픈 꿈도 있나?
“여전히 멍청하네.”
한심하다는 느낌을 가득 실은 목소리가 들렸다. 얼얼한 오른쪽 볼에 오른손을 올린 상태로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하늘은 어두운 밤하늘이었는데 주변이 불을 켜놓은 것처럼 환했다. 밤하늘 위에는 둥근 보름달과 하얀 별들과 거북이 하나가 있었다. 음? 거북이?
“신기하냐? 어째 시간이 지나도 넌 여전히 얼빵하냐.”
그리고 소리는 그 거북이한테서 나오고 있었다. 이야. 꿈 한번 고약하네. 진태는 중얼거리며 그 거북이를 바라보았다. 거의 진태의 키만큼 큰 그 거북이는 허공을 유유히 날고 있었는데 유난히도 등껍질이 작아 보였다.
“아직도 모르겠니?”
“씨발. 장난치냐?”
저도 모르게 욕을 뱉었다. 하도 어항 유리에 머리를 부딪쳐서 살짝 굳은살처럼 단단하게 올라왔던 오른쪽 머리 위. 은근히 별 모양으로 변형되었던 그 살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진태가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욕을 하는 동안에도 거북이는 유유히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 툭 튀어나온 똥배가 자란 키 덕분에 조금 애교스럽게 보였다.
“이거 꿈이지?”
“나 먼저 튄다고 했잖아.”
퉁명스러운 그 목소리가 묘하게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 소리가 마음 한편에 닿는 순간 뭔가 맥이 탁 풀렸다. 진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도 뭔가 여운이 남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은 줄만 알았잖아.”
“몰랐어? 거북이는 날 수 있다고. 네가 말해줬던 거잖아.”
진태는 가만히 태진이를 바라보았다. 태진은 자랑이라도 하듯이 아주 천천히 하늘을 날았다. 둘이 함께할 때 태진을 마루 위에 내려놓으면 왼발을 내뻗고 왼쪽을 살피고 오른발을 뻗고 오른쪽을 살피며 집안을 꼼꼼하게 살폈었다. 오늘 하늘을 위의 태진은 이번엔 자신의 모습을 꼼꼼하게 내보이듯이 진태의 곁을 날았다. 진태는 그런 태진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태진은 새처럼 퍼덕이며 날지 않았다. 마치 바다에서 유영하듯이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하늘을 날았다. 진태가 태진이 하늘을 유영하는 모습에 집중하듯이 태진도 진태에게 자신의 모습을 모두 내보이려는 듯 그의 곁을 맴돌았다. 진태도 태진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두우면서도 별과 달이 빛나 환한 하늘을 배경으로 스치듯 날고 있는 이 순간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서로가 가장 꿈꾸던 순간 그 순간인 것만 같아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말을 잊었는지도 모를 머무르고 싶은 순간이었다. 한참이나 나는 거북이를 보던 진태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거북이는 날 수 있다고 했었나?”
“응. 바다를 날 듯이 하늘도 날 수 있을 거라고 매일 노래하며 내게 말해줬잖아. 무겁게 매달린 등껍질에 숨지 말라고. 너는 날면 되니까.”
진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노랫말도 없이 멜로디만 흥얼거리던 첫 자작곡. 어느 날 태진이를 보며 흥얼거리다가 장난스레 붙였던 노랫말. 등껍질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거북이를 위한 노래였다가 어느 순간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무언가 붙잡고 싶을 때마다 태진 앞에서 불러댔던 노래였다. 가난한 가수 지망생. 인디 밴드에 합류할 악기 실력은 없고 그렇다고 보컬이 특출 나거나 특이한 것도 아니었던. 혼자 끄적이고 불러대는 시간만큼 누구도 몰라주는 자작곡만 늘어나는 가수. 거리공연이 끝나고 몇몇 서 있던 사람들이 사라질 때 주섬주섬 악기를 정리하며 흥얼거리던 그 노래. 스스로 다짐하던 말이었다. 결국엔 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라.
“나 어때?”
“멋지다. 너무.”
“그래. 그거면 됐어. 난 멋지지.”
“응. 눈부실 정도야.”
“난 아직 날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그때부터.”
그때부터. 괜히 귀에 걸리는 마지막 말을 입안에 굴려보다가 진태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를 꽉 깨물었다. 눈을 비비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태진이의 유영을 끝까지 보고 싶었다. 한번 양팔을 펄럭여 높게 치솟기도 하고 이내 팔을 접어 내려왔다가 돌기도 하는 그 유려한 모습을.
“나는 건 기분이 참 좋아. 너도 해봐. 하도 날았더니 배가 좀 홀쭉해진 것 같아. 오랜만에 밥 좀 줄래?”
진태는 눈앞으로 바짝 날아와서 제 똥배를 붙잡고 허공에 둥둥 뜬 태진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똥배를 붙잡고 입을 벌린 채 얼굴을 약간 위쪽으로 쭉 뻗었기 때문이었다. 밥이라면 얼마든지 줄게. 진태가 두리번거리는데 태진이가 팔을 들어 진태의 등을 가리켰다. 거기 있잖아. 거기.
어느새 진태의 등에는 기타가 매달려 있었다. 태진은 진태가 기타를 발견하고 손에 들자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는 허공에 드러누웠다. 진태는 그 기타는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태진이와 함께 있을 때 쓰던 기타였다. 이제는 목이 휘어 처분해 버린.
가만히 현을 튕겨보았다. 특별한 조율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태진이가 사라지고 왠지 어머니의 말을 거스를 이유를 찾지 못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미친 듯이 이력서를 적어 내다가 결국 회사에 취직하고 매일 똑같은 생활을 했다. 출근하고, 퇴근한다. 지쳐서 쓰러지거나 맥주 한잔을 하고 잠들거나. 그러다 문득 기타를 잡은 날에 기타의 목이 휘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방치되었던 기타를 붙잡고 한참이나 서 있다가 자신의 안에 무언가도 이미 휘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기타를 버렸다. 다시 기타를 잡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렇게나 오래간만에 기타를 잡는데도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고 그 주변에 무수히 많은 하얀 별들이 관객처럼 자리 잡았다. 그 관객들의 가장 앞에는 허공에 누운 거북이가 있었다. 똥배 나온 우리 태진이. 기타를 들고 그 앞에 서자 예전의 그 기분이 가슴속에서 다시 솟아올랐다. 약동하는 가슴에서 리듬이 느껴지고 그 리듬에 맞춰 흥겹게 노래를 부르면 모두가 사라진 거리에서도 즐거워 둠칫둠칫 뒷정리를 하던, 그저 재미있는 음악을 하는 것이 좋아 작고 불편하고 무거운 등껍질에 숨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진태는 망설임 없이 기타를 퉁겼다. 가장 꿈에 목말라 있던, 꿈에 눈멀어 달려가던 그때 가장 많이 부르고 연주했던, 태진이를 위한, 우리를 위한 노래였다. 환하게 웃으며 노래를 불렀다. 내 생에 이렇게나 즐겁게, 그리고 크게, 영혼을 토해낸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꾹꾹 눌러 담아 세상을 향해 외치는 노래였다. 진태는 가슴이, 온몸이 뻥 뚫릴 때까지 모든 것을 노래했다. 노래를 따라 태진이는 천천히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