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통화, 금 그리고……
“서울말이랑 표준어랑 좀 다른 거 알아?”
“응? 서울말이 표준어 아니야?”
“서울말에도 사투리가 있어. 표준어에는 서울 사투리를 제거했고.”
“오~ 그래?”
나는 어릴 적 서울말이 표준어가 아니라는 말에 적잖이 큰 충격을 받았었다.
서울이 수도이니 수도에서 쓰는 말이 당연히 표준어일 거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내가 3년 넘게 유학했던 중국도 동일했다.
그곳 역시 북경에는 방언이 있었고, 중국의 표준어(보통화)와 완벽하게 일치하진 않았다.
“국제 공용어가 영어가 아닐 뻔했던 거 알아?”
“그럼? 스페인어?”
“에스페란토어라고 있는데 19세기 폴란드 언어학자가 만든 인공어야.”
“오~ 그래?”
“에스페란토어가 국제 공용어가 됐다면 우리가 영어를 공부할 필요는 없었겠지.”
세계 최강국의 언어가 당연히 국제 공용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내게 에스페란토어는 생소하면서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자연발생적인 언어는 표현력이 풍부해질수록 불규칙성이 늘어난다.
파랗다, 푸르다, 시퍼렇다, 시푸르뎅뎅하다……
blue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도 이렇게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우리 한국어가 외국인이 배우기 어려운 대표적인 언어로 꼽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에스페란토어는 표현의 다양성을 거세한 대신 규칙성과 단순함을 강조했다.
풍부한 표현력을 포기하고 최소한의 의사전달을 목적에 둔 실용어다.
서울말이 우리나라 표준어가 아니라는 것, 영어가 국제 공용어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
어린 시절, 이것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야를 꽤나 넓혀주었다.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니었을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은 우리가 지금껏 당연하다 생각해왔던 ‘돈’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국제결제에 사용하는 화폐는 달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미국만 없었더라면 달러 대신 국제결제에 쓰일 수도 있었던 이것이 바로 방코르 (Bancor)다.
‘유효수요’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경제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영국의 유명 경제학자다.
대공황에 빠진 미국을 구제한 것으로 알려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케인즈 학파의 경제이론을 채택하며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방코르는 케인즈가 고안해낸 국제결제 방법이다.
하지만 강대국의 입김을 배제한 채로 초국가적 중앙은행을 설립해 세계 경제를 운용하자던 그의 주장은 결국 초강대국으로 올라서던 미국에 저지당해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브레튼 우즈 체제가 확립되었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이 체제는 80년이 넘은 지금 이 시점까지 유지되고 있다.
언제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이 흔들리면서.
표준어의 기초가 된 서울말이 원래는 서울에서 쓰던 지역 방언이었던 것처럼, 영어가 원래는 앵글로색슨족이 썼던 지역 언어였던 것처럼 달러도 원래는 미국에서만 쓰던 로컬 통화였다.
그래서 케인즈는 세계통화로 방코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지만 결국 미국의 강한 의지로 인해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국제결제의 기준은 달러가 되어버렸다.
통화가 두루 사용되기 위해서는 사용의 주체가 되는 사람 혹은 단체가 사전에 그 통화를 보편적으로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을수록 그 통화는 거래의 매개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너도 달러 가지고 있어? 나도 있는데? 어? 달러가 생각보다 안전한 통화네? 그럼 우리 거래할 때 너희 돈이랑 우리 돈으로 하지 말고 달러로 거래할까?”
“안 그래도 무거운 금으로 거래하기 힘들었는데 잘 됐다. 오케이, 콜!”
이 말인즉슨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서만 사용되던 달러라는 통화가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전 세계에 뿌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용범위가 미국 국외로 확장된다는 건 미국 정부의 부채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초토화된 유럽을 재건하기 위해 미국은 무상으로 달러를 유럽 동맹국들에게 제공했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마셜플랜’이다.
유럽 각국은 자신들의 손에 갑자기 국제결제에 쓸 수 있는 달러가 쥐어져 좋았고, 미국은 머지않아 기축통화의 자리에 설 달러화의 미래를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을 수 있었다.
결국 미국은 성공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부채를 늘리며 전 세계에 달러를 공급했다.
달러 공급의 방식은 간단하다.
일단 거의 공짜로 찍어낸 달러로 전 세계 무역국의 물건을 사준다.
그렇게 달러는 지속적으로 전 세계로 뿌려진다.
충분한 달러가 전 세계에 공급되면 미국은 국채라는 차용증을 판매함으로써 전 세계에 뿌려진 달러를 회수하고, 이렇게 빌린 돈을 정부지출로 소비하며 다시 외국에 뿌린다.
장부에 기록되는 부채가 계속 늘어난다는 점만 빼면 아주 완벽한 돌려막기 수법이다.
하지만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미국이 국채를 계속 찍어내는 만큼 누군가는 미국의 국채를 계속 사줘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시대마다 ‘국채를 사줄 만한 호구’를 하나씩 만들어왔다.
그게 처음에는 일본이었고, 그 다음에는 중국이었고, 이제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세계에 뿌린 달러를 다시 회수해야 하는데 언젠가부터 중국이 미국 국채를 던져 오히려 자신들이 달러를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국채를 던지고 받은 달러로 중국은 ‘금’을 사고 있다.
만약 중국을 비롯한 미국의 채권국들이 딴생각을 품지 않고 미국의 국채를 계속 사주기만 한다면 미국의 부채는 0이 몇 개 붙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 봤자 고작 장부상의 숫자일 뿐이니까.
하지만 기존의 채권국들이 지금의 중국처럼 미 국채를 사주기는커녕 오히려 국채를 팔아 달러 현금을 쟁여놓는다면 달러를 전 세계에 무한정 공급함으로써 동시에 자신들이 필요한 물건도 덩달아 얻어왔던 미국의 부채 시스템이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도 중국의 미 국채 매도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비협조적인 행동으로 인해 지난 수십 년간 잘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은행을 신뢰할 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은행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현금이 얼마든, 장부에 기록된 은행의 부채가 얼마든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어차피 돈은 계속 돌고 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가 먼저 눈치를 채고 ‘어? 이러다 내 돈 다 못 받게 생겼는데?’라며 은행에 맡긴 돈을 찾아가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점차 그 움직임이 확산된다면?
뱅크런이 발생하며 은행은 파산하게 된다.
지금 중국이 노리는 미국의 상황이 딱 이러하다.
중국은 지난 수십 년간 자신이 축적했던 미 국채를 팔아 달러를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안전한 자산인 금을 확보하는 데 이 달러를 소비하고 있다.
국제 금값이 폭등한 이유다.
중국은 달러를 버리고 금을 선택했다.
이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미국은, 아니 트럼프는 뜬금없이 비트코인을 언급한다.
왜일까?
비트코인이 금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오래 전부터 석유를 강조했던 트럼프가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반미 산유국들을 공격하며 그 의도를 드러내듯 비트코인과 기축통화에 대해서도 뭔가 길게 끌고 갈 만한 꿍꿍이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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