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빠지는 일

24년 8월 2일 금요일

by 보리남순

호박에게 새 길을 내어 준 시간 한 시간.


요즘 망설임 병에 걸렸다. 가늠되지 않는 날씨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며칠 째 맑지 않은 날이 계속되고 있다. 부는 바람도 심상치 않다. 꼭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다. 망설이다 마당으로 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던 빗방울을 차 유리창에서 발견한다. 비를 맞아도 좋겠단 생각이 들자 마음이 가벼워진다.


오늘 베야 할 풀은 호박넝쿨이 뻗어나갈 곳이다. 장맛비를 마신 풀들이 무릎 높이로 자랐다. 뻣뻣하게 자란 억세어진 풀들은 무딘 낫으로는 어림없다. 충전식 예초기도 비웃음을 살뿐이다. 시퍼렇게 날이 살아있는 새 낫 한 자루를 들고 밭으로 갔다. 뻣뻣하게 고개를 세웠던 풀들이 날카로운 새 낫에 무력하게 쓰러진다.

길을 찾지 못한 호박넝쿨이 옥수수밭까지 뻗어있다. 마디에서 돋아난 이빨 같은 뿌리로 땅을 힘껏 틀어쥐고, 거두어들이는 힘과 맞서다 넝쿨이 끊어지고 만다. 끊어진 넝쿨에 달린 꽃과 애기호박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땀이 흘러들어 흐려진 눈도 마찬가지다.


호박넝쿨이 뻗어나갈 새 길을 만들었다. 1시간이 흘렀다. 풀을 베는 1시간은 씨앗을 심고 가꾸는 서너 시간과 맞먹는 시간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 때보다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할 때 몸과 마음이 쉬 지친다.

생명의 죽음을 목도한 날은 으레 그렇게 된다.


멈칫대던 날씨는 여전하다. 비를 맞았더라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으려나...?