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엄마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정 많고 입담 좋은 큰 엄마의 사투리를 써가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큰 엄마처럼 말 해버렸다. “니 눈을 감어. 그라고 먹어보랑게.” 진짜로 그가 눈을 감고 베이비 엔초피를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환하게 웃었다. 입에 맞는 것 같았다. ‘뭔 아이컨택 어쩌구냐고......’ 그는 깨끗이 멸치볶음 접시를 비워냈다. 배꽃집 첫 게스트와 치룬 조식 해프닝이었다.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하고 어떻게 하면 외국인이 찾아오게 만들까 고심을 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관광 안내소’였다. 요즘은 어딜 가나 관광 안내소가 있지 않은가! 나도 여행 다닐 때 안내소에서 버스노선이나 숙소, 근처 맛 집 같은 것을 물어보기도 한다. 그래서 터미널과 그리고 관광지에 있는 안내소를 찾아다니며 배꽃집 위치를 설명하고 명함 박스를 놓고 왔었다. “숙소를 찾는 분이 계시면 이 명함 좀 꼭 전해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정중한 부탁과 함께. 역시, 노력은 배반을 하지 않았다.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아서 안내소 중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외국사람인데, 어떻게 배꽃집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어머머머, 감사합니다. 네 저희 집 방향 버스 태워 주시면, 제가 정거장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께요.”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손님 보내겠습니다.”
버스 앞 자석에 앉아 있던 그를 픽업했다. 그는 배꽃집 첫 외국인 게스트였다. 그에게 숙소를 안내한 뒤, 배꽃집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을 것인지 물어봤다. 배꽃집에서는 한식을 제공한다.
“배꽃집에서는 조식을 한식으로 제공하는데, 어떻게 드시겠어요?”
“네. 좋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대접하고 싶었다. 텃밭에서 직접 키운 채소 삶고, 무치고, 볶아서 아침밥상을 준비했다. 특별히 냉동실에 보관하던 멸치를 꺼내서 맵지 않은 꽈리 고추를 넣고 달달 볶아 상에 올렸다. 그런데 다른 반찬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멸치볶음은 쳐다만 보고 있는 거다. 그래서 왜 멸치는 안 먹냐고 물었더니 멸치랑 아이컨택을 했단다.
그래서 눈을 감고 먹어보라 한 것이다. 다행히 순하고 착한 그는내 말을 믿고 멸치를 먹어주었다.
베꽃집 첫 외국인 게스트는 이스라엘에서 온 얼이었다.
얼은 군 복무를 마친 뒤 바로 해외여행을 시작했다고 햇다. 스물네 살 청년으로 일 년 째 여행중이란다. 우리나라에 오기전에 벌써 일년 째 여행중이었다고 했다.
얼의 고향 ‘커디마’라는 곳으로 영어로는 ‘전방에forward’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 ‘얼’은 ‘빛light'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을 하면서 내 이름과 우리 가족들의 이름에 담긴 뜻을 물었다.
그리고 아이들 중간 이름이 왜 같은지, 나만 왜 다른 성을 가졌는지 흥미를 보였다. 여자들은 결혼을 하면서 남편의 성으로 바뀌는 서양인의 시각에서는 결혼 후에도 아버지의 성을 유지하는 한국의 문화에 흥미로워 했다. 여성들의 인권이 높아지면서 현재는 서양에서도 결혼 한 여성들 중에는 남편의 성 대신에 자신의 성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글에 관심을 보이는 얼에게 자음과 모음을 설명해 주고 그의 이름 ‘얼’을 한글로 써 주었다. 한글로 쓰여 진 그의 이름을 보며 “beautiful"을 외치며 너무 좋아한다. 내친김에 도장처럼 이름에 빨간색으로 테두리를 그려 주며 “your 한글 signature”라고 주었더니 잘 간직하겠다며 가방에 챙겨 넣었다.
우리가 여행을 다니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에 있지 않을까? 통계로는 잡히지 않는 이야기들을 보고 들으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들을 맛보고 체험해 보는 것 말이다.
그런데 정말 궁금했다. 도대체 얼은 어떻게 군대를 제대한 후에 바로 여행을 할 수 있었을까? “너 아빠 찬스 썼니?”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서 두 아들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질문 할 때 질문을 하게 된 배경 설명하면 먼저하게 되면 상대편이 더 진지하게, 더 많은 정보를 주려고 하더란 말이지. 그래서 조신하게 물어봤다.
얼은 군 복무를 ‘National Service’라고 표현했다. 알지 못한 단어였다. 눈치껏 새로운 단어를 배워가며 대화를 나눴다. 얼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내가 가진 영어 밑천은 일천할 뿐이다. 그와 나눈 대화 중에서 귀에 확 꽂힌 것은 바우처 얘기였다.
“국가에서 지급한 바우처로 여행을 한다고?” 퍽 생소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와 여러 가지로 병역제가 비슷한 이스라엘에서는 국가 서비스를 마친 전역자에게 교육이나 여행 등의 경비로 바우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래서 얼도 2년간 세계 여행을 계획할 수 있었던 거다.
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군대를 다녀온 두 아들과 네 명의 내 남자형제들과 친조카들과 외 조카들, 대학 동기들, 남편, 그리고 이웃집 아들들이 생각났다. 휴가를 나와서, 또 제대 후 초라했던 그들의 모습이다. 그것은 스무 살 넘은 성인들이 스스로의 품위 유지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초라함이었다.
얼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였다. 우리 집 두 아이는 90년대 출생자들이다. 그들은 60년대 출생자였던 내 동생들과 달리 군복무 중 용돈을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동생들보다는 더 많은 월급을 받았지만 그들도 초라한 군 시절을 보낸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제대한 90년생들에게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혜택과 지원도 없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페미니즘이나 미투에 반감을 드러내는 청년들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얼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청년들의 분노를 그제야 공감하게 되었다. 정당하게 평가되고 취급되지 못한 그들의 헌신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졌겠는가! 이해되고 공감되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과 논리는 옳지 않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불만이 여성들에게 향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정책에 목소리를 높여 개선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청년들이 받았던 보상을 우리 청년들도 받아야 한다. 헌신한 개인들의 시간이 가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얼은 한국을 더 많이 보기 위해서 서울로 떠났다. 강화도에서 평화전망대와 석모도에 있는 보문사와 그리고 동막 해수욕장을 구경하고 난 뒤였다. 그때는 강화순환버스가 운행되던 때여서 강화순화버스를 타고 강화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맑은 공기, 그리고 넓은 갯벌을 눈에 담고서 서울로 향했다.
사람이 소통하는데 능숙한 언어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언어적인 것들, 존엄, 예의, 태도, 눈길과 같은 것들로 얼과 흠뻑 정을 나누었다.
며칠 뒤 얼에게서 문자가 왔다.
Hello Nam Sun!
I hope you enjoyed Easter in Ganghwa. I spent a few nights in Seoul, visited some markets and palaces. It was interesting but I am happy I have left to Busan (just got here!), Seoul is very cold and polluted and I am a bit sick.
Tomorrow I will go to Jinhae for the cherry blossom festival.
Thank you again for hosting me, I enjoyed my time with you and your family very much. It will be very hard to forget :)
I hope that more foreigners will come to your guesthouse.
We will keep in touch!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